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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여명이 밝아오기는커녕 아직 세상은 청색의 기운으로 뒤덮여있다. 문군은 지난 밤 잠자리에 들면서 험준한 이라고 고갯길을 혼자 걸으리라 작정한 터다. 카미노에서 자전거는 어느 순간 애물단지가 돼 버렸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끙끙대며 밀고 가느라 매번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게 문군은 내심 미안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나온다. 과장 조금 보태 간신히 바늘땀 한 번 뜰 수 있을 정도의 솜털 같은 눈들이 빽빽하게 쏟아진다. 눈밭에 첫 발자국 남기는 기분이 묘하게 긴장되면서도 낭만적이다.

벗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것도 좋지만 차분히 고독을 즐기는 것도 걷는 여행의 묘미. 마을을 벗어나 투리엔소 계곡을 막 지날 때쯤 저 아래서 순례자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평범한 대화인데도 골짜기를 타고 올라오는 재잘재잘 소리가 청명하다. 눈발은 더욱 거세지고 문군은 몸을 잔뜩 옹그린다. 아무래도 더 이상 낭만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천국의 풍경? 발 아래 진흙 있다면 지옥길

끝없이 이어지는 눈밭길. 혼자 걸으면 천국이 되지만 진흙길에다 오르막까지 만나면 지옥이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눈밭길. 혼자 걸으면 천국이 되지만 진흙길에다 오르막까지 만나면 지옥이 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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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500m 산길을 넘나드는 순례자들. 세찬 눈발이 휘날려 평소보다 더욱 힘든 걸음이다.
 해발 1500m 산길을 넘나드는 순례자들. 세찬 눈발이 휘날려 평소보다 더욱 힘든 걸음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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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루트대로라면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 중에 하나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1500m가 넘는 길을 혼자서 멋지게 넘으리란 문군의 장밋빛 환상은 이내 깨진다. 경사는 급해지고, 폭설은 멈출 줄 모르고, 연이어 진흙길이 나온다. 이겨진 진흙은 풀처럼 찰싹 달라붙어 바퀴는 굴러갈 생각을 않는다.

잠시 후 순례자들이 하나둘 그를 따라잡기 시작한다. 폭설 속에 실루엣을 보니 첫 주자는 체력 좋은 헬리오스나 하비가 아닌 의외로 재희다. 그녀는 카미노 여정 초반, 순례자들의 눈물과 땀을 짜내는 난코스로 악명이 높은 진흙 투성이의 가파른 페르돈 언덕에서도 그의 자전거를 밀어줘 위기에서 탈출시킨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녀는 역시 별다른 선심성 멘트나 살가운 표정 없이 문군의 자전거를 밀기 시작한다. 옆바람이 뺨을 갈기고, 맞바람에 눈을 게슴츠레 떠야하는 상황이라 다들 마스크까지 무장한 상황이다.

"됐어! 해냈어! 고마워요!"

숨을 헐떡이던 문군이 환호한다. 10분간 언덕 진흙길과 사투를 벌이고 마침내 아스팔트 도로를 만났을 때 땀으로 젖은 그가 희열감에 빠진다. 둘 다 기진맥진한 상황, 그녀가 아니었으면 문군은 난처함에 카미노 한복판에서 표류했을지 모른다.

"더 안 도와줘도 되겠어요?"
"그럼요. 여기서부턴 혼자 갈 수 있거든요. 이 정도 쯤이야. 고마웠어요,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부담스러워 먼저 나선 길. 그러나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뜻하지 않는 도움이 있다는 것 또한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수혜자나 기부자 위치에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 내 삶을 밀어주는 누군가가 있고, 또 내가 끌어주는 누군가의 삶이 있음을 이 카미노가 상기시켜 준다. 그렇게 세상은 관계를 통해 일을 하고 있고, 일을 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위기를 벗어난 문군은 싱글벙글. 잠시 후, 긴장이 풀어지고 여유롭게 주위 경관을 만끽하던 그의 동공이 확대되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하아, 이게 아닌데. 저, 재… 재희씨! 재희씨? 저기요! 잠깐만요! 나 좀 도와줘요!"

또다시 가파른 진흙길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멀찌감치 앞서가던 재희가 피식한다.

 내 죄가 그리 컸나? 돌 옮기는 게 이리 힘들다니...

철의 십자가 옆에 세워진 에르미타(Ermita) 교회. 가톨릭 성년을 기념해 지어진 현대식 석조 예배당으로 문은 잠겨있다.
 철의 십자가 옆에 세워진 에르미타(Ermita) 교회. 가톨릭 성년을 기념해 지어진 현대식 석조 예배당으로 문은 잠겨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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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바람을 뚫고 걸은 지 두 시간 반 정도. 8km 정도 걷자 1505m 정상에 우뚝 선 철의 십자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의 은총을 빌던 이들이 십자가 주위로 돌무더기를 만든 흔적이 보인다.

"자신의 죄만큼 무거운 돌을 들어 저 더미위에 옮겨 놓고 기도해야 해요."

