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에는 무엇인가를 깊게 응시하는 그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오른쪽에는 그의 저서 <우상과 이성>에 나오는 두 개의 문장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곳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사상의 은사'로 불렸던 리영희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됐다. 11월 마지막 밤, 그를 기억하고 되새기려는 사람들이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관에 모였다. 그가 창간에 참여했고 논설고문을 지냈던 한겨레신문사가 30일 '2011, 나와 리영희'라는 이름으로 '1주기 시민추모의 밤' 행사를 연 것이다.
양상우 <한겨레신문> 사장은 "리영희 선생을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사상, 치열한 삶을 되짚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며 "한미FTA를 강행처리하고 보수언론의 4개 종편이 내일(12월 1일) 출범하는 등 엄중한 시대에 리영희 선생은 우리에게 실천적 함의를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정부에서) 종편 출범 등 말이 안 되는 일이 아주 많이 벌어지고 있다"며 "리영희 선생은 병상에 있을 때도 그런 상황을 질타하는 말씀을 멈추지 않았고, 더 나은 세상이 온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생은 휴머니스트... 이념으로 무장된 분은 아니었다"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보내온 편지를 낭독하는 등의 순서가 끝나고 '리영희가 변화시킨 나와 세계'를 주제로 한 좌담회가 열렸다. 이날 좌담회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백영서 연세대 교수, 김부겸 민주당 의원,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부원장이 참여했다.
리영희 선생이 처음 주례를 섰던 유홍준 전 청장은 "저뿐만 아니라 백영서 교수, 유인태 전 의원, 서중석 교수, 김세균 교수 등의 주례를 다 섰다"고 '리영희 주례제자단'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당시 해직상태여서 선생님이 (이렇게) 주례로 생활한 때가 있었다"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유 전 청장은 "리영희 선생은 경직되게 의식화된 분이 아니라 인간적인 분이었다"며 "마티니와 나폴레옹 꼬냑을 좋아하고, 기능성이 좋다며 몽블랑 만년필을 좋아했던 것이 그런 예"라고 말했다. 그는 "리영희 선생은 나폴레옹 꼬냑을 하도 좋아해 그 병에 홈을 내서 전구를 집어넣어 스탠드로 만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유 전 청장은 "리영희 선생은 휴머니스트이고 그분의 이념은 휴머니즘"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는 "선생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얘기했다"며 "이념으로 무장된 분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리영희 선생과 관련된 몇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혼인서약서에는 '나라에 공헌하고'라고 쓰인 대목이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주례사를 할 때 '나라'를 '사회'로 고쳤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선생님이 '거기('나라')엔 파쇼의 냄새가 나서 안돼'라고 했다.""선생님은 유행을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날 사모님이 새로 유행하는 와이셔츠를 사왔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이 못마땅했던지 '당신은 다음부터 옷을 살 때는 10년 전 유행하던 것을 기준으로 사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모님이 '그럼 맞춤으로 하면 될 것 아니에요'라고 응수했다."리영희 선생과의 인연이 깊었던 유 전 청장은 "(좌담회가) 끝나기 전에 선생님 흉을 봐야겠다"고 해서 좌중을 긴장시키더니 이런 일화를 소개해 폭소가 터졌다.
어느날 선생님이 "아부도 실력이 있어야지 아무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이런 일화가 있었다.) 80년 강제해직될 때 김연준 한양대 총장이 사직서를 쓰게 하려고 선생님을 불렀다. 김연준 총장이 위대한 작곡가인데 선생님에게 "노래 한 곡 듣고 얘기하자"고 하더니 판을 틀었다.김연준 총장 "노래 좋죠?"리영희 선생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김연준 총장 "제가 작곡한 겁니다."김연준 총장 "한 곡 더 듣죠. (판을 틀더니) 이 곡은 어때요?"리영희 선생 "굉장히 좋습니다."김연준 총장 "이건 베토벤이 작곡한 겁니다.""리영희 선생은 실천적 삶과 공부를 연결시켜주는 균형추"이어 '리영희 주례제자단'의 또다른 일원인 백영서 교수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같은 교도소에 있던) 김지하 시인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며 "그런데 제가 동양사 공부가 지루하다고 하자 '그것은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 감옥에서 나가면 리영희를 만나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백 교수는 "선생님은 정감있고 여린 분"이라며 "군인이었을 때 어머니가 주사맞는 것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로 주사를 엄청 무서워했다"고 전했다. 그는 "하지만 2층 서재에 가보니 신문사 자료실처럼 외국언론기사를 스크랩하는 등 철저하게 조사해서 글을 쓰는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백 교수는 "서울공고를 나온 선생님은 특히 엘리트주의에 반발했다"며 "'우리는 너희 인문계와 다르다'며 자신이 서울공고생인 것을 엄청나게 자랑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내 삶에 리영희 선생은 ◯◯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 삶에 선생님은 균형추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이나 <8억인과의 대화> 등을 두고 '다 아는 얘기'라고 평가한다. 알고도 안 하는 분들이 있는데 선생님은 그처럼 누구나 아는 것을 글로 쓰고 행동한 분이었다. 선생님은 저의 실천적 삶과 공부를 연결시켜주는 균형추다. 오늘 각자 '내 삶에 리영희 선생은 ◯◯이다'에서 '◯◯'를 채워보자."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감옥에 들어가 리영희 선생의 영향력을 실감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김 의원은 "감옥에 갔더니 방장이 인상을 쓰더니 '너 리영희 알아?'라고 물어서 '안다'고 했다"며 "그랬더니 방장이 '그분이 며칠 전까지 이 방에 있었는데 우리가 다 감화됐다'면서 '긴장 풀어'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는 "보안사에 근무하던 친구가 부탁해서 선생님이 주례를 섰는데 '제국주의' 어쩌구 해서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며 "친구들이 '신혼여행도 못가고 신랑이 잡혀가는 것 아니냐'고 농담했다"고 말했다.
