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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애먼 곳에 도착한 일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인생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애먼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기자 말>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관계에서 이 문구보다 더 강력한 '면죄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믿었던 형제나 친구, 애인에게 배신을 당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반대로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피해를 주고 부채감에 괴로워할 때면 어김없이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니까……'라는 문구로 자신을 달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 면죄부의 위력은 무척 강력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과 '현실'에 대해 체념하듯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인간 자체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런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임인 '사회'도 당연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러한 생각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들에 대해서 체념하고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면? 이제까지 '이기심'이라는 면죄부로 정당화되었던 모든 행위들을 원점에서 재검토해봐야 하겠지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 그것이 실제로는 거짓된 신화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인류는 항상 이전보다 한걸음 더 진보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기심'의 본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히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중요한 성찰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인간관계를 고찰할 때 사람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전제 대신에 다른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죠.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악하다는 논쟁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분명 사람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인지 아닌지는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동물은 '생존'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 전개의 출발점을 삼기에 매우 적합한 명제지요.

물론 어떤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생존'하려는 본능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요즘같이 삭막한 세상에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요. 하지만 제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생존의 욕구가 있다'라고 할 때의 '인간'은 무리, 즉 류(類)로서의 인간을 얘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죽고 싶어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니까 유전자가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있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그냥 죽고 싶은 거죠. 여기에 아담과 하와가 있다고 합시다. 특정 종교에서 인류의 조상들이라고 얘기되는 사람들이지요. 아무튼 앞서의 가정대로라면 아담과 하와는 본성적으로 죽고 싶어 합니다. 유전자가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장 자살을 하겠지요. 만약 이들이 자살하기 전에 자식들을 많이 낳았다고 합시다.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도 인간이죠? 그러니까 본성적으로 죽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젖을 빨거나 음식을 먹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요? 결국 인류는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멸망하는 거죠. 전혀 대를 이을 수가 없으니까요. 인간이 유전자적으로 죽고 싶어 한다면 지금까지 인류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대를 이어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류(類)의 차원에서 생존의 욕구가 있는 것이지요.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냐는 문제는 논란이 많을 수 있지만, 적어도 인간이 본성적으로 생존의 욕구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인간이 그 안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도록 하는 게임의 법칙이 짜여 있습니다. 자본주의 게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어떤 분은 당연히 사람이 생존하려면 이기적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형태의 사회에서도 '생존'하려면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한 번 반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재미있는 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던 어떤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을 찾아가서 지능 테스트를 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부족 사람들 각각에게 테스트 용지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각자가 개별적으로 문제의 해답을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서양 사람의 요청과는 다르게 인디언 부족 사람들은 문제들을 풀기 위해 모여서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은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문제들은 각자가 따로 풀어야 하는 거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함께 의논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자꾸 각자가 따로 해결하라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 인디언들에게는 문제를 각자가 따로 해결한다는 상황 자체가 전혀 생소할 뿐더러 이해도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디언 부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함께 도와가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위기에 닥치는 사회였습니다. 수렵이나 채집활동을 통해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맹수나 다른 부족과 싸워나가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함께 똘똘 뭉쳐 공동체를 이루고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실험을 해 보도록 하죠. 만약에 '이기적인' 인디언 부족이 있다고 칩시다. 이 부족의 구성원 100명은 너무 이기적인 나머지 자신들이 사냥을 할 때 쓰는 창에도 각자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왜냐고요? 누가 창으로 잡았는지 알아야 가져가서 '이기적으로' 혼자만 먹을 테니까요. 100명의 부족 사람들이 창 하나에 버펄로 한 마리씩 잡을 것도 아니고, 100개의 창 중에서 기껏해야 한두 마리 잡는 상황에서 이렇게 잡은 사람만 버펄로를 식량으로 사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머지 사람들은 식량부족으로 영양실조에 걸려서 결국 굶어죽게 되겠죠. 그렇게 절반 정도가 죽었다고 하면, 부족원은 50명이 남겠네요. 창 100개를 던져서 한두 마리 잡히던 버펄로인데, 창 50개를 던지면 그만큼 잡기가 더 어려워지겠죠? 결국 버펄로도 잡기 힘들어지고 사람들은 계속 굶어 죽습니다. 이 부족이 이런 '이기적인' 생활을 지속한다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망하는 것입니다. 이 부족은 왜 망했을까요? '이기적'이어서 망했습니다.

그렇게 공동체 생활을 잘 해야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게임의 법칙을 가진 것이 원시공동체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함께 도와가면서 사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이기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취득한 지식과 정보를 빨리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수렵과 채집을 통해 얻은 먹을거리도 함께 나눠먹는 것이 상식인 사회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되면 공동체 정신과 협동심이 마치 자신들의 본성인 것처럼 느껴지게 되지요. 반면에 '이기심'은 그 사회에서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돌아봅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자본가 개인의 이윤추구, 즉 돈벌이입니다. 자본가의 화폐에 대한 무한한 욕망은 노동자에게 적은 임금을 주고 더 많은 일을 시키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야근에 철야에 비정규직에 임금체불 등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자본가들이 이렇게 '이윤'에 대한 욕망으로 발버둥치는 것은 시장에서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다른 회사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내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 경쟁에서 낙오하고 회사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본가들은 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게임의 법칙'인 거죠.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기심'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쭙지않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살벌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뒤처지기 십상입니다. 남보다는 자기 것을 잘 챙기는 약삭빠른 사람이 승진도 잘 되고 돈도 잘 법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윗사람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모욕을 받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존'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게임의 법칙에 익숙해지면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돈 잘 버는 자본가가 되든지 의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권유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라고 강요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전문직 종사자 혹은 자본가가 되기 쉽기 때문이죠. 이렇게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은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스며들게 됩니다. 좋은 성적을 얻어 더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돼버린 거죠. 아침 0교시부터 밤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 그 자체입니다. 이기심으로 무장해서 친구를 누르고 자신이 더 좋은 점수를 얻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학생들은 점수를 쫓는 하이에나가 되어서 인간성을 잃고 병들어갑니다. 최근 부쩍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는 것도 이러한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일탈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성 중 한명으로 꼽히는 카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에 맞춰서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 양식이 우리에게 이기심이라는 '의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구조는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 중에 유독 '이기심'만을 증폭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된 사회구조의 '결과물'인 이기심을 오히려 인간의 본성으로 승격시켜 잘못된 사회구조가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물구나무 서 있는 것이죠. 그리고 잘못된 사회구조를 고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이기적인 사회를 인간의 본성에 의한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삽니다.

이기적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태그:#이기심,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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