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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조선시대 음란 여성의 상징처럼 알려진 인물이다. 왕실 종친인 남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첩이나 기생 또는 여종으로 행세하면서 남자들과 어울렸다. 어우동이 만난 남성들은 왕실 종친부터 시작해서 관료, 생원, 서리,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어우동의 행실이 왕실에까지 알려지면서 성종이 직접 사형을 명했다. 여자들의 음란과 방종이 이를 데 없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에서였다. 결국 어우동은 성종 11년 처형되었다.

어우동의 행실은 21세기 현실에서도 용납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죄가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유사한 사례로 세종 때 유감동이란 여성이 받은 벌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유감동 역시 양반 남편이 있었던 상태에서 수십 명의 남성과 간통을 했는데 곤장을 맞고 변방 관아의 여종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을 뿐이다.

법의 이중성 - 냉혹과 관대함의 차이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
▲ 겉그림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
ⓒ 너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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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낙화암 서서 많은 세월 지났네.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리.

어우동이 지은 시로 알려진 '부여회고(夫餘懷古)'란 시이다. 황진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류 시인도 아닌 어우동이 이런 시를 남겼다면 깜짝 놀랄 사람도 많다. 그만큼 우리의 의식 속에 남은 어우동은 음란하고 방탕했던 여성이 전부였다.

어우동 사건을 둘러싼 내막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우동의 처형은 시대적 산물이란 걸 알 수 있다. 어우동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근본 이유는 어우동 행실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남편이 기생을 사랑하면서 일방적으로 어우동을 내쳐버린 것이다. 어우동이 무수한 남성들과 스캔들을 벌인 건 집에서 쫓겨난 이후 상황이었다.

어우동 사건이 터지자 의금부에서는 간통죄가 장 100대 유 2000리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왕실의 종친을 남편으로 둔 양반가의 딸 어우동이 '종놈'과도 간통을 했다는 사실이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왕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어우동과 관계를 맺었던 남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죄가 애매하다거나, 간통이라는 오점 하나로 출세를 가로막는 것은 가혹하다며 무사히 사회로 귀환시켰다. 어우동에게는 서릿발 같은 냉혹한 법의 잣대를 적용했지만 그와 상대한 남성들에게 법은 관대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충효와 정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들, 오랜 세월 무덤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한글 편지와 일기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드러낸 여성들, 권력의 중심 또는 주변에 머물러 지냈던 왕실 여성들, 해어화 기생들, 학문의 깊이와 삶의 행복이 일치하지 않았던 여성들, 전쟁 속의 여성들….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을 주류 남성의 관점이 아닌 비주류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여성의 일생이나 활약상에 치중하기보다는 여성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을 살피고 해석하는데 치중했다.

조선시대 기록의 대부분이 남성들 중심이었고, 극히 일부 여성들이 남긴 기록조차도 조선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갔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여성들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의 역사는 조선시대를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스펙트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정해은/너머북스/2011.1/15,500원



태그:#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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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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