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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여름 정오, 사단본부 헌병중대 수송부 막사 옆에 군기잡기 집합이 있었다. 현장에는 헌병참모장 운전병인 키 작은 김 하사가 침대마후라(야전침대용 나무각목)을 꼬나 들고 살기를 띠고 있었다. 수송부 소속 5명의 일·이병을 계급 및 군번 순으로 업드려 뻗쳐를 시킨 후 제일 졸병부터 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나였다. 짐작하건데 오늘은 내가 타깃이었다. 여러 차례 나에 대한 적의를 보낸 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송부에는 모든 병사들이 수송 및 정비병과 출신으로 운전을 하거나 차량정비를 한다. 내 사수인 말년병장 1명을 빼면 조수인 입대 4개월의 신참 이병인 내가 유일하게 행정병과 출신으로 배차업무 등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모든 병사들이 하루 종일 운전을 하거나 정비를 하면서 온몸에 기름칠을 하는데 비해 졸병 중의 졸병이 행정을 본답시고 시원한 막사 안에서 깨끗한 모습으로 얼굴 뽀얗게 펜대 잡고 있는 것이 몹시 언짢고 아니꼬았는지 고참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유를 달아 수시로 무언의 위협, 언어폭력 및 기합이나 구타를 당해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악명 높은 김 하사다. 표정이나 분위기가 아주 작정을 하고 온 것 같다. 군기가 빠졌다며 일장 훈시를 한 후 '빳다'를 치기시작 했다. 그는 고통을 많이 주고 상처를 내기 위해 교묘하게도 엉덩이를 치지 않고 보드라운 살이 있는 허벅지를 밑에서부터 감아 치기 시작했다. 정말 입대 후 이제까지 맞은 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력적이고 충격적이었다.

맞을 때마다 하나, 둘하고 숫자를 세는데 세 번째 이후 너무나 큰 고통에 온몸을 꼬다가 딩굴다가 크게 비명을 지르게 됐다. 열여섯을 셀 때쯤 비명소리가 너무 커 부대 안에 있던 중대장과 직속상관인 수송부 소대장인 이 소위님이 쫒아와 기합이 끝나게 되었다.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같은 선임자에게서 구원을 받은 것이었다.

평소 형님 같이 자상하시던 이 소위님이 내가 걱정되고 안쓰러웠든지 자기 집에 가서 쉬었다가 오라며 외출을 하게 해주었다. 부대에서 약 1km 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찾아갔는데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1시간 정도 걸려 집에 도착한 후 혼자 있게 되니 그때서야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으로 서러움이 받쳐 울컥 울음이 나왔다. 얼마 있다 화장실을 가게 되었는데 매 맞은 허벅지가 터져 피가 나고 부어 팬티와 살이 한데 엉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 집 앞에 시냇물이 흘렀는데 옷을 입은 채 물속에 들어가 한참 있다가 하의를 내려 고개를 뒤로 돌려 넓적다리를 보았다. 마치 큰 구렁이가 십여 마리 엉겨 기어가는 듯 붉고 검은 줄이 온 다리를 감싸고 있었고 진물과 피가 계속 배어 나왔다. 내 눈으로 보아도 참혹한 상처에 나도 모르게 "엄마아!"하고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시냇물 속에 몸을 담구고 누워 남쪽 고향 쪽으로 흘러가는 흰구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던 푸른 제복의 내 젊은 날의 한순간이 눈에 잡힐 듯 선하다.

덧붙이는 글 | 병영구타의 추억



태그:#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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