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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여성, 여성을 말하다'는 세대별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인물 르포입니다. [편집자말]
김경희(가명·47)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주치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는 이미 어둠에 젖어있다. 김경희씨가 일하는 곳으로 가자 거리는 마치 대낮처럼 붐비고 이곳저곳에서 호객하는 소리가 높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 번잡한 거리를 구경해온 듯한 대만 관광객과 일본관광객이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서성대고 있다.

김경희씨는 밤이 되도 잠자지 않는 동대문 의류상가가 밀집한 지역의 작은 제과점에서 일한다. 그녀가 일하는 시간은 늦은 오후 10시에서 오전 8시까지이다. 그녀는 혼자서 밤에 쇼핑하러 온 사람들과 의류 도·소매업을 하는 사람들과 만난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스틸컷.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스틸컷.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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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0시간 동안 앉지를 못한다. 10평도 안 되는 크기의 제과점은 1층 매장과 2층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3층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잠을 쫓으려는 사람들, 저녁의 출출함을 달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커피를 내리고 아이스크림과 빵을 판다. 여름에는 팥빙수까지 판다.

새벽에 빵을 배달하는 차가 도착하면 빵을 받아서 3층까지 나른다. 김경희씨를 만난 때는 6월 초로 동대문시장은 비수기이다. 그래서 가게도 한산한 편이라 한다. 특히 주중에는 한가하다고 한다. 그렇게 한가한 주중에 그녀는 하루에 커피를 50잔 이상을 내리고, 아이스크림 10개, 그리고 팥빙수 10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빵을 300개 정도 팔았다.

주말에는 두 배의 매상을 올린다고 하니 그녀의 일의 강도도 자동적으로 높아진다. 제과점에게 성수기는 여름과 겨울이다. 성수기에 제과점은 아르바이트를 한 명 더 고용한다. 그러면 아르바이트생과 같이 일한다. 겨울은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하여 케이크 등 선물용 빵이 많이 팔린다.

CCTV를 통해 제과점 주인이 지켜보고 있다

그녀를 만나러 가게를 들어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그녀가 많은 사람을 쉴 새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며, 매장이 좁아서 손님들과 같이 서있기도 민망하다. 또한 일하는 곳의 전 매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카운터에는 녹음기능과 마이크 기능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자유롭지 않다. 주인은 집에 앉아, CCTV를 이용해 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을 24시간 모니터 하고 있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하여 말도 전해온다. "2층에 손님이 나갔는데 왜 테이블 정리 안 하죠?" "앉아있지 말고 빵 좀 정리하세요" 등등. 그리고 매장에서 손님과 대화하는 것을 주인은 듣고 있다. 물론 주인은 CCTV 설치는 가게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젊은 아르바이트생은 사생활 침해라고 노동부에 고발하겠다고 흥분하지만 그들은 CCTV뿐만이 아니라 힘든 일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고 다만 김경희씨와 같은 연령대의 아줌마만 남는다. 그리고 요즘은 아르바이트생도 한국 청년들이 아니다.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긴 몽고유학생이 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렇게 일하고 그녀는 월 150만 원 받는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쉰다. 김경희씨는 다른 사람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 커피를 내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는 10년 전이다. 그 이후 제과점의 주인이 3번 바뀌었다. 물론 그녀가 이곳에서 10년 동안 계속 일한 것은 아니다. 일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리 수술을 받았다. 너무 오랫동안 서서하는 일을 하여 하지정맥에 문제가 생겼고, 이것은 결국 심장 이상으로 연결되었다. 피가 잘 돌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면 가슴이 심하게 뛴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기 힘들다. 결국 한 쪽 다리는 수술하고 한쪽 다리는 레이저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한여름에도 다리에 압박붕대를 감고서 일을 한다. 목과 허리 디스크를 진단을 받은 지도 오래되었다. 결국 하지정맥과 디스크로 인해서 빵집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질병이 산재 처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모질게 재수가 없는 몸을 탓하며 그녀는 수술비를 혼자서 부담해야 했다. 그리고 란제리 가게에서 5년 동안 일했다. 그러나 란제리 가게에서 일하면서도 성수기에는 저녁에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일요일은 란제리 가게에서 일한다. 일요일 오전 8시에 제과점 일을 마치고, 교회 예배에 참가하고 곧 란제리 가게의 문을 연다.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란제리 점포가 문닫을 때까지 계속해서 24시간을 일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서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출근할 때까지 쉴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

그녀가 란제리 가게를 그만두고 다시 힘든 제과점의 야간 근무를 풀타임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란제리 가게보다 20만 원을 더 벌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시간을 희생하고 20만 원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 청산할 빚과 임대아파트 입주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그녀의 건강보다 돈 20만 원이 더 절박하다.