김병권 새사연 부원장은 "선생님의 따님이 학교 선배여서 그를 졸라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마침 독감에 걸려 누워 계셨다"며 "하지만 1시간 넘게 얘기했는데 '당장 필요하다고 얘기하지 마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2권을 소장한 사연좌담회에 이어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라는 행사가 진행됐다. '리영희 팬클럽' 회원인 김민수(중앙대 4년)씨는 "헌책방에서 선생님의 <대화>를 읽고 역사관과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며 "그런데 청년 중에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선생님을 얘기하면 주위에서 '리영희가 누군데?'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리씨라고 쓰는 걸 보니 황장엽이랑 같이 내려온 사람인가 보다'고 말한다(웃음)."리영희 선생을 중국에서 두 번 가이드했다는 최만원(조선대 강사)씨는 "저는 두 번이나 선생님의 전신을 본 사람"이라며 "사모님을 빼고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어 리영희 선생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저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두 권이나 소장하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1주일간 중국 가이드를 하면서 엄청나게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것을 현상소로 바로 가져갔으면 괜찮았을 텐데 카메라를 여는 바람에 사진을 쓸 수 없게 됐다. 선생님은 '음…'만 하시며 아무 얘기를 안 하셨다. 그런데 선물로 준 선생님 책에다 '사랑하는 후배 박만원군'이라고 썼다. '아 이렇게 복수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걸 기억했는지 귀국하자마자 저한테 전화가 왔다. '최군 미안해.' 그래서 (나중에) 다시 '사랑하는 후배 최만원군'이라고 써주었다. 그렇게 해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을 2권 소장하게 됐다." 최씨는 "이후 다시 선생님을 가이드하게 됐을 때 제가 '제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달라'고 하자 선생님이 '사회과학하는 사람이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20여분간 엄하게 꾸짖었다"며 "제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거슬렸던 모양"이라고 회고했다.
통일운동가 임수경씨가 "선생님은 지식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다"고 회고한 데 이어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던 김선주 전 논설주간은 '자존심'이라는 열쇠말로 리영희 선생의 삶을 풀어나갔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 남편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복수가 차서 배가 불렀다. 내가 배를 만지면서 '언제 만삭이 되셨어요? 이제 해산하세요'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왜 남의 남자 배를 주무르냐'고 농담했다. 이에 사모님이 '당신이 남자에요? 환자지'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북한의 한 몰락한 인물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는 그렇게 자존심 있는 인간이 좋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유언으로 간직하고 있다."김 전 주간은 "선생님은 젊었을 때 까칠했고 여자 후배 언론인들을 높게 치지 않아서 가깝게 가지 못했다"면서 "그런데 4~5년 전 '나 리영희올시다'라며 전화가 왔다"고 회고했다.
"그날 아침 신문에 실린 내 칼럼을 칭찬해주기 위한 거였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든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칼럼이었다. '아 선생님과 내가 서로 코드가 맞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조선일보>에서 해직됐을 때 참언론을 하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기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조선일보>를) 나온 것이다.""'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의 꿈을 얘기했다"이어 김 전 주간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눈물겹게 노력했던 리영희 선생의 일화를 몇가지 더 소개했다.
"(해직됐을 때) 선생님은 3남매의 가장이었지만 글을 팔지 않았다. 전집을 들고 책외판원으로 나섰다. 시청 앞 지하도가 가파른데 그것을 들고 다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얼어붙은 지하도를 오르내렸다. 이것이 선생의 자존심이었다. 또 기억나는 게 있다. DJ, 노무현 정부 때였다. 산본에서 전철을 타고 언론재단 앞에서 열리는 집회나 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모임에 끝나면 저녁 9시, 10시였다. 당시 장관들이나 의원들 중에 후배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사가 딸린 차로 모셔갔다. 하지만 선생님은 혼자 절둑절둑 지팡이를 짚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에서 선생님의 자존심을 느꼈다."김 전 주간은 "선생님은 '저 세상'을 소망하거나 기대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이 세상에서 사는 문제를 항상 얘기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 세상'의 꿈을 얘기했지 '저 세상'의 꿈을 얘기하지 않았다."김 전 주간은 "지난 서울시장 선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되찾아가는 것 같다"며 "개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민족으로서 자존심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시대지만 언제든지 (선생님처럼) 자존심 있는 인간들은 태어날 것"이라고 낙관론을 펼쳤다.
한편 리영희 선생의 1주기 추도식은 오는 5일 오전 광주광역시 망월동 묘역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