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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일부 보수단체들이 좌편향 교과서로 지목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와 사회교과서.
 2008년 일부 보수단체들이 좌편향 교과서로 지목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와 사회교과서.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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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역사교과서 논란이다. 이제는 지겹다. 이 문제에 신경을 끄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역사교육과정에 의거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기에 결코 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지겹지만, 이 논란에 대해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2009 개정 역사교육과정'에 '한국현대사학회'가 몇 가지 내용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그중 일부는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한국현대사학회'가 제안한, 논란이 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1.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자.
2. '식민지 근대화론'을 교과서에 넣자.
3.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건국하였고,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였다는 내용으로 바꾸자.

이중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자는 제안은 수용되었고, 유엔의 도움으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검토하겠다고 하였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이제는 과거의 트렌드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찾아보았다. 대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이 다르기에 한국현대사학회가 기를 쓰고 교육과정의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자 했나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원래 민주주의는 평민에 의한 지배이므로 귀족들이 싫어했다. 평등의 의미가 강하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성숙된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와 만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발전시키는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불평등 사회를 초래하는 문제점을 노출했다."

백과사전의 설명을 읽으면서 '2009 개정 역사교육과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넣는 것은 시쳇말로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우리나라의 화두는 복지와 나눔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선거, 시장 선거, 구의회 선거 등등 어떤 선거를 보아도 후보들이 내세우는 공약은 서민복지이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며 20세기 후반부터 계속해 온 경쟁에 이제는 지쳤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경쟁에 낙오된 이도 보듬고 새로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보수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총력을 다해 관철시킨 내용이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라는 게 살짝 안쓰럽다.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거부하는 이는 북한으로 가라"는 30년 전쯤 들어본 듯한 말도 다시 뉴스에서 들려온다. 이래 가지고는 한국의 보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이라는 이미지만 남길 것 같다.

식민지 근대화론, 유엔의 도움을 받은 대한민국 건국

학생 몇몇에게 '2009 개정 역사교육과정'과 관련된 기사를 보여주고 어떤 느낌이 드느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 조금 충격을 받고 이유를 물었다. 학생들은 "이쪽 의견과 저쪽 의견을 모두 들어보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바른 자세이므로 '식민지 근대화론'도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내가 너무 잘 가르쳤나? 내가 수업시간에 항상 학생들에게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이런 자세는 분명 옳은 자세이다.

그런데, 한 학생은 "신문기사처럼 교과서가 나오면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줄어들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한 게 없기 때문"이란다. 봉건사회에서 근대로 발전하는 것은 일본의 영향에 의해서이고,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유엔에 의해서라면 우리나라는 외세에 휘둘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나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 역시 수업을 참 잘 들은 것 같다.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11월 17일 오후 보수단체인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회원들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북좌경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검정 취소'를 촉구하며, 금성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명단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08년 11월 17일 오후 보수단체인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회원들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북좌경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검정 취소'를 촉구하며, 금성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명단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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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말을 들어보니 수업시간에 열심히 가르쳤던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타율성론은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론이다.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힘이 강할 때는 대륙의 침략과 영향을 받고, 해상 세력의 힘이 강할 때는 해상의 침략과 영향을 받은 역사로만 점철되어 있다. 또 항상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가 진행되어 갔을 뿐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타율성론의 핵심이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비판하던 이들은 교과서가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가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내용들은, 우리나라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공업화나 정부수립 같은 중요한 일을 전혀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교과서로 근현대사를 배우면 우리 학생들은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까?

임시정부 부정은 "친북 이적 행위"

최근 3주 동안 토요일마다 백범기념관에서 하는 교사 연수를 들었다. 연수 제목은 <한국 근현대사와 백범 김구 선생>이다. 백범기념관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교사 연수라고 한다. 극우에 가깝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는 김구 선생이고, 그 김구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에서 역사 교사를 대상으로 연수까지 하는 걸 보면, 작금의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보수 일각에서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우고, 김구는 테러리스트라고 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건국절이라는 명칭을 쓰자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 연수를 듣고,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유엔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들어가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과서 포럼이나 한국현대사학회가 그토록 적대시하고 있는 북한을 이롭게 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유는 이렇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했지만,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는 독립선언을 하고,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다.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인데, 영토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국외에 임시정부를 세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한 것이었다.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을 재건한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공식 입장이다.

이 사실은 최초의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을 재건한다'고 쓴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1948년 9월에 발행된 관보에 연도를 대한민국 30년(1919년 임시정부를 수립한 해에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1948년은 그 연호 계산법에 의해 대한민국 30년이 된다)이라고 표기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1919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족사의 정통 국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유엔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1948년 9월 9일에 건국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이므로 정통성 경쟁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즉,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후, 1919년의 전 국민적 독립선언과 함께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이 재건된 것이라면, 남한이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가 된다. 그러나 1948년에 처음 건국한 국가라면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북한에도 정통성 경쟁에 있어 동일한 기회를 주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발언을 하면 친북, 종북이라는 말을 쓰는 쪽에서 이토록 북한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준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가장 어리석은 역사 왜곡

오래 전 <라이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기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남자는 두 명의 여자와 중혼을 한 상태인데, 어느 날 사고가 나서 중혼을 들킬 위기에 처하자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한다. 그런데 그 거짓말은 계속 다른 소동을 일으키고, 주인공은 계속 거짓말을 한다. 결국 주인공의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요즘의 역사 논란을 보며 이 연극이 떠올랐다. 친일파를 두둔하려고 하다 보니,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이승만 대통령을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로 포장해야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지워야 했고, 김구는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여야 했다.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다 보니, 일제 강점기는 긍정적인 시대가 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식민지 공업화론을 내세워 일제 강점기를 근대화를 이뤄낸 긍정적인 시대로 포장했다.

일제 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공업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지금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제시대는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런 것이야말로 역사 왜곡이다. 그것도 가장 어리석은 형태의 왜곡이다. 우리나라가 잘났다고 왜곡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가 어리석고 못났다고 왜곡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토록 어이없는 왜곡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사 왜곡과 왜곡된 시각으로 집필될 교과서를 그냥 받아들여야만 할까?


태그:#한국현대사학회,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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