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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애먼 곳에 도착한 일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인생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애먼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말>

소설가 공지영씨가 2010년 1월 21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글쓰기의 힘, 공지영과의 문학 데이트'를 주제로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특강'을 하고 있다.
 소설가 공지영씨가 2010년 1월 21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글쓰기의 힘, 공지영과의 문학 데이트'를 주제로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특강'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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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막상 글을 쓰려면 안 나와요.'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자판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쉽니다. 한숨을 내쉴 때마다 한 문장이 나온다면야 아마 벌써 단편 소설 한 편은 완성했겠지요. 어느덧 해도 지고 어두운 밤이 됐습니다. 결국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발견한 이런저런 글들을 좋은 말로 짜깁기, 나쁜 말로 베껴서 글을 완성합니다.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지?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제 글쓰기 강의의 일부를 글로 옮겨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글이 안 써지는 경우가 있죠?"
"네에. 진짜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요."
"저도 강의하면서 그런 고민을 얘기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게다가 사실 저도 똑같은 고민이 있었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이공계 출신입니다. 제가 93학번인데 저희 때가 대입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였어요. 저는 학력고사에서 수학을 만점 받았어요."
"우와!"
"국어 영어 수학 다 합쳐서 2점밖에 안 틀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헤헷."
"우와!"
"에구, 괜히 점수 얘기한 것 같네요. 사실 저희 때 학력고사가 역대 가장 쉬운 시험이었거든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점수가 높게 나왔습니다. 국어도 점수를 잘 받기는 했지만, 사실 저는 글쓰기에 너무 취약했어요. 만약 국어 시험에 글쓰기 문제가 있었다면 제 점수는 크게 떨어졌을 겁니다. 아무튼 대학 다닐 때 학비와 용돈에 보태려고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치던 그 학원에 국어를 가르치는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이 분이 국어을 잘 가르치신다는 소문이 있어서 제가 시간이 날 때 상담을 좀 했지요."
"무슨 상담이요?"
"이런 질문을 한 거죠. 제가 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막상 글을 쓰면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 솔직히 머릿속에 이런저런 멋진 아이디어가 넘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데 왜 글은 5줄을 못 넘을까요?"
"그래서 뭐라고 답을 주시던가요?"
"솔직히 그분이 했던 대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요. 너무 충격적인 대답이었거든요."
"궁금하네요. 빨리 얘기해주세요."
"'승수씨, 머릿속에 쓸거리가 많은데 글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승수씨가 글로 쓸 수 있는 딱 그만큼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

"글로 쓸 수 있는 게 딱 그만큼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베네수엘라 무상교육 프로그램인 미션 로빈슨의 여성 활동가들
 베네수엘라 무상교육 프로그램인 미션 로빈슨의 여성 활동가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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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얼굴을 직접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답을 들으니 좀 민망하기도 하고 너무 심한 얘기 아닌가 싶어 좀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야말로 정답이었습니다.

