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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르신께서 옆자리에 계시던 할머니를 밀쳐서 엉덩이뼈에 금이 갔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어머니 때문에 넘어지신 할머니의 가족들에게 진심을 다하여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분들도 같은 처지이기에 이해를 해주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피해자 가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과 병원비를 보태드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가 겹쳐 거동도 불편하실 뿐더러 기억력도 점점 흐려져 요즈음에는 금방 일어난 일조차 기억을 못하십니다. 5년 전 병원을 찾았을 때 노인들에게 흔히 발병하는 노인성 치매질환이라고 하더군요. 잠시라도 눈을 떼어선 안 되기에 항상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지요.
 
조용필 뺨치던 마을의 '인기가수',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는 6·25 전쟁이 끝나고 홀로 되신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3대 독자였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고, 가난했지만 살뜰하게 챙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셨습니다. 자식은 낳을 수 있는 한 많이 낳겠다던 아버지의 고집으로 9남매를 낳으셨고, 두 분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하여 전답을 사고 시골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만큼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던 1970년대, 초대 새마을지도자까지 지내시며 마을 일도 게을리하시지 않았지요. 동네 행사가 있을 때면 언제나 노래를 잘하시는 어머니를 대동하시고 나가 꼭 노래를 시키시곤 하셨습니다. 간드러지게 부르는 어머니의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여지없이 시골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렸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을라치면 아버지는 당신이 노래를 부르신 것 마냥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러셨던 아버지께서는 17년 전 68세 되시던 해 5월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연인으로 때로는 평생 말동무로 살아오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멍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시다 홀로 외로이 여러 해를 보내시더니 말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아버지 제사 때가 되면 자식들이 모여 북적거리지만 어머니는 어느 때부턴가 작은방을 찾아 잠이 들곤 하시더군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자식이 여럿이다 보니 늘 노심초사하셨던 내성적인 성격에 항상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시고 가슴앓이를 하셨고,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며 늘 파스를 가슴에 붙이셨지요. 돈 때문에 병원을 자주 가지 못하신 어머니는 파스면 된다며 병원은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르신이 노래 부르시는 할머니 얼굴을 할퀴어 상처가 나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었는데, 환자가 때렸으니 어떻게 할 수도 없다며 상대방 할머니의 가족들이 환자를 모시고 집으로 가셨어요. 요즈음 부쩍 공격적이신 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든다며 힘껏 밀치거나 때려서 잠시도 주위를 떠날 수가 없어요."
 
지난번 병원 방문했을 때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시는 할머니 한 분이 엄마와 같은 병실에 계셨는데 그때도 엄마는 "저 노인네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시야" 하시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또 일을 벌이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3시간 30분을 달려 남편과 함께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간호사에게 요즈음 엄마의 상태를 듣고 나서 엄마에게 온 남편이 일본에 체류하는 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하자 엄마는 바로 "고맙습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다른 간단한 우리말을 바로바로 일본어로 번역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치매가 시작되기 전에 입력된 기억은 꺼내서 보여주실 수는 있어도 그 이후의 일상은 전혀 입력과 저장이 안 되시는 것이죠.
 
어머니는 당신이 시집와 지금까지 사셨던 집근처 노인요양병원에 계십니다. 자식들이 출가하여 거의 모두 서울에 있어 도시로 오셨으면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시고 당신이 일생을 함께했던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시지 않아 고향집 근처 병원에 계시기로 하셨지요. 어머니가 병원 입원하시기 전까지 사셨던 고향집에는 둘째 오빠가 살고 있어 병원을 자주 찾아가 볼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입에 넣어주신 부드러운 딸기... 왜 이리 목이 멜까요
 

며칠 전 다시 찾아간 요양원의 병실에서,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잠들어 계시다가 "엄마" 하고 부르자 벌떡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고, 승훈 에미가 갑자기 어떻게 여길 다왔다냐? 저번 날은 몸이 많이 아파 느그들 못 보고 죽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 많이 했는디."
 
당신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도 까마득하게 잊어 버리고 반갑게 맞이하십니다. 만났을 당시에 엄마께서는 누구인지를 모두 기억하시면서 다녀간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면 모두 잊어 버리십니다. 젊었을 때 많은 고생으로 손가락 마디가 휘어진 엄마의 손을 보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통증이 심해 장기간 약을 복용하시다 보니 약물 부작용으로 성격이 과격해지며 공격적으로 바뀌어 주위에 있는 할머니들을 때려 잦은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약의 양을 반으로 줄여 통증이 심해 걷지도 못하시고 엎드려서 화장실을 갈 정도가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을 보니 기운이 펄펄 나시는지 일어나려고 하시다 그만 넘어지고 마는 모습을 보니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엄마 몰래 고개 돌려 삼킵니다.
 
▲ 어머니의 노래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일편단심 민들레야' 입니다.
ⓒ 조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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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어버이날에도 홀로 쓸쓸히 보내셨을 엄마를 생각하며 남동생과 함께 내려와 하루라도 요양원 밖에서 모시고 자고 싶어 가까운 해안가의 한적한 펜션에 모시고 왔습니다.
 
"엄마, 무릎 많이 아프지?"
"나만 그런디야, 늙으면 다 그런 것이여. 그래도 늬가 서울로 돌아가면 아그들한테 야그혀서 교대로 가끔 시간 내서 오라고 허면 좋제, 시간이 안 되면 할 수 읍지만."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기분이 어때요?"
"바다가 훤히 들여다보이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엄마 옛날 아버지 앞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 한 곡 해보실래요?"
"이제는 노래 부르는 것도 힘들어, 그래도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노래 한번 해보랴?"
 
발음이 예전 같진 않지만 가사 한 줄 틀리지 않고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코끝이 찡해 옵니다.
 
"엄마 요즈음 딸기가 제철이라서 맛있더라고 드셔 보세요."
"맛있게 생겼네. 너도 먹어봐…. 밥은 먹었냐?"
 
잠깐 시간이 지나면 자꾸만 물어보십니다. 파킨슨병의 증세로 사정없이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들고 당신보다 먼저 나의 입에 딸기를 넣어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인데…. 짠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어 목이 메는 딸기를 한 입 깨물어 봅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감옥 아닌 감옥인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지나가던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 잔잔했던 나뭇잎이 요동을 칩니다.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나의 어머니' 


태그:#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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