그녀가 제과점에서 10시간 서 있어야 하고, 무거운 빵 상자를 나르는 것은 그녀의 건강 상태로는 치명적인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디스크 환자라 진통제를 끊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동대문 제과점으로 올해 초에 다시 돌아왔다. 남자청년들도 3일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똑똑한 딸이 멍들어 가고 있는지 몰랐어요

싱글망을 소재로한 영화 <웨딩드레스>의 한 장면.
 싱글망을 소재로한 영화 <웨딩드레스>의 한 장면.
ⓒ 로드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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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이 죽은 지 10년이 된다. 남편과 이렇다 할 즐거운 결혼생활을 한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남편이 죽은 후 남겨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과 사별하기 전부터 별거중이었고 그녀는 친정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쨌든 그로 인해 딸이 생겼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10년 전 야간 일을 할 때 딸은 초등학교 2년이었다. 그녀가 야간 일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서 딸을 맞이하고 숙제도 도와주는 엄마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낮 시간 동안 딸에게 엄마가 필요하고 딸이 자는 시간에 일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함께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봐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동대문상가로 왔고, 거기서 처음 눈에 띈 것이 제과점에 붙어있는 구인 광고였다. 그날로 그녀는 운좋게(?) 일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김경희씨는 딸이 갖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을 해주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술도 없는 그녀에게 판매직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경희씨의 생각과 다르게, 밤은 딸이 자는 시간만이 아니라 딸이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지새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밤에도 필요했었나 보다. 어린 딸은 항상 밤에 혼자 지내는 것이 심적으로 외롭고 무서웠다. 옆방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으나 엄마만큼의 안정감을 주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엄마의 피곤한 얼굴을 아침마다 보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엄마가 고생하는 것에 대한 보답은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던 것 같다. 김경희씨도 한부모 가족의 소위 결손가족이란 사회의 편견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딸이 남에게 뒤지지 않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힘든 노동에도 딸의 숙제를 모두 점검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그래서 딸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 엄마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피하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많은 스킨십과 딸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내가 불안하니 딸을 믿지 못하고 딸을 유리그릇처럼 대했던 것 같아요. "

초등학교 시절 발표력이 좋고 제법 공부를 하던 딸은 '서울어린이 기자상'을 받는 등 주목을 받았고, 딸은 김경희씨 희망대로 기죽지 않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자라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딸은 힘들어했다. 그 중의 하나가 무료 급식과 무료 육성회비를 받는 학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경희씨는 딸이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에 저소득층의 한부모가족이란 것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학교에 저소득층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다리 수술을 한 이후여서 실직 상태였고 그래서 무료 육성회비와 무료 급식을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학교 담임선생님은 급식비를 무료 수혜자는 학급에서 공개적으로 손을 들게 하여 명단을 체크하였다. 이런 경험은 딸에게는 급격히 자신감을 잃게 하였고, 수치감을 주었다. 딸의 학교생활은 어려워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딸아이가 국어선생님의 추천으로 전국학생토론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학교대표로 나가는 일이어서 대회 출전 교장선생님께 인사하러 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교장 선생은 노골적으로 딸에 대해서 반기지 않는 표정을 보였다고 딸은 생각했다. 바쁜 엄마, 학교에 찾아가지 않는 엄마 그리고 한부모가족, 빈곤가족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학교에서 자신에게 차별을 주고 있다고 딸은 생각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공부와 그림 그리는 일만을 하였다. 점점 혼자서 지내는 버릇에 젖어 들게 되었다.

딸은 딸의 표현대로 지긋지긋하던 중학교를 떠나서 자신이 원하는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엄마는 그런 딸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딸의 신경질은 사춘기가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에 입학한 뒤 오전 7시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진행되는 학교생활을 숨막혀했다. 그리고 1학기를 마치고 자퇴했다. 김경희씨는 자퇴결정에 대해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딸의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딸의 마음을 치료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마음이 여린 딸에게 마음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작은 연립주택에 할머니와 삼촌과 같이 사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삼촌은 이혼해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집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한참 예민한 중학 시절을 보내고 있던 딸에게 할머니와 삼촌과 함께 사는 것은 편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삼촌의 어른으로서 내비치는 걱정스런 말은 잔소리로 들렸다. 유독 남의 간섭을 싫어하는 딸에게 할머니와 삼촌과의 동거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경희씨는 바쁜 일 때문에 딸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딸은 어느날 울면서 말했다. 

"엄마, 우리 따로 나가 살면 안돼?"    

중학교 3년 때 딸은 김경희씨에게 "나 우울증이 있나봐"하고 이야기를 했다. 조숙한 딸은 자신의 감정 기복이 심한 것과 학교 생활에 대한 부적응을 나름대로 문제로 바라보고 있었다. 휴학을 하고 그녀의 증상은 심해졌다. 대인기피증과 감정적 기복이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약을 1년 동안 먹다가 약물 치료가 아닌 상담 치료를 시작하였다. 50분 동안 치료비는 8만 원이었다. 의사선생님께 사정을 하여 6만 원으로 할인을 받아서 그녀는 1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런 딸에게 어렸을 때부터 꿈꾸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해 보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유학은 할 수 없어도 그것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딸이 교환학생 꿈을 갖게 된 것은 김경희씨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똑똑한 딸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을 가능한 많이 열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딸에게 미국 교환학생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꿈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막연히 딸은 언제가 미국에 가서 학교생활을 하는 꿈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어쩌면 그녀의 나이 또래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자퇴 후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딸은 미국에 가길 원했다. 김경희씨는 딸이 무기력감과 좌절에서 벗어나길 희망했다. 그래서 그녀는 유학원을 통해서 그 길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딸은 어학시험에도 쉽게 통과를 했다. 딸에게 국내 유학원을 통해서 미국 고등학교로 가 2학기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학비와 생활비가 무료였다. 그러나 유학원에서 요구하는 커미션 비용은 일천만 원이 넘었다.