이미 문군을 앞질러간 순례자들이 각자 자신의 죄만큼 크고 무거운 돌들을 품에 안고 돌무더기로 올라가 얹혀 놓고 온다. 이 순간만큼은 종교를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숙연한 시간이 된다. 누구나 죄는 짓고 살아가지만 누가 그 죄의 경중과 크고 작음을 판단할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그런 신념으로 주먹만한 돌을 가지고 올라간다. 다른 순례자가 의문을 제기하자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신이 모든 걸 용서하시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신 진 거 아닌가요? 그러니 나는 이만한 돌로도 충분한 겁니다."

무신론자인 그의 대답이 오히려 다른 그리스도인의 고백보다 훨씬 경건해진다. 문군 역시 체면치레하기 적당히 보기 좋은 녀석으로 하나 골라 올라가려는 속셈. 그런데 난감한 일이 생긴다. 양 손으로 들어 올릴 만한 돌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꽤 무겁다. 엉거주춤하다 그대로 돌을 놓쳐버리는 문군. 옆을 보니 더 재밌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다닌다는 건장한 청년조차도 쉬이 돌을 옮기지 못해 당황한 기색이다. 그저 심리적인 탓일까?

"아무래도 말이죠, 난 포클레인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럼 난 기중기가 필요하겠군요."

실없는 농담으로 쉬고 있던 순례자들이 깔깔거릴 때 문군은 괜히 찔린 기분으로 십자가를 바라본다.

'돌 하나 옮기는 게 이토록 힘들다니. 내 죄가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구나.'

함께 길을 걷는 헬리오스(왼쪽)과 그의 처남 하비. 자전거로 걷는 길은 오르막도 힘들지만 팔과 어깨에 무리가 갈만큼 브레이크만 잡고 내려와야 하는 내리막도 만만찮게 힘들다. 둘의 격려와 도움이 아니면 중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함께 길을 걷는 헬리오스(왼쪽)과 그의 처남 하비. 자전거로 걷는 길은 오르막도 힘들지만 팔과 어깨에 무리가 갈만큼 브레이크만 잡고 내려와야 하는 내리막도 만만찮게 힘들다. 둘의 격려와 도움이 아니면 중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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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나세카 입구의 교회와 가옥들의 모습. 작고 앙증맞은 마을로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다.
 몰리나세카 입구의 교회와 가옥들의 모습. 작고 앙증맞은 마을로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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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십자가에서 봉우리 하나를 더 넘은 후로는 계속 내리막이다. 숲속으로 난 꼬부랑 오솔길들을 급한 걸음으로 내려오니 깎아지른 절벽의 풍경과 군데군데 솟아있는 오래된 교회의 예배당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게 한다. 그렇게 산촌 시정이 사라지고 번듯한 마을이 나올 때 비로소 물줄기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메루엘로 강(Rio Meruelo)을 건너 만난 몰리나세카(Molinaseca)의 전경이 아기자기하고 앙증맞다.

문군은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 건 어떨까 생각하다 도리질을 하곤 폰페라다(Ponferrada)까지 가기로 한다. 폰페라다에 사는 유일한 교민 가정이 라면과 김치를 판매한다는 최신 속보가 떴기 때문이다. 자녀 건강 생각하는 한국의 어머니들로부터는 천덕꾸러기 취급받기 일쑤지만 한국만 떠나면 자양강장제와 만능특효약의 콜라보레이션을 이루는 '라면 소식'에 문군 발걸음은 힘이 난다.

라면에 김치... 최고의 희락

폰페라다 중앙광장의 시계탑. 순례자들을 위한 라면을 사기 위해 겨울바람을 갈랐다.
 폰페라다 중앙광장의 시계탑. 순례자들을 위한 라면을 사기 위해 겨울바람을 갈랐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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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구입을 위해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30여 분 밤거리를 걸어간 집념은 저녁 식탁에 기어코 뜨끈한 라면 국물에 김치를 올려놓게 만든다. 양념 돼지고기 구이가 더해진 만찬은 오전의 고생도 오후의 회개도 모두 감사로 아우르는 오늘 하루 최고의 희락이 된다.

힘겨워하던 자신의 뒤를 밀어주던 이와 고통스러워하던 자신의 짐을 대신 떠안아주던 이를 만날 수 있었던 카미노에서의 하루는 누구에게나 신나는 화제가 된다.

시끌벅적하던 알베르게의 웃음이 잦아들고, 라면의 황홀한 여운이 사라질 때쯤 문군은 침대 속을 파고 들어간다. 그는 감기는 눈꺼풀에도 진흙길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겨울밤의 추위를 잊어간다.

누구나 인생의 긴 여정을 밟는 순례자이며, 모든 이는 날마다 자신만의 카미노를 걷고 있다는 것, 그 길에서의 만남 하나하나는 또 얼마나 애틋한지.

"문군, 내일 아침엔 내가 맛있는 식사 차려줄게. 기대해."

헬리오스가 속삭이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아마도 그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2월 1일의 여행기가 담겨 있습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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