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까. 우린 그런 고민에서 여행지를 찾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까. 우린 그런 고민에서 여행지를 찾기 시작했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일본은 가기로 결정했는데, 어딜 갈까, 교토는 어때?"
"거긴 사람이 너무 많고 습도가 너무 높대."
"그럼, 오키나와 쪽은?"
"거기도 너무 덥고,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데."

여자친구와 여름여행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 건 '휠체어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사고로 다리를 다친 여자친구는 집 밖을 나서면 휠체어를 타야 했다. 가까운 거리나 짧은 시간 동안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여자친구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생활이 20여 년이었다. 그런 생활이 익숙했고, 반대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해서는 큰 불안함을 느꼈다. 당연히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않았다.

상황이 바뀐 건 최근 2~3년 새였다. 여름을 맞이해 일주일 동안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무사히 전국여행을 마치자 부쩍 자신감이 붙은 것. "다음엔 해외여행을 갈까"라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이때다' 싶어 해외여행 계획을 짰는데, 여자친구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움츠러들었다. '사람이 많고' '덥고' '어떻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지 모르며' '보도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정글과 같은 상태인 해외여행을 간다는 게 겁이 덜컥 난 것이었다.

일본여행 책을 몇 권 사서 읽고, 일본여행 전문가까지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뾰족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자유 휠체어 여행'에 대한 답을 내놓은 책이나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휠체어 전문여행이 있었으나 단체여행이었고 값이 너무 비쌌다.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었다. 다른 여행자들은 맛집과 숙소, 관광지를 찾느라 바빴겠지만 우리는 휠체어 탈 수 있는 지형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줄어든 여자친구는 급기야 "나는 국내여행도 좋아"라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여기서 '그럴까'라고 할 순 없었다.

"나만 믿어봐"라면서 일본지도를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길 며칠. 마침내 눈이 침침해질 때쯤, 어둠에서도 떡을 썬다는 한석봉 어머니처럼 눈이 번쩍 뜨이며 갑자기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바로 일본 제일 북쪽 훗카이도(북해도)였다.

"훗카이도 어때?"
"거긴 눈구경 하는 데잖아. 겨울여행지. 우리가 가는 때는 8월인데."
"그러니 좋지. 겨울여행지니까 지금 가면 관광객도 없을 테고, 기후도 적당하잖아. 그때 가면 우리나라 가을 날씨라서 선선하데. 게다가 도시 전체가 평지야."
"…."

'역발상 여행'이 이번 여행 콘셉트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우리에게 모험이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공항에서부터 모험은 시작됐다.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크기가 작았다. 휠체어를 타고 기내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응당 화물로 부쳐야 했으나 수속창구에서부터 기내까지 어떻게 갈지가 관건이었다. 항공사 직원들이 이리저리 전화를 걸며 대책마련에 분주하는 모습을 우린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들은 태연한 척했지만 당황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점점 흘렀고, '여기서 여행이 끝나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 무렵, 한 직원이 환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여기 공항 휠체어를 갖고 오겠습니다. 그걸 이용하시고, 그곳에 도착한 뒤엔 그곳 휠체어에 태워 짐을 찾는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실내에서만 다니던 휠체어, 도시를 활보하다

삿포로는 인구 200만명 정도가 사는 대도시다. 우린 이 도시를 휠체어를 타고 종횡무진 누빌 것이다.
 삿포로는 인구 200만명 정도가 사는 대도시다. 우린 이 도시를 휠체어를 타고 종횡무진 누빌 것이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마침내 일본 삿포로공항 도착. 또 다시 몸이 바빠진다. 휠체어를 타고 여행한다는 건 단지 걷느냐 휠체어를 타느냐 차이가 아니다. 매 행동 순간순간마다 절차가 몇 개씩 더 붙는 거다. 공항버스에 탈 때, 내릴 때, 식당에 들어갈 때, 나올 때마다 짐을 무릎 위에 포갰다 내리고, 휠체어를 접었다 폈다. 이런 일이야 워낙 흔해졌으니 이젠 아주 익숙해진 상황. 과연 삿포로 시내가 우릴 어떻게 반길지 상상하면서 차창 밖을 내다봤다.

