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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제96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독도영유권 주장' '위안부 용어 삭제' 등의 내용이 담긴 일본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규탄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며 일본 대지진 직후 열린 수요집회는 묵념만 하는 추모집회로 개최한 적이 있으나, 이날은 '죄'를 심판하는 날이라며 정상적으로 규탄집회를 진행했다.
▲ 수요시위, 역사왜곡 일본 교과서 규탄 3월 30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제96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독도영유권 주장' '위안부 용어 삭제' 등의 내용이 담긴 일본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규탄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며 일본 대지진 직후 열린 수요집회는 묵념만 하는 추모집회로 개최한 적이 있으나, 이날은 '죄'를 심판하는 날이라며 정상적으로 규탄집회를 진행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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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느닷없이 '대안 교과서'를 펴내고, 광복절을 생뚱맞게 '건국절'로 바꾸자고 부르댈 때부터 '오늘'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한국현대사학회가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했다는 '역사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건의안' 얘기다. 요 며칠 전에는 멀쩡한 민주주의에다 '자유'라는 두 글자를 은근 슬쩍 끼워 넣더니 이젠 아예 헌법 전문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려 든다.

이들의 만행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업보'다. 대안 교과서와 건국절이 논란을 일으킬 때만 해도 그들에게는 적어도 '염치'라는 게 있었다. 보수 언론의 지면 등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되 여론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며 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선 믿을 구석이 있는 것인지 거칠 것 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식민지배가 경제성장에 기여'? 경제 교과서로 바뀐 한국사

그들의 주장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우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일제강점기 부분을 보자.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의 변화와 경제 수탈'이라는 학습목표에
'식민지배에 의한 근대적 제도의 이식, 그리고 해방 이후 역사 전개에 미친 영향'을 포함시키자고 했다.

이는 식민지배가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논리다. 거칠게 말해서, 일제에 의해 건설된 신작로와 철도, 군수공장 등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적산'이지만 해방 후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경제발전의 기반이 되었으니 36년간의 식민지 경험을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라는, 일견 그럴 듯한 주장이다.

이는 일제가 아니었으면 공업화를 수반한 근대화가 지체되었을 것이며, 세계의 수많은 신흥 개발국들이 경제 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도 없었으리라는 거다. 그렇다면 예컨대, 국권 피탈 전 일제에 진 빚을 갚자며 전국의 백성들이 호응한 국채보상운동이나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 같은 자랑스러운 저항의 역사는 근대화의 물결을 거스르는 치기어린 행동으로 전락하게 된다.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 위주로 서술되던 역사 교과서가 순식간에 '일제강점기 1인당 GDP'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경제' 교과서로 탈바꿈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논리 안에선 일제에 부역한 매판 자본가들의 그동안 문제시됐던 친일 경력이 시나브로 탈색되고, 되레 그들이 식민지 시절 우리 경제를 일군 근대화의 역군으로 그려질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여태껏 일제의 강압적인 총칼 앞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과 목숨을 바쳐 일제와 맞서 싸운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하면 백성들 모두가 친일파라는 '물타기' 논리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독립운동가에겐 그들의 역할이 있고, 우리에겐 경제성장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시대적 사명이 있었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맛대로 '역사 짜깁기'

여러 교과서들 (자료사진)
 여러 교과서들 (자료사진)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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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역사> 교과서로 가면 더욱 가관이다. 이들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전문 조항도 교과서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한다. 대신 '유엔의 도움으로 건국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다'는 내용을 넣자는 것이다. 지난 '건국절' 소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대체하려는 서술의 내용이다. 해방이 유엔, 곧,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기록되는 순간, 그들에게 분단의 책임을 전혀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런 논리라면, 일제의 무장 해제를 위해 38도선 북쪽을 점령한 '해방군' 소련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다. 더욱이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은 순간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또, 식민지의 질곡에서 해방됐다는 역사적 사실은 슬그머니 숨긴 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웠다고 강조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 항일독립운동을 미소 냉전을 빌미로 희석시켜 엉뚱하게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대립인 양 단순화시키려는 짓이다. 해방을 위한 공산주의 세력의 엄연한 역할과 몫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항일독립운동의 주류인 양 진실이 왜곡될 소지가 크다.

이는 역사를 진실의 눈이 아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맛대로 짜깁기하고 재해석하려는 '정치 행위'다.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었던 6·25 전쟁이 죗값을 기다리던 친일파들에게는 목숨을 건지고 복권된, 나아가 그들을 매국노에서 애국자로 둔갑시킨 하늘이 준 '기회'였음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진실엔 눈 감고 오로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었다는 외눈박이 사실만 미래세대 아이들의 머릿속에 주입하려 들고 있다.

당연히 학계의 반발은 거세다. 따지고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들이지만, 어떤 힘을 등에 업고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을 미화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수용 불가 방침을 정했지만,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대체하고 유엔의 도움을 받아 건국했다는 등의 내용은 집필기준에서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이 이를 증명한다.

9월 28일 수요일, 학계와 시민단체의 엄청난 반발을 무릅쓰고 '이승만 다큐멘터리' 방송이 결국 강행되는 것도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영방송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가 됐다.

식민지를 근대화 과정의 경제성장기로 해석하고, '국부' 이승만과 '경제발전의 지도자' 박정희를 추앙하는 이른바 '건국 세력'의 역사인식은 '경제 대통령'을 부르짖는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초 학문의 울타리를 효율의 이름으로 허물더니, 역사마저 경제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단언컨대, 그들의 주장이 결코 교과서에 단 한 줄도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오래 전에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갔어야 할, 이른바 '식민사관'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좌파'니 '종북 세력'이라고 몰아세우며, 그러려거든 차라리 북한에 가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그 조롱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정작 그들은 모른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긍정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그들이 갈 곳은 일본뿐이다.


태그:#한국현대사학회, #2009 개정 역사교육과정, #뉴라이트, #자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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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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