"여러분! 글의 재료는 '경험'입니다."
"경험이요?"
"네에. 가령 전기밥솥을 소재로 글을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 열세 살짜리 아이가 밥솥에 관해 글을 쓴다면, '엄마가 쌀을 씻어서 넣으면 맛있는 밥이 되는 기계'라는 정도의 글을 쓰겠지요. 하지만 오십 살이 넘은 여성이라면 어떨까요? 갑자기 어떤 여성은 글을 쓰다 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합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이 분이 남편이 밥통 던진 사건을 글로 풀어내다가 감정이 북받친 것이죠."
"하하하하!"
"어떤 분은 물과 쌀의 비율이 변함에 따라 밥맛이 달라지는 상관관계를 논할 수도 있고, 다른 분은 사용해온 밥솥의 변천사를 통해 가정의 경제사를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입맛 까다로운 가족과 밥솥에 얽힌 에피소드를 쓸 수도 있겠지요."
"정말 그렇겠군요."
"왜 나이 오십이 넘은 여성들은 열세 살짜리는 절대로 쓸 수 없는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을까요?"
"그렇군요. '경험'이 있기 때문이군요."
"네에. 맞습니다. 저는 2006년에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을 써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끄는 21세기 사회주의의 모습을 국내에 알렸습니다. 베네수엘라를 방문해서 이런 저런 곳을 들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지금부터 저와 여러분이 함께 비행기를 타고 베네수엘라를 방문했다고 칩시다. 베네수엘라는 GDP가 1만 달러 정도로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지만 차베스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전 국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베네수엘라의 한 종합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세상에! MRI를 무료로 찍어주는군요."
"진짜인가요?"
"네에. 제가 직접 베네수엘라에서 봤지요. 게다가 암 치료가 공짜입니다."
"헉!"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외국인도 공짜로 치료해줘요. 제가 베네수엘라의 소아암센터를 방문했을 때 소아암에 걸린 볼리비아 아이를 치료해주는 장면을 봤거든요."
"헐. 대박이네요."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런 장면들을 직접 목격했다면 아마 글을 쓰기 싫어도 다음과 같이 바로 글이 나올 겁니다. 친구한테 안부 메일을 쓰면서 '아무개야, 베네수엘라 완전 대박이야. MRI를 공짜로 찍어줘. 암 치료가 공짜야'라고 말이죠. 자! 왜 이렇게 글이 술술 나올까요?"
"알겠어요. 직접 '경험'을 했기 때문이군요."
"바로 그렇지요. 맞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글이 나올 만한 삶을 살고 계시나요?

MBC 다큐멘터리 시리즈 '지구의 눈물'의 마지막 편인 <남극의 눈물>의 한 장면
 MBC 다큐멘터리 시리즈 '지구의 눈물'의 마지막 편인 <남극의 눈물>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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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의 어느 날,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소름이 끼치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남극을 묘사한 내용인데 이 소름 끼치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은 베스트셀러를 쓴 소설가도, 국문학 교수도, 글쓰기에 단련된 기자도 아니었습니다. 김예동 극지연구소 남극대륙기지건설단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남극 제2기지 건설 사령관 격인 김 단장은 1983년 한국인 최초로 남극을 탐험한 뒤 30여 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한국 남극 연구사의 산증인입니다. 이 분이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처음 남극에 도착했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흰색과 파란색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창문도 없는 C-130 미군 수송기를 타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해 7시간 반을 날아서 내리니까 눈부신 세계가 펼쳐졌는데 하늘만 파란색이고 그 아래는 전부 흰색이었어요. 다른 색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만약 제가 여러분께 큰 스크린에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남극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세 줄 정도로 표현하려면 어떤 글이 나올까요? '저기 빙하가 보입니다. 앗! 펭귄도 있네요. 밤에는 오로라가 장관이네요' 정도의 글이 나오겠지요. 절대로 '두 가지 색밖에 없는 곳'이라는 표현은 쓸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스크린의 범위를 넘어서는 곳은 남극이 아니라 대한민국이기 때문이지요. 김예동 단장이 문학가도 아닌데 이런 엄청난 표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단 하나입니다. 그가 남극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직접 남극에 가니 어디로 눈을 돌려도 색깔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이죠. 직접 본 것을 그대로 얘기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네에."
"여러분은 지금 글이 나올 만한 삶을 살고 계시나요?"
"음… 아니요…."
"네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한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 무슨 좋은 글이 나올까요? 제가 젊은 나이에 여러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막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하하하!"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글이 나올 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고, 카드 할부를 돌려서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남들이 안 하는 짓을 하고 살아야 남들이 쓸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노파심에 얘기하지만 카드 할부로 여행을 다녀올 때는 충분히 갚을 수 있도록 과학적인 분석과 계산이 필요합니다."
"크크크크. 네에."

흔히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고 합니다. 글쓰기에서는 이 말이 정답입니다.


태그:#글쓰기,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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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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