드디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우린 내렸다. '두둥.' 흡사 달에 내린 닐 암스트롱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움직일 수 있게 상황을 정리한 뒤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보행로가 넓었다. 걷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도 휠체어로 이동할 공간은 충분했다. 차도와 분리된 보도 위를 사람과 자전거가 같이 다니는데도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보도블록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덜컹거리는 느낌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차도는 좁았다. 그래도 자동차는 부드럽게 드나들었다.

여자친구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우리나라에서 갈 곳이 없던 휠체어는 바다를 건너와서 비로소 제대로 달릴 곳을 찾았다. 관광도시로 유명한 삿포로에 와서 첫 감동을 받은 건 특산물인 대게도 아니었고, 명물인 라면도 아니었으며, 삿포로맥주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바로 보행로였다. 우린 잘 닦인 보행로를 달리며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축제가 열린 공원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여자친구는 축제를 보고 싶어했다. 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무대 앞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 앞에 큰 과제가 하나 생겼다.
 축제가 열린 공원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여자친구는 축제를 보고 싶어했다. 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무대 앞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 앞에 큰 과제가 하나 생겼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마침 간 날 시내 공원에선 작은 벼룩시장이 열렸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휠체어를 밀면서 요리조리 구경했다. 이미 시내주행을 하면서 휠체어 운전에는 익숙해진 상태였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 저녁에 다시 시내로 나왔다. 저녁엔 큰 여름축제가 열렸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무대 앞에선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전통춤을 추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서 보통 성인들 배꼽 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여자친구는 무대를 볼 수 없었다. 얼굴을 보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우린 일본말도 할 줄 몰랐고, 이런 상황도 익숙하지 않았다. 축제를 보려면 어쨌든 행사장 바로 앞까지 가야 했다. 과연 저 많은 인파를 뚫고 갈 수 있을까. 숨을 크게 들이셨다. 전투다!

'실례합니다'를 외치며 들이밀 생각이었던 나는 잠시 뒤 허무하면서도 뭉클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관이 길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양 옆으로 갈라섰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배려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제 할 일을 하면서 길을 만들었고, 우린 그 사이를 또 자연스럽게 헤치고 나갔다. 여자친구와 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화였다.

여름에 본 스키점프장, 우리도 덩달아 새가 되다

아침 이른 비행기를 탄 우리는 오전에 도착해 밤 늦은 시각까지 삿포로 시내를 돌아다녔다. 금세 의기소침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빨리 기세등등해지는 여자친구는 "내일은 우리 시내를 벗어나서 더 멀리 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했던 바. "그럴 줄 알고 내일 가이드를 불렀지. 자동차를 갖고 올 거예요"라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정확한 시각에 가이드가 나타났다. 10여 년 동안 가이드를 한 그는 동작이 재빠르면서도 요란스럽지 않았고, 과묵했다. 자기를 '김상'이라 부르라고 말한 가이드는 휠체어를 보고선 바람처럼 나타난 뒤, 접어서 트렁크에 넣었다. "괜찮다"고 말할 틈도 없었다. 가이드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자신감도 있었다.

"제가 훗카이도 한국인 가이드 1호예요.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왔는데, 어쩌다 여기에 눌러앉게 됐네요. 훗카이도에 대해 궁금한 건 다 물어보세요."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홀로 훗카이도에 뿌리를 내린 뒤, 이제 직원 몇 명과 함께 일하는 사장이 됐다. 가이드에겐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곳"을 주문했다. 정작 현지인들은 찾지 않는데 외지 관광객들만 찾는 곳이라면 지역색은 옅고 상술만 가득 찬 곳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가이드는 우리 요구를 정확하고 빨리 알아들었다. 가이드 덕분에 꽤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현지인들이 평상시 즐겨 찾는 곳으로 우릴 데려갔다. 이들 장소의 특징은 물건을 팔고 사려는 이들로 북적이지 않았으면서도 꽤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또한 지역색이 강했고, 무엇보다 입장료가 없었다는 게 매력이었다. 식당들도 하나같이 맛있으면서 가격이 비싸지 않았다.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 사정을 어찌 알았을까.

