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옛 모정의 역할을 하는 진안 하초마을의 쉼터.
 옛 모정의 역할을 하는 진안 하초마을의 쉼터.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진안 하초 마을의 쉼터 풍경이다. 이 느티나무는 300년쯤 된 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된 것이다. 나무의 넓은 그늘을 지붕 삼아 나무 둘레를 빙 둘러 마루를 짜 넣어 쉴 수 있도록 한 것이 옛 동네마다 있던 모정(茅亭)의 용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모정은 대개 가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공간을 막 벗어난 마을 입구에 지어지곤 했다. 때문에 이 모정에 앉아 있다 보면 한동네에 사는 누가 외출을 하고 누가 무얼 사가지고 오는지, 누구네 집에 누가 찾아오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이 모정에서 동네 사람들이나 길손은 땀을 식히며 쉬기도 하고,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했다. 그리고 동네의 크고 작은 일들을 의논하거나 살아가는 이야길 나누기도 했다. 더러는 막걸리를 나눠 마시거나 찐옥수수나 찐감자 등을 나눠 먹기도 했다.

모정 옆에는 대개 하초마을의 느티나무처럼 큰 나무가 있어서 넓게 그늘을 드리우곤 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모정에 모두 앉지 못할 때는 돗자리를 깔아놓고 놀기도 하고 아이들은 땅을 놀이도구 삼아 놀곤 했다.

예전에 시골 마을의 모정도 사람으로 붐볐던 적이 있었다. 산업시대에 접어들어 마을 사람들이 도회지로 떠나기 전만 해도 모정은 다양한 세대들이 모여 놀던 곳이었다. 다양한 세대들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는 법인데, 이곳애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정의 마루판은 노인, 중년과 어린이의 영역으로 자연스레 구획이 나누어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모정은 그럴 일이 없다. 왕년의 젊은이였던 이들이 노인이 되어 그들만이 덩그렇게 남아 모정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에서

내가 자란 고향에도 이런 모정이 있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집이라 마당에 서서 보면 동네로 들어오는 신작로에 누가 오고가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동구 밖에 지어지곤 했던 대부분의 모정들과 달리 우리 동네의 모정은 우리 집 뒤의 언덕에 지어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모정들보다 두세 배는 넘을 정도로 무척 컸다. 어떤 동갑내기는 열다섯 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던 제법 큰 마을 축에 속했는데, 여름에 잠깐 모여들어 낮잠을 자거나 장기나 바둑을 두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일 년 내내 모여 놀곤 했다. 사계절 내내 놀 거리가 있는 그런 장소였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
ⓒ 푸른길

관련사진보기

눈 내린 겨울아침이면 동네의 거의 모든 아이들은 모정으로 모여들곤 했다. 저마다 비료 포대 하나씩을 들고서.

그런 날이면 모정으로 올라가는 제법 긴 계단은 미끄럼틀로 변하곤 했다. 우린 엉덩이에 깐 비료포대의 앞 귀퉁이를 잡고 오전 내내 놀곤 했다.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계단 끝 아래에 있는 밭에 내동댕이쳐지는 스릴을 즐기기도 하면서, 끼니도 잊은 채 말이다.

내 고향 김제에는 엊그제 내린 눈이 녹을만 하면 다시 내려 쌓일 정도로 자주, 그리고 많이 내렸다. 그런 만큼 모정과 얽힌 겨울날의 추억도 많다. 그러나 이 모정은 90년대 초 어느 해 여름, 폭우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떤 곡절로 밭이 되어 흔적조차 사라진 지 오래라 그와 관련된 추억은 기억 속에서만 가물거릴 뿐이다. 

그 마을에 살아 모정에 얽힌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우연히 모정을 만나면 동네 사람들과 오랜 세월 함께했던 그 모정을 떠올리리라. 그와 함께 이제는 소식조차 알길 없는 고향 친구들과 작은 서리쯤은 눈감아 주곤 하던 마음 푸근했던 어른들의 안부를 궁금해 하리라. 이런 생각들과 이제는 전혀 볼 수 없는 아쉬움 때문에 어떤 곳을 스치다 정자가 보이면 한 번 더 눈이 가곤 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정의 모양도 변하고 있다. (…) 시설 변화 못지않게, 모정 안의 모습도 과거와 사뭇 다르다. 최근에 만들어진 모정에는 마을의 이름을 본떠서 관음정, 마산정 등과 같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모정에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다. 좀도둑이 이것을 훔쳐가지 못하게 철제빔으로 꼭꼭 묶어 두가도 하고, 붙박이 나무 상자 안에 넣어두기도 한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주민들은 모정에 셔터를 달아 두기도 한다. 모정 안에는 장기판도 있으며, 고스톱을 칠 수 있는 담요는 필수품이다. 어느 모정 아래에는 마을 사람들의 윷놀이용 멍석이 둘둘 말려있다. 중국집 전화번호도 걸려 있다. -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에서

