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앞뒤 생각하지 못한다. 달구어진 쇠판 미로 위의 쥐처럼, 순간적인 감각에 의존해 활로를 찾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그게 나를 가리키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그냥 죽어라 뛰기만 했다.
쇠파이프를 흔들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신나게 설친 후였다. 혹시라도 사복경찰이 나를 찍어 따라와 덮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그래서 시위가 거의 끝날 무렵 파란 티를 입은 후배와 셔츠를 바꿔 입었다. 그렇지만 너무 당황해서 그것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골목 두 개를 재빨리 꺾어 들어간 나는 눈앞에 나타난 3층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주택가 상가건물은 2층부터 가정집일 가능성이 컸지만 그걸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갔는데, 앞을 가로막고 선 스테인리스 철문에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럼에도 거기에 붙어있었어야 했다. 당황한 나는 다시 방향을 틀어 계단을 뛰어내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나머지는 빤한 진행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두들겨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말이다. 복부로 운동화발이 날아오더니 가죽장갑 낀 주먹들이 양쪽에서 소나기처럼 얼굴에 쏟아졌다. 다시 발길질. 주먹질. 욕설들. 길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옆구리와 엉덩이, 다리와 등에 발길이 날아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공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아 내장을 보호했다. 나중에는 아프다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제 끝났다. 잡혀가면 무조건 구속이었다. 3학년인데다가 나를 표적으로 찍어서 잡았으면, '극렬'이었다. 설혹 재수가 좋더라도 강제 징집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뒷덜미가 잡혀 끌려가는 내내, 그리고 전경버스에 실린 후에도 계속 욕설과 주먹질이 이어졌다. 차 안에는 20여 명의 학생들이 좌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상태였다.
- 이 새끼가 제일 악질이야!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퍽! 퍽!
- 쌍놈의 새끼. 생긴 것부터 악질처럼 생겼잖아. -대가리 박아, 개새끼들아! 그런데 인생이란 이름으로 말려진 두루마리는, 모두 펼쳐보기 전까지 무엇이 적혀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버스가 경찰서에 도착한 후였다.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곧바로 전경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튀어 올라오고, 욕지거리를 들으며 앞 학우 허리를 잡고 고개 숙인 채 묶인 굴비처럼 줄줄이 내려가는 것이 이어질 순서였다.
인솔형사가 나간 후 한참이 지나도록 차문이 열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차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앞자리에 버티고 앉은 전경 두 명을 제외하고는 잡혀온 학생들뿐이었다. 낯익은 후배도 없었고 동기는 더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휴, 안도감 섞인 한숨이 심란하게 터져 나왔다.
얼마 후였다. 형사 한 명이 씩씩거리며 올라왔다.
- 씨팔 놈들, 누군 시간이 썩어나는 줄 알아? 고개 처박아, 개새끼들아! 버스는 다시 어딘가로 출발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도착했던 경찰서에서는 더 이상 시위학생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수용 여유가 있는 다른 경찰서로 우리를 이송시켰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최악의 사태를 비켜가게 했다.
그 경찰서 관내에서는 학생시위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형사들도 학생들을 어찌 다뤄야 할지 잘 모르는 듯했다. 반장 급으로 보이는 중년의 형사는 오히려 정권에 대한 반감을 삐죽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잡혀왔을 뿐이라고 무조건 우겼다. 무서워서 도망치다가 죽도록 맞았다면서 최대한 가련한 몸짓으로 징징거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시위현장에서 나를 본 것도 아닌데, 그들도 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구류 15일을 처분 받는 것으로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
면회 온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 놀라 손으로 눈을 훔쳤을 때, 마음이 아팠다. 나 역시 경찰서 화장실에서 엉망으로 일그러져 하회탈로 변한 얼굴을 확인하고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구류기간 두 번이나 면회 왔던 엄마는 한 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심적 상태 또한 짐작할 수 있었지만 출감 일이 다가올수록 불안했다.
출감한 날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갔을 때였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출근조차 하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다녀왔다고 고개 숙이는 순간 얼굴에 큰 충격이 느껴지면서 불이 번쩍했다. 철썩, 그렇게 몇 대를 맞았다. 나를 보는 순간 화가 폭발했던 모양이다. 엄마가 달려와 말렸을 때,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거실로 방향을 튼 후였다.
- 나쁜 놈, 빨갱이 짓 계속 할 거면, 이걸 우체통에 집어넣고 가라. 아버지는 내 앞에 밀봉된 편지봉투를 던져놓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보낼 곳은 아버지의 회사였다. 삼촌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던 아버지는, 자식에 의해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자식이 반정부투쟁을 하다가 구속되면 부모도 연대하여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공무원은 해임되었고, 사업자는 세무조사를 받았으며, 일반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은 해고될 위험에 처했다.
정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공공연히 협박했고, 그런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방에 벌어진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책들과 가방, 문구류, 시계와 액자들은 모두 종이상자에 담겨져 밀봉된 채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재떨이로 사용했던 저금통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아껴왔던 영화 '대부'의 포스터는, 벽에 남겨진 상흔으로 보아 산산이 찢겨 버려진 듯했다. 나는 그 벽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5.
지나고 보면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 극단의 적대와 적의.
부모와 자식이 자신들의 본심과 기대에 반하여 폭력적으로 맞부딪쳐야 하는 처절함. 대항하는 자들은 가장 악랄하게 앙갚음하겠다는 국가의 잔혹성.
결국 나는 아버지를 앞잡이 세운 저들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이겨내며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훗날이었다. 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날 밤이었다. 그날 일을 다시 꺼내는 당신의 눈자위는 붉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그 일이 가슴에 응어리져 참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자식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가 변사체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입도 벙긋 못한 채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불안함. 그 후 벌어질 삶에 대한 막막함. 삼촌처럼 심신이 무너진 자식을 뒷감당하며, 고통스럽게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할 것 같은 공포.
- 나는 그게 제일 무서웠다. 새삼 너희 할머니가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당신의 행위가 오랜 기간 마음에 걸렸다고 했을 때,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휴학계를 내러 학교에 갔을 때 누구도 마주치지 않으려 노심초사했다.
다음날 나는 광주로 내려갔다. 구류를 살던 동안 삼촌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병문안하지 못한 것에 대한 때늦은 문안인사였다.
그 사이 서울의 미문화원에는 73명의 대학생들이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내부로 진입했다. 그들은 '미국이 광주학살을 지원한 책임'을 묻고,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며, 4일 동안 농성을 벌인 후 전원 연행되었다. 명단에는 선배와 동기들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광주에 이어 부산으로, 그리고 강원대에서 성조기가 불태워진 후 다시 서울의 미문화원이 점거됨으로써, 미국은 자기네 놀이터에서조차 더 이상 신과 동격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두려움에 좌절하고 중압감에 도망쳐 대열에서 물러선 내게, 그 모든 것들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음이 소거된 TV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치열함이 사라진 젊음이란, 낮술에 취해 여름 오후 땡볕 속을 흐느적거리며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