'김상'은 자동차가 설 때마다 재빠르게 트렁크로 걸어가 휠체어를 내려서 편 뒤, 밀 자세를 취했다. 영업을 한 데다가 일본에 살면서 현지인 특유의 친절자세를 익혀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 우리는 이틀 동안 함께 여행을 하면서 숱하게 내리고 탈 것이고, 초반에 이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하하, 너무 고마운데요. 휠체어 운전은 제가 제일 잘한답니다. 승객도 저를 마음에 들어하구요. 자동차 운전만 해도 번거로운데, 이건 제가 맡을게요."

역시 상황 파악이 빨랐다. 부드럽게 운전에 대한 역할 조정(?)이 끝났다. 휠체어를 태운 자동차는 시내 외곽 지역으로 우릴 안내했다. 그 가운데 삿포로 스키점프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오해였다. 마침 국가대표팀이 연습하기 위해 스키점프장을 찾았고 주민들이 빼곡히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여름에 본 스키점프는 또다른 볼거리였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잔디에서 내려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름에 본 스키점프는 또다른 볼거리였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잔디에서 내려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가이드는 "운이 좋으시네요"라면서 웃었다. 겨울이라면 눈을 타고 내려왔겠지만 한여름이니 점프장엔 잘 깎인 잔디가 깔려 있었다. 산꼭대기 까마득한 곳에서 선수들이 달려 내려와 도약대를 딛고 '텅' 하면서 새처럼 날아올랐다.

우린 침을 '꼴딱' 삼키면서 비행 장면을 지켜봤다. 혹시나 잘못 착지해서 다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잠시. 그들은 모두 거리가 다를 뿐 부드럽게 착지해서 관객들이 있는 곳까지 내려왔다.

눈밭을 헤치고 내려오는 것과 달리 잔디밭을 달려 비상하는 스키점프선수들을 보는 것 또한 볼거리였다. 여름이 아니라면 볼 수 없었던 행운이었다.

삿포로시 외곽에 있던 신사는 시민들의 평상시 주말풍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신사참배는 외교문제로 종종 비화되지만 현지인들에게 신사를 찾는 것은 공원을 찾는 것만큼 자연스러워 보였다.

친절한 가이드 '김상'을 따라, '지역민들이 사랑하는 곳'으로

삿포로시를 벗어난 뒤에도 가이드는 우릴 지역특색이 잔뜩 묻어나는 곳으로 안내했다. 절묘하게도 지역색이 잘 드러날수록 숨은 여행지인 경우가 많았다.

훗카이도 요이치에 있는 니카 위스키(Nikka Whisky)가 그런 곳이었다. 일본 위스키의 양대 산맥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곳인데 전혀 몰랐다니 놀라울 뿐이다. 1918년 홀로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난 타케츠루 마사타카(竹鶴 政孝)가 그곳 위스키 제조법을 들여와 세운 회사가 바로 니카 위스키다. 일본인 최초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제조법을 들여온 타케츠루가 1934년 처음으로 증류소를 세워 양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벌써 80여 년 전 일이다.

훗카이도가 맥주뿐만 아니라 양주 제조에서도 유명하다는 사실은 꽤 재미있는 정보였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니카 위스키 공장 견학은 흥미로웠다. 전시장에선 위스키 시음을 할 수 있었다. '공짜'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세 잔을 연거푸 들이키니 여자친구가 '이제 그만'이라며 주의를 줬다.

