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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30일 오후 코엑스에서 개막한 '코스닥 상장기업 취업 박람회'를 찾은 취업 준비생들이 각 업체 부스에 상담 및 면접을 보고 있다.
 2011년 11월 30일 오후 코엑스에서 개막한 '코스닥 상장기업 취업 박람회'를 찾은 취업 준비생들이 각 업체 부스에 상담 및 면접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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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청춘들이 울고 있다. 상처받고 지친 청춘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쓰러져있다. 청춘의 특권이나 다름없던 '열정'은 '불안'으로 바뀐 지 오래다. 가끔 표출되는 열정조차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몸부림일 뿐, 무엇 하나에 진정으로 빠져드는 이는 드물다. '나'라는 존재 자체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출발조차 힘겹다.

초·중·고 12년을 대학입시 하나를 위해 달려온 청춘들은 안식년은커녕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다시 취업전선에 나서야 한다. 학점, 토익, 공모전, 어학연수, 봉사활동이라는 이른바 '취업 5종 세트'를 완비하는 데는 대학 4년도 모자란다. 그래 봤자 기다리는 건 '이태백' 아니면 '88만원 세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삼포세대'가 바로 그들이다.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역사는 여러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세대'는 잃어버린 것의 질량이 다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서 말한 '잃어버린 세대'가 실업 사회에 환멸을 느껴 쾌락과 허무에 빠졌다면, 오늘날 우리 청년들은 쾌락과 허무에 빠질 여유마저 없다.

1차 세계대전 후 실업 사회에 절망한 미국의 지식계급과 예술파 청년들은 파리에서 지적 망명자로서 또는 문학적 보헤미안으로서 방랑기를 보낸다. 이들은 유럽의 자유주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참전했지만, 좌절과 허무를 안고 귀국해 작품으로 그것을 표출한다. 헤밍웨이는 존 더스패서스, 에드워드 커밍스,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대표적인 '잃어버린 세대' 작가로 꼽힌다. 헤밍웨이는 1926년, 스물일곱 살에 탈고한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전면에 방황하는 청춘들을 내세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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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국적 상실자야. 조국의 땅과 접촉을 잃어버렸단 말이야. 귀하신 몸이 된 거지. 사이비 유럽 기준 때문에 넌 망치고 만 거야. 죽도록 술만 퍼마시고. 섹스에 사로잡혀 있고. 넌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지껄이는 데 허비하거든. 넌 국적 상실자야, 알겠어? 카페나 헤매고 다니고 말이야."

등장인물 중 하나인 빌이 주인공 제이크 반스에게 하는 말 속에는 바로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자신이 방황하는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의 카르티에라탱과 몽파르나스 지역에서 술과 환락을 찾아 카페와 댄스홀에 드나들었다.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열린 산페르민 투우 축제에도 몇번 참가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를 두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삶의 목표를 상실한 채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찰나적 현재에 몸을 맡긴다. 그들의 일상은 먹고 마시고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불쑥 다툼이 벌어지는 패턴을 반복한다. 언뜻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축제가 끝나면 그들의 갈증은 더욱 심해진다. 어떤 것으로도 삶의 공허함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헤밍웨이는 마침내 말한다.

"이봐, 로버트.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나도 벌써 그런 짓은 모조리 해봤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너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있는 건 아냐. 그래 봤자 별거 없어."

황소와 맞서는 투우사를 동경하는 주인공

그리고는 넌지시 삶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물론 주인공 제이크나 그의 방탕한 친구들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19세 청년 투우사, 로메로를 통해서 헤밍웨이는 삶의 불안에 직면하는 인간의 단면을 그렸다.

"로메로의 투우는 진실한 감동을 주었다. 그의 동작이 선의 절대적인 순수성을 유지할뿐더러 매번 조용하고도 침착한 태도로 뿔이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게 하기 때문이다. … 나는 그녀에게 호셀리토가 사망한 뒤로는 투우사들이 모두 실제로는 안전하면서도 가짜 감동을 주려고 이렇게 위험한 척해 보이는 기교를 연마해 왔다고 설명해 주었다. 로메로는 옛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최대한 위험에 몸을 노출시켜 순수한 선을 유지하면서 황소에게는 도저히 잡힐 수 없는 적수라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완전히 제압하며 황소를 죽일 준비를 했다."

로메로의 투우를 감상하는 제이크의 시선에는 남모를 동경이 묻어난다. 애써 회피하고 돌아서는 삶을 살았던 그로서는 당연하리라. 황소와 정면으로 맞서는 로메로의 경기에서 주인공 제이크는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고고함을 느낀다. 물론 자신과 비교하면서 자괴감도 동반한다. 이는 비단 제이크만의 시선이 아니다. 헤밍웨이 자신도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주인공 제이크는 헤밍웨이의 분신이다. 둘 다 파리주재 신문사 해외 특파원이고 이후 작가의 길을 모색하는 점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소설의 주인공이 전쟁 중성기에 상처를 입고, 헤밍웨이는 심리적 외상을 입었다는 정도다. 하지만 그마저도 전쟁 후 느꼈던 정신적 불모나 심리적 무능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하다.

제이크처럼 헤밍웨이는 삶에 대한 욕구를 느끼면서도 막상 그 욕구를 의미 있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거세된 소처럼 '황소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찍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살고 있는' 무기력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물을 많이 그린 헤밍웨이였지만, 정작 자신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종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방황하더라도 삶의 주체임을 잊지 말아야

헤밍웨이 자신도 방황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었고, 마지막 또한 비극적으로 끝나서일까? 이 소설은 길 잃은 청춘에게 속 시원한 길잡이가 돼주지는 못한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희망찬 제목만 보고 달려든 젊은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낼 뿐이다. 대신 다양한 인물 군상을 제시하며 그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섣불리 인생의 철학에 대해 단언하는 대신 주어진 삶을 충분히 즐길 것을 권유한다. 여기서 '즐긴다'는 의미는 '방탕'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로메로처럼 위험에 맞서 싸우는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삶의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라고 청춘들에게 당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구절은 아픔과 절망 속에 빠져 질식할 것 같은 이 땅의 청춘들에게도 먼 데서 전해오는 작은 희망의 홀씨가 될 수 있으리라.

"삶은 그저 가치의 교환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것을 포기하고 다른 어떤 것을 손에 넣는 것이다. …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얻기 위해 나름대로 값을 치렀고, 그래서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들에 관해서 배운다든지, 경험을 한다든지, 위험을 무릅쓴다든지, 아니면 돈을 지불함으로써 값을 치렀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얻었을 때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을 지불한 값어치만큼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무언가를 구입하기에 좋은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민음사(2012)


태그:#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청춘, #잃어버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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