기와지붕이라 고풍스럽고 참새가 깃들여 자던 내 유년기의 모정과 비슷한 모정은 이제 거의 찾기 힘들다. 아마도 동네 주민들이 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대로 관리를 했더라면 민중들의 삶이 녹아있는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았으리라. 이런 아쉬움과 함께 바라보는 오늘날 어디서건 쉽게 볼 수 있는 모정에선 옛 모정의 정취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모정들은 모양새부터 옛날의 것들과 많이 다르다. 더러는 풀포기도 자라 여름이면 꽃을 피우던 고풍스런 기와 대신 매끈한 플라스틱지붕과 나무의 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매끈한 기둥으로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에 여름 한낮의 열기나 비바람을 피하고자 가림막을 한 모정들도 많다. 게다가 여름의 불청객인 모기를 막고자 방충망을 하기도 한다. 사람의 생활 습관이나 용도에 따라 바뀐 것이다.

우리 주변의 어떤 장소들은 이처럼 그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용도에 맞게 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가에 따라 애초 다르게 생겨나기도 한다. 때문에 모정처럼 한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장소에는 그 장소를 이용했거나 자주 오갔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추억은 물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 추억이나 삶 등이 스며있다. 이렇고 보니 그런 장소들은 우리의 지난 삶과 생활 변화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임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런 장소들을 이야기하는 데는 다소 인색한 것 같다. 이렇고 보니 유명한 유적지나 경치 좋은 관광지 혹은 맛 집 등을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만, 그에 비해 이런 장소에 대해 말하는 책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이들 유명한 장소들보다 우리와 훨씬 많은 것들을 주고받는 우리의 생활이 밀착된 중요한 장소들인데도 말이다.

우리의 오일장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중국 윈난성 샤핑마을의 노천장터 앞에 백족(중국 소수민족)의 여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기다리고 있다.(2011.7.18) 그 앞에 있는 마차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저마다 우산을 쓰고 마주앉아 마차가 어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버스정류장처럼 기둥을 세워 마차를 탈 수 있는 표시를 해놓진 않았지만,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마차를 탈 수 있는 장소로 통하리라.
 우리의 오일장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중국 윈난성 샤핑마을의 노천장터 앞에 백족(중국 소수민족)의 여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기다리고 있다.(2011.7.18) 그 앞에 있는 마차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저마다 우산을 쓰고 마주앉아 마차가 어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버스정류장처럼 기둥을 세워 마차를 탈 수 있는 표시를 해놓진 않았지만,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마차를 탈 수 있는 장소로 통하리라.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저자 '이경한'은
일반인들에게 지리학은 지루하고 어려운 것 중 하나로 인식되기 일쑤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지형이나 지역의 특징이나 형편, 기후 등을 알려주는지라 우리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생활 장소임에도 점수를 위해 무조건 외워야 하는 교과과목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일반인들을 주요 독자로 쉬운 지리학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써오고 있는 지리학자다. 저자의 지리학 관련 다른 책으로는 <일상에서 지리를 만나다>와 <골목길에서 마주치다>가 있다. 외에 교육학 관련 몇권의 책도 썼고, 여러 권의 교육 관련 책에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다.(김현자)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푸른길 펴냄)는 한 지리학자가 이처럼 여러 사람들의 공통적인 삶과 생활이 스며있는 장소인 길, 버스 정류장, 다리 밑, 고향, 다리, 학교, 벤치, 광고게시판, 공원 등의 과거와 현재와 그에 스며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에 따른 가치들을 수필 형식으로 들려주는 책이다.

이런지라 그간 무심코 스쳤던 내 삶의 장소들을 다시 보게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그간 나의 많은 것들이 스며있어 그 장소를 더듬는 것만으로도 내 삶을 어느 정도나마 돌아볼 수 있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는 그런 장소들의 많은 것들을 말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수자, 즉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정직한 목격자가 되고 싶다. 우리 사회를 권력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권력을 적게 가진 사람들인 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경험하는 장소들을 보고 싶다. 인구 연령 면에서는 청장년보다는 어린이와 노인을, 학교생활면에서는 모범 학생 보다는 일탈 학생을,  주택 면에서는 고급주택 지구나 아파트단지 보다는 서민들이 사는 셋방이나 골목길을, 인종 면에서는 우리 속의 디아스포라인 국제결혼 이주자들을, 성별 면에서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장소에 대한 충실한 목격자가 되고 싶다. 장소 안의 사람들의 삶을 목격하여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전하고 싶다" - '저자의 말' 중에서

게다가 이런 시각으로 시작된 글들이어서 이 책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의 가치는 훨씬 남달라진다. 책을 통해 나의 이웃이기도 한 '우리 사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수자, 즉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ㅣ이경한 씀 | 푸른길 | 2012-11-09 ㅣ정가 13,000원



일상에서 장소를 만나다

이경한 지음, 푸른길(2012)


태그:#지리, #장소, #모정, #샤핑마을, #정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