일본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처음 만든 곳이 바로 훗카이도 요이치다. 1934년에 처음 증류공장이 만들어져 위스키가 만들어졌다. 공장에 가면 무료로 마셔볼 수 있다.
 일본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처음 만든 곳이 바로 훗카이도 요이치다. 1934년에 처음 증류공장이 만들어져 위스키가 만들어졌다. 공장에 가면 무료로 마셔볼 수 있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휠체어를 타고 공장을 돌았다. 니카 위스키 공장은 여러모로 우릴 놀라게 했다. 우선 너무 넓었다. 게다가 산책로가 너무 깔끔해 다니기 좋았다. 만드는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볼 수 있게 정리가 잘 돼 있을 뿐만 아니라 비디오 자료가 중간 중간 설치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감탄과 함께 아쉬움 섞인 푸념을 내뱉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막걸리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장전시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이드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수시로 "저기 세워주세요"를 외쳤다. 경치 좋은 곳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고, 풀냄새 꽃냄새를 맡았다.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많은 가이드는 그런 뒤엔 속도를 내며 차를 몰았다.

그래도 "지역색이 잘 묻어나는 곳, 지역민들이 사랑하는 곳"이라는 우리 주문을 잊지 않았다.

타쿠신관(拓真館) 또한 그런 주문에 따라 가이드가 우릴 안내한 곳이다. 사진가로선 월드스타로 통하는 일본 풍경 사진작가 마에다 신죠(前田真三)가 1987년에 만든 사진갤러리라 한다.

1~2시간 만에 훗카이도를 보려면 타쿠신관을 보는 게 정답이다. 역시 입장료는 무료. 모두들 맨발로 다니는 전시관에 휠체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갤러리 직원은 밝은 미소로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라는 표시를 했다. 사진관엔 훗카이도의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린 그 작은 공간 속에서 긴 세월 동안 수없이 얼굴을 바꿔온 훗카이도를 만났다.

꽃밭과 풀밭으로 유명한 비에이에서 만난 소떼. 일본에서 쌀, 보리, 양파, 우유, 소고기 생산량 1위가 훗카이도다. 그 넓은 땅에서 일본을 먹여살리는 풍요로움을 봤다.
 꽃밭과 풀밭으로 유명한 비에이에서 만난 소떼. 일본에서 쌀, 보리, 양파, 우유, 소고기 생산량 1위가 훗카이도다. 그 넓은 땅에서 일본을 먹여살리는 풍요로움을 봤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가이드가 끝없이 펼쳐진 꽃밭으로 유명한 비에이(美瑛)로 가는 도중 한 매장에 들른 건 우리들 취향을 고려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는 점심 시간 직전 매장에 들러 "시식을 하고 오라"면서 우리를 떠밀었다.

작은 매장 크기는 홈플러스, 이마트처럼 큰 매장에 익숙한 우리들 눈엔 초라하기만 했다. 지역 특산품을 판다는 매장 크기가 왜 이리 작아, 라는 실망이 바뀐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매장엔 다양한 지역 먹거리가 놓여 있었고, 대부분 시식이 가능했다. 감자와 고구마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치즈 종류도 많았다. 우린 푸짐하게 놓인 시식품들을 맛있게 먹었고, 허기를 적당히 때울 수 있었다. 다양한 농산품들을 보면서 훗카이도가 맥주만 잘 만드는 곳이 아니라 각종 농산물과 유제품을 많이 만드는 낙농과 농산물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20분쯤 그곳을 둘러보고 나온 뒤 우린 가이드에게 만족한다는 웃음을 보냈다.

매장에서 나온 뒤 자동차는 비에이의 꽃밭과 풀밭을 꽤 긴 시간 동안 누볐다. 애초에 우리가 쇼핑에 관심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김상'이었다. 개울물 졸졸 흐르는 곳에 자동차를 대고서 발을 담그며 '시원한 여름'을 느꼈고, 풀밭에 드러누워 '나른한 오후'를 즐기기도 했다. 우리가 여유있게 산책할 수 있도록 '김상'은 "자동차 안에서 한숨 잘 테니 천천히 돌고 오라"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5일 동안 제일 맛있었던 건 숙소 밥... 비결은 '소박함'

