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김진숙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심장 월스트리트에서 싸우는 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부산의 '크레인85호' 김진숙이 뉴욕의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대와 만났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은 미국시각으로 8일 오후 9시30분경(한국시각 9일 오전 10시30분경)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공개총회(General Assembly) 시간에 전화를 걸어 현지 한인의 통역을 통해 연대 메시지를 보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부산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 277일째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는 금융자본가의 탐욕과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며 뉴욕 맨해튼 증권거래소 인근 자유광장(주코티공원)에서 3주째 점거 시위를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는 뉴욕뿐만 아니라 워싱턴DC,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전역은 물론 캐나다, 호주, 일본 등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김진숙 "신자유주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큰 관심"
김진숙 지도위원은 전화 메시지를 통해 "한국정부가 97년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이후 한국에는 한해 90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비정규직이 되거나 죽어갔다"며 "이런 일은 한국뿐이 아니라 거의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임을 뉴욕 월가에서 투쟁하는 여러분들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신자유주의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여러분들의 소식에 한국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있다"며 "저를 찾아온 희망버스가 외치는 것은 단 한마디다. 웃으면서 끝까지 투쟁하자"고 강조했다.
자유광장에 모인 2500여 명의 시위대는 김 지도위원의 메시지를 듣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당초 김 지도위원은 월스트리트 시위대를 상대로 연설을 할 예정이었으나, 현지 사정이 좋지 못해 짧은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는 마이크나 확성기를 쓸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 지도위원의 전화통화 내용은 수시로 '인간 확성기'에 의해 전달됐다. 김 지도위원이 전화로 말을 하면 전화를 받은 사람이 영어로 통역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이를 크게 외치면 뒤에 있는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방금 나온 얘기를 한 문장씩 끊어서 앞사람이 반복해주는 식이었다.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김 지도위원의 말을 뒤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2~3차례씩 반복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외칠 때는 이전보다 더 크고 힘차게 목소리를 내는 등 강한 연대감을 드러냈다.
이틀 전부터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크리스틴 터너(21)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277일째 크레인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에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워 했다. 그는 김 지도위원의 연설에 대해 "여기서 오늘 저녁 그녀가 (전화로) 연설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나를 비롯해 우리는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론 미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해고노동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며 "우리는 모두 99%다, 그래서 그의 연설에 공감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지도위원의 연대 메시지는 이날 공개총회의 첫 번째 어젠다로 상정돼 눈길을 끌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시작된 이후 미국 내 이슈가 아니라 해외 이슈가 총회 어젠다로 상정된 것도 처음이지만, 아젠다 첫 번째 순서로 채택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공개총회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최고의사결정 기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루에 두 차례 열리는 총회에서 농성장에 대한 실무적인 문제에서 부터 향후 시위를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지 등 중요한 사안까지 논의한다. 시위대는 총회가 열리면 각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참석할 만큼 애정이 깊다. 간혹 오스카상 수상자인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등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지지하는 유명 인사들이 초대되기도 한다.
"월가 시위대 향한 김진숙씨 연설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의미"'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에 김진숙 지도위원의 전화 연결을 기획하고 이날 통역까지 한 설갑수(42·회사원)씨는 "미국에 살면서 김진숙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열렸다"며 "전 세계의 (부를 독점하는 1%를 제외한) 99%를 대변하는 싸움이니까, 이 자리에서 김진숙씨의 싸움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쟁과 효율의 이름으로 치장한 신자유주의 폐해, 가진 자의 끝없는 탐욕과 부패, 20:80의 양극화를 넘어 1:99의 초양극화까지 치닫는 불공정 사회, 이런 모든 이슈에 분노한다는 점에서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는 시위를 주도하는 리더가 없는 등 한국에서의 잘 조직된 집회와는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일을 추진했다"며 "끝내고 보니 더 오래 통화하지 못한 점 등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어쨌든 이들에게 김진숙씨를 알렸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날 공개총회에는 김진숙 지도위원과 전화연결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10여 명의 미주 한인들도 참석했다. 이들은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한 소개와 한진중공업의 무차별 정리해고 상황, 희망버스 일지 등의 담긴 유인물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미술가 임윤경씨는 "한국은 민주주의가 후퇴했기 때문에 미국보다 상황이 더 악화됐다고 볼 수 있지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며 "미국도 대기업이 엄청난 이익을 독점하기 때문에 빈부의 격차가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월가 점령 시위나 김진숙씨의 크레인 점거 시위는 모두 양쪽 사회에서 상징적인 사건 아니냐"며 "그런 점에서 김진숙씨가 오늘 전화로나마 월가 시위대를 향해 연설을 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이런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월가 시위를 보면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슈를 가지고 나와 서로 공유하면서 같이 풀려는 의지가 강하다"며 "오늘 김진숙씨의 연설은 월가 시위대와 한국의 희망버스가 함께 연대해서 공통된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를 대상으로 준비했다가 현지 사정으로 하지 못한 연설의 전문이다.
"월가 시위는 승리하고 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신자유주의의 심장, 월스트리트의 용기 있는 시민 여러분.여기는 대한민국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입니다. 저는 지난 1월 6일 이 크레인을 점거한 이후 오늘로 277일째가 되었습니다.한국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이후 한국에는 한해 90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비정규직이 되거나 죽어갔습니다. 1300만 명의 전체 노동자중 900만이 비정규직이고 하루에 40명이 자살로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고 있습니다.이런 일은 한국뿐이 아니라 거의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임을 뉴욕 월가에서 투쟁하는 여러분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싸우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여러분들의 거리는 멀지만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모습은 같을 거라고 믿습니다. 노동이 존중받고 돈보다는 인간이 우선인 사회. 그 꿈은 하나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는 희망버스가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을 싣고 찾아왔습니다. 어젯밤에도 평화적인 희망버스 시민들을 향해 경찰은 강제로 연행해서 58명이 끌려갔고 추운 날씨에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쐈습니다. 이런 모습은 1차에서 5차까지 경찰의 일관된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습니다.신자유주의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여러분들의 소식에 한국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 다가가고 있습니다.한국의 희망버스는 지금까지 하나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 구호를 월스트리트의 용기 있는 시민들에게 전합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