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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2004년 12월에 입사를 했는데 2005년 1월 회사 신년회 자리에서 부장님이 그랬다.

"조남희씨도 이제 2년차네".

속으로 '응?' 하며 무지 황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해가 바뀌면 나는 제주도 생활 '2년차'에 접어든다. 실은 정확히 제주도에 반년을 살았는데 말이다. 입도 초기에 했던 걱정들이 새삼 떠오른다. 서울버리고 제주 살러 간다는 내용의 첫 기사 때 어떤 독자분이 댓글을 이렇게 남기셨더랬다.

"6개월만 돌아다니면 갈 데 없는 곳…." 

이 분은 6개월 이상 제주도에 살아보신 분이 분명해보였다.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팔랑귀인 나는 내심 불안했다.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6개월을 살아 본 지금, 나는 웃고 있다. 나의 게으르고 무거운 엉덩이와 방향치 유전자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어딜 갈라치면 한번 가본 곳도 매번 새롭다고나 할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제주도는 생각보다 크고 내게 갈 곳은 아직 많다.

동부지역의 오름들이 보인다.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인근의 밭담 동부지역의 오름들이 보인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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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걱정 또 한가지.

'너무 외로우면 어떡하지?'

연고도 없이 살러 온 곳이지만, 지내다보면 아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막걸리 한 잔 고플때 연락할 곳 있으면 된 거다. 적어도 서울에 있을 때 느꼈던 군중 속의 고독은 아니니 좋다. 더이상 '언제 한번 보자'는 공허한 약속을 남발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도민들로부터 듣게 될 제주도의 속살 이야기에 나는 기대에 차 있다.

제주 토박이들이 외지인에게 불친절하다는 얘기 역시 기우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기억에 남을 만큼 불쾌한 경우를 제주도에서 당한 적이 없다. 제주 사람들은 나에게 과다하게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나를 대놓고 불쾌하게 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건 오히려 다른 데서 왔다. 얼토당토 않은 곳에서 갑작스레 차를 멈추고 유턴을 해 뒷 차들을 모두 열받게 만들거나, 레이싱을 하러 왔는지 깜박이도 켜지 않고 차선을 바꾸며 질주하는 차들은 '허'자 간판을 단 것들이 더 많다.

물론 도민들도 나를 황당하게 할 때가 있다. 서귀포와 제주시를 잇는 평화로를 타고 달릴 때, 이차선 도로의 차선 정확히 가운데를 느긋하게 달리는 티코나 구형 프라이드를 종종 만난다. 얼굴을 보면 대부분 도민 아줌마나 할머니가 운전하는 차들이다. 이 정도는 귀엽게 봐주게 된다면, 내가 너무 편파적인가?  

초기의 이런저런 걱정들은 이렇게 불식되어가는데, 나의 상식을 뒤엎고 나의 무식에 침을 뱉고 싶게 만든 제주도의 면면들이 있다.

여름이면 관광객으로 가득차는 함덕해수욕장에서는 4.3사건 당시 함덕에 주둔하던 군경토벌대에 의해 조천면 사람들이 다수 희생됐다.
▲ 함덕해수욕장 여름이면 관광객으로 가득차는 함덕해수욕장에서는 4.3사건 당시 함덕에 주둔하던 군경토벌대에 의해 조천면 사람들이 다수 희생됐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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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함덕해수욕장, 다랑쉬오름, 표선해수욕장.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제주도의 절경지는 곧 도민들의 피와 눈물의 역사 현장과 동의어다. 4·3사건 때 이들 절경지, 아니 제주도 전역에서 양민들이 집단학살 되었다. 그 숫자가 3만명에 달한다.

나는 제주도에 오기 전 4·3사건에 대해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부하면 할 수록 기가 막힐 노릇이다. 생각할 수 있는 제주도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군경의 총과 대창에 죽어나갔다니, 이젠 어딜 가도 아름다운 바닷가나 폭포, 오름, 마을길 마저도 예사로 보이지가 않았다. 지나가다 보이는 길가 마늘밭, 무밭에 시체가 넘쳐났을 걸 생각하면, 우리 눈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 제주도가 너무 슬프다.

그리고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거꾸로 뒤집으면 땅을 일구고 살아가야 할 도민들에겐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었다. 태풍의 직격타를 해마다 몇 개씩 맞아야 하고, 태풍이 오는 시기를 제외한 계절에도 제주의 바람이 어떤지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또한 곱디 고운 하얀 백사장에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

해안가 마을은 반농반어라 해서 한 달의 반은 물질을 해야했고 나머지 반은 농사를 지어야 했다. 해안가가 아닌 마을은 물질을 못하니 수입의 원천이 더 적어 먹고 살기가 더 힘들었다. 지금 우리가 놀러가는 제주도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감귤 산업이 발달한 섬이지만, 그 이전 도민들에게 섬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쉽게 나갈 수 없는 곳이었고, 고려 전기 독립국 탐라에서 하나의 지방으로 편입된 때부터 한국전쟁 이후 상당기간까지 육지의 수탈 속에 살아나가야 하는 섬이었다.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하는 제주도, 요즘은 게스트하우스, 펜션, 렌트카가 삼다가 아닌가 할 정도로 외지인들이 몰려오는 섬이 되었다.  제주도는 내년 관광객을 1050만명 유치하겠다고 한다.

내가 사는 대평리 마을도 게스트하우스와 펜션이 넘쳐나고 땅값도 많이 올랐다는 소식이다. 그 와중에 나도 굴러들어와 산다. 살다보니 처음 제주도에 왔던 때의 고민들은 차츰 물러가고, 이제는 제주도의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새해를 맞아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제주도를 더 깊이 보고 알아가려고 노력해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육지에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내가 아는 만큼만이라도 제주도 이야기를 해주련다. 

바닷가 두 번 갈 거 한 번 줄여 4·3평화기념관에도 데려가고, 올레길 걷다 지나치는 이 곳 저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섬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설명해주련다.


태그:#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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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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