훗카이도를 여행하면서 주로 외지인들이 찾는 관광지 식당을 찾지 않았다. 주로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을 방문했다. 결과는 성공. 여자친구는 그 중에서도 숙소에서 아침마다 나온 밥이 특히 좋았다고 평가했다.
 훗카이도를 여행하면서 주로 외지인들이 찾는 관광지 식당을 찾지 않았다. 주로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을 방문했다. 결과는 성공. 여자친구는 그 중에서도 숙소에서 아침마다 나온 밥이 특히 좋았다고 평가했다.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5일이라는 시간은 짧았다. 처음엔 "5일 동안 뭐하지, 좀 일찍 돌아가도 되지"라고 묻던 여자친구는 어느새, "아니 벌써 돌아갈 때가 됐어?"라며 놀라워했다.

항상 모든 것이 갖춰져야 움직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선 힘들어하던 여자친구였지만 여기에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 도움 없이도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보행로와 말없이 배려해주던 현지인들 덕분이라고 본다.

그곳에 도착한 뒤 밥을 먹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관광지 식당은 한 번도 가질 않았다. 아침은 숙소(여관과 호텔 중간쯤 되는 곳)에서 꼬박꼬박 먹었고, 점심은 가다 시간이 맞는 현지식당에서 먹었다. 저녁은 삿포로 골목을 다니다 사람이 좀 있다는 곳에 들어갔다. 관광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식당 내부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인들이었다.

놀랍게도 입맛 까다로운(?) 여자친구는 한 번도 밥투정을 하지 않았다. "맛없는 건 남기면 남겼지 한 숟갈도 뜰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여친'이었다.

여자친구가 감탄한 숙소목욕탕. 있을 것 다 있으면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게 동선을 짰다. 낮은 곳에서 보면 다 보이는 걸까.
 여자친구가 감탄한 숙소목욕탕. 있을 것 다 있으면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게 동선을 짰다. 낮은 곳에서 보면 다 보이는 걸까.
ⓒ 김대홍

관련사진보기


돌아오는 날 5일 동안 먹은 밥 가운데 가장 맛있었던 게 무엇인지 물었다. "다 맛있었다"면서 잠시 머리를 굴리던 친구는 숙소 밥이 제일 맛있었다며 손가락을 세웠다.

숙소 밥은 매우 소박했다. 된장국 하나에 다섯 가지 정도 되는 반찬이 고작이었다. 그들 반찬들도 매우 익숙한 것들이었다. 삶은 감자, 숙주나물, 콩나물, 고등어구이, 삶은 계란 정도였다.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매일 한두 가지씩 바뀔 뿐이었다.

비록 반찬 가지 수가 적고 눈에 띄는 화려한 반찬은 없었지만 기본에 충실한 맛이었다. 여자친구가 원하던 맛이 바로 '기본에 충실한 맛'이었다. 무심코 들어간 뒷골목 식당 또한 모두들 우리 입맛을 만족시켰다.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숙소 목욕탕에도 감탄했다. 우리나라 목욕탕에 비해 형편없이 작았지만 필요한 건 다 있고 매우 편리하게 동선이 짜여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 욕실 안에선 앉아서 움직여야 하는 여자친구 처지에선 더욱 그러했다.

우리가 삿포로를 여행하며 감동받은 건 '기본'이었고, 그 기본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사람 많은 겨울철이었다면 그 기본을 못봤을 가능성이 높고, 훗카이도의 본디 매력을 놓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휠체어는 우릴 훗카이도의 속살 속으로 제대로 안내했다.

돌아오는 날 평소 같으면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을 여자친구는 눈을 생글거리며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살며시 "뭔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니, 여자친구는 "이번 여행이 무척 재밌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다.

"해외여행 별 거 아니네요. 이제 일본은 됐고, 다음엔 저 멀리 다른 대륙으로 가볼까요?"

덧붙이는 글 | * '여행사연 쓰고 공정여행 가자!' 공모 응모 글입니다.
* 2011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다녀온 훗카이도 여행기입니다.



태그:#휠체어, #훗카이도, #삿포로, #일본, #기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