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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재계약은 힘들 것 같습니다."
"예상했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결국 스물아홉의 한 청년은 밥값 못하는 '인턴'에서 밥값을 더욱 못하는 '백수'로 전락했다. 그가 인턴으로 일했던 곳은 경남도 내의 한 일간지. 그는 '인턴기자'였다.

스무살 무렵, 교내 신문사를 시작으로 '기자'라는 직종에 발을 내딛은 그는 군대를 제외한 모든 20대를 신문에 쏟아부었다. 교내신문사를 비롯, 군단위 지자체의 주간지와 최근 재계약에 실패한 도내 일간지까지.

우연찮게 신문을 접하게 된 이후, 줄곧 신문에만 매달려서일까. 그의 '스펙'은 형편없었다. 토익 등 영어시험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학점 역시 2.5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는 "다른 '스펙'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신문기자로서 실력을 높여나간다면 충분히 취직을 하고, 기자로서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입을 뗐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는 교수의 소개로 경남도의 군단위 지자체 주간지에 취직하게 됐다. 학교에서 신문을 만들었던 경력과 더불어 어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취재와 기사작성에 대한 투혼을 불태운 덕분이었을까. 6개월여 만에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편집국장을 대신에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고, 지방선거까지도 혼자 도맡을 정도로 군단위 지자체에서만큼은 능력이 뛰어난 신문기자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년여가 흐른 뒤 그는 '대기자'의 꿈을 품고 더 큰 물로 나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렇게 찾게 된 곳은 경남지방의 한 일간지.

순탄하게 꿈을 향해 달려온 그였지만 일간지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현실은 그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제42기 공채로 합격을 했지만, 그것은 수습기자가 아닌 인턴기자였다. 더욱이 3개월의 인턴기간이 지난다 해도 정식 기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3명의 인턴기자 중 2명만 삼개월 뒤에 정식채용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입사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인턴기자였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냥 사무실을 지키기만 할 뿐, 출입처 따위의 주어진 일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 기사꺼리를 발견해 작성하라는 일만 주어졌을 뿐이다.

출입처도, 인근의 아는 취재원도 없는 입장에서는 무리한 요구일 수 있지만 그와 그 동기들 총 3명은 같이 인근 지역을 누비며 취재꺼리를 발견, 틈틈이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지면에 실릴 경우에만 데스크가 데스킹을 했을 뿐, 인턴들에게 기사에 대한 교정과 비판 등은 일절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이후, 또 한 번의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애초 3명의 인턴 중 2명 내지 3명을 뽑겠다고 신문사와 노조가 대화를 마쳤지만, 결국 1명만 뽑는다는 것이다. 회사 재정이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것도 재계약을 하루 앞둔 날에.

결국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신문사에서 나온 그는 "오히려 다행"이라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언론은 단지 뉴스,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만 그 역할이 아닐 것"이라는 그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부조리한 일을 고발하고 약자를 대변하는 것 역시 신문의 바람직한 역할이지만 과연 그러한 역할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는 "인턴이기에 회사의 방침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20대의 마지막, 자신의 꿈을 좇을 나이의 사람들에게 3개월동안 제대로 된 일도 시키지 않으면서 아침 9시 출근에 밤 9시 반까지 사무실만 지키게 만든다는 것은 어느 누가 생각해도 옳다고 할 수 없다"며 "회사의 약자인 인턴에게 했던 약속조차 어기는 신문사가 과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것도 한국기자협회에 소속된 언론사가 이러한 행태라면…"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잠시 신문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됨됨이나 기자로서의 능력을 보기보다는 단순한 스펙에 치중해 채용을 하기에 도전하지 못하겠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진정한 언론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지 의문"이라며 "또한 새롭게 신문사에 취직을 한다 하더라도 앞서 신문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더욱 실망할 것이 뻔해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겠다"고 덧붙였다.

"사실 공부를 소홀했기에 입사할 스펙조차 되지 못하기도 한다"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 그에게 스펙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단순히 취직만을 위한 영어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라며 "여태껏 한글로 기사를 작성해왔고, 추후 다른 신문사에 입사한다 하더라도 한글을 이용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할 것인데, 굳이 영어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 동안 주간신문기자로 일하는 것이 기자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백수가 된 지 한달이 채 안된 그는 이제 기자가 아닌 새로운 꿈을 꾸려 한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지만 아직은 스물아홉, 이십대기에 젊음을 패기로 다른 일을 하려 하는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이 될 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두렵기는 하지만 두드리면 열리기 마련이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나의 앞길을 정하려 한다. 최악의 경제난이지만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라는 그.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 그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88만원 세대로 대변되는 우리네 젊은 세대들은 누구나 겪어봄직한 이야기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계속 좆는다면, 이시대의 모든 젊은 세대들은 이같은 비극 속에서 희극으로의 반전을 이뤄낸 한명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나오는 스물아홉의 청년은 기자 본인입니다. 이번달 백수가 되면서 느꼈던 것들을 인터뷰와 내러티브로 재구성해봤습니다.



태그:#88만원, #88만원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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