김경희씨는 빚을 냈다. 그리고 딸을 교환학생으로 보내고 난 후 다시 밤일을 시작하였다. 가족들은 형편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리고 있고, 딸의 버릇이 나빠지는 결정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삼촌은 진작 딸의 결정, 고등학교 자퇴한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딸이 대담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은 형편을 모르고 딸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는 김경희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딸이 이기적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다른 부모에 비하면… 그리고 그 아이가 겪는 마음고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기회가 된다면 뭐든지 해주고 싶어요."

임대 아파트 월세 27만 원 부담스러워 포기

사실상 그녀는 친정집에서 근 10년 이상을 얹혀 지내고 있다. 친정 집도 다세대 연립주택의 전세로 넉넉지가 않다. 건설일을 하던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투자를 한 사업이 IMF로 부도가 났다. 그것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아버지는 암에 걸렸고 2년 동안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남긴 것은 전세 보증금과 40만 원이었다.

40만 원은 부도난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남은 돈이었다. 그녀가 40만 원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가 그 돈으로 MRI를 찍었기 때문이다. 디스크로 의심이 되었으나 정밀검진을 위해서 MRI가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의 MRI 비용이 50만 원이었다. 그것이 없어서 검진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안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유산 40만 원을 준 것이다.

삼촌이 직장을 옮기면서 할머니와 삼촌은 지방으로 이사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임대아파트 입주 신청을 하고 있다. 1년에 3-4번 신청을 하나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이 2년 전에 재개발 지역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월세 27만 원, 그리고 관리비 10만 원 정도가 매월 필요하다는 말에 부담이 되었다.

요즘 같은 전세난에  거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녀에게는 큰 돈이었다. 그래서 포기를 했다. 그때는 딸이 할머니, 삼촌과 같이 사는 것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저축을 하여 1년 후에 시도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다시 입주 신청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탈락이었다. 정부의 빈곤층, 한부모족에 대한 우선 입주권은 말뿐이었다.  

딸이 미국에서 돌아올 날이 가까워지면서 김경희씨는 초조하다. 딸이 돌아가면 할머니집에 안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비추어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김경희씨는 LH 공사의 임대아파트에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임대아파트 8채에 대한 신청 가구가 1100가구였다. 그녀는 또 떨어졌다. 이제는 방 하나만 있는 작은 임대아파트에 다시 입주 신청을 하였다. 방하나라도 딸이 친정집에서 떨어져 사는 것이 필요했다. 

싱글맘의 희망은 하나, 딸과 함께 사는 것  

딸에게 엄마는 든든한 지원자가 되지 못했다. 아직도 어린 딸에게 자신이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딸은 김경희씨가 다리 수술을 할 때 극심한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김경희씨는 딸의 정신과 상담치료를 담당하는 상담치료사로부터 자신이 알지 못했던 딸의 심리상태를 알게 되면서 딸에 대해서 더욱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김경희씨는 자기 생활에 반성을 많이 한다고 한다. 자신이 어머니와의 관계, 친지와의 관계를 잘 했더라면 자신을 통해서 딸이 더 많은 응원군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자신도 그렇게 사회적인 관계가 넓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만이 나를 지원해주는데, 엄마도 건강하지 못하고… 이제는 완전히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절망적이었어."

자신은 항상 딸이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딸이 세상을 좀 더 느리게 바라보고 살기 바란다. 딸이 항상 불안해하고 강박증적인 증세를 보이는 것은 아마도 딸과 경희씨가 처한 환경 때문일 것이다.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하고 불안하다. 딸을 믿어야 한다. 딸이 다니는 인지치료 상담사가 자신에게 한 말이다.

딸에게 불안을 보인 것은 잘못이다. 그녀 자신이 먼저 딸과 떨어지면 불안했다. 딸을 믿고 사랑을 보여주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다. 불안할 때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임대아파트가 되지 않은 것도 그녀가 친정어머니와 오빠와의 화해를 더 많이 할 시간을 주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오늘도 다리에 압박붕대를 감고 디스크 약을 먹으며 제과점에 서있다. 그녀는 야간 일, 남자 청년들도 힘들어하는 일이라도 해고될 위험 없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번도 월급이 밀린 적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래도 이렇게 일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느리지만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믿음만이 그녀를 지탱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번에는 입주 신청한 임대아파트에 당첨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녀의 딸이 돌아와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것이다.


태그:#싱글맘,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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