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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전이 열리는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입구
 '키스 해링'전이 열리는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입구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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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해링' 전이 그의 사망 20주년을 맞아 소마미술관에서 오는 9월 5일까지 열린다. 그의 판화 130여 점과 영상자료, 3점의 조각 등 총 150여 점이 소개된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아버지로부터 드로잉의 기초를 배웠다. 1976년 피츠버그칼리지 그래픽디자인과정에 입학했으나 상업미술가가 되는 걸 포기한다.

1978년 뉴욕명문 시각예술학교(SVA)에 다시 입학, 그러나 1980년에는 이마저 그만두고 거리로 나선다. 지하철, 클럽, 건물 벽을 캔버스로 삼아 작업한다. 공공기물 훼손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나 이런 방식으로 도시와 소통하며 그만의 아이콘을 만든다.

1981년 '클럽75' 전 이후 그는 독일 카셀 도큐멘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됐고 뉴욕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등에 초대받는다. 워홀과 바스키아를 비롯하여 동갑인 마돈나, 마이클 잭슨 그리고 오노 요코, 브룩 실즈 등 당대 스타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그러나 1990년 2월 16일 31살에 에이즈합병증으로 죽는다.

심각한 사회이슈를 단순명쾌한 그림으로

'남아프리카에게 자유를(Free South Africa)' Lithograph 102×81cm 1982
 '남아프리카에게 자유를(Free South Africa)' Lithograph 102×81cm 1982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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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에서 보듯 1982년 반핵운동을 시작으로 동성애와 에이즈, 문맹퇴치와 인종차별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의 정신이 그렇지만 그는 무거운 사회적 이슈가 담긴 주제를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채로 명쾌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커밍아웃하고 이 문제를 그의 작품주제 중 하나로 삼아 이를 형상화한다. 동시에 성적 소수자의 인권과 취향을 옹호하는 운동에도 앞장섰다.

하긴 이 문제도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다르다. 최근 시카고대학의 세계적 신학자 테드 제닝스(Ted Jennings)는 교회의 동성애 혐오는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려고 보통사람들의 성을 죄악시한 탓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권력 가진 자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힐 때 그걸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냉전시대 따뜻한 팝아트를 선보이다

'무제' 실크스크린 53×76cm 1989. '짝꿍(Best buddies)' 81×66cm 1990. '앤디 마우스(Andy Mouse)' 96×96cm 1986(중앙하단)
 '무제' 실크스크린 53×76cm 1989. '짝꿍(Best buddies)' 81×66cm 1990. '앤디 마우스(Andy Mouse)' 96×96cm 1986(중앙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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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이 주로 활동하던 80년대는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높았고 과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였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로 빈부차가 심해지고 노숙자가 늘고 마약, 범죄 등이 증가했다. 동시에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같은 곳에서는 힙합이나 낙서화 등 뒷골목문화도 성행했는데 키스 해링은 바로 이 구역에서 활동했다.

해링은 이런 냉전기에 밥처럼 따뜻한 팝아트로 사회분위기를 밝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최소한의 기호로 바뀐 귀여운 이미지의 아이콘을 만들어낸다. 그의 멘토인 앤디 워홀을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로 합성한 '앤디 마우스'를 봐도 그렇다.

그의 최고 장점은 천진난만한 동심

'곡예사(Acrobats)' enamel on aluminum 높이 122cm 1986. 아라리오갤러리소장
 '곡예사(Acrobats)' enamel on aluminum 높이 122cm 1986. 아라리오갤러리소장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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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풍은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관객을 유혹한다. 그의 아이콘에는 만화영화에서 봤던 여러 이미지들을 연상시켜 친근감을 준다.

해링은 만화처럼 그림을 빠르게 그렸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림을 조각으로 만들 때도 마치 대형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반복되는 선의 뒤엉킴은 감칠맛이 나고 사람들의 잠재된 동화 속 환상을 자극한다.

'현대판 이솝우화' 같은 그림

'개' Lithograph 114×90cm 1985. 릴랑가(Lilanga)작품(아래)
 '개' Lithograph 114×90cm 1985. 릴랑가(Lilanga)작품(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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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같은 개를 독창적으로 형상화한 위 작품은 유머와 위트로 넘친다. 마치 '현대판 이솝우화'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도 영감을 준 장 뒤뷔페(J. Dubuffet 1901~1985)나 릴랑가(Lilanga 1934~2005)와 같은 작가도 있었다.

작가의 메시지가 농축된 아이콘

'무제' 실크스크린 15×15cm 1987
 '무제' 실크스크린 15×15cm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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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상단에 자리 잡은 붉은 하트는 두 사람 간의 우정과 신뢰를 뜻하리라. 또한 하트에서 뻗어져 나오는 반짝이는 선들은 사랑이 뿜어내는 에너지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에서는 따사로운 인간애도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메시지를 혼합한 아이콘으로 독특한 이미지를 일궈낸다. 예컨대 생명을 찬양하는 임신부, 후광 받는 아기들, 짖는 개, 심장에 구멍을 내는 막대 총, 교신하는 비행접시와 피라미드 등이다. 이는 모든 걸 넘어 하나로 춤추게 하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미술관 벽 넘어 공공미술의 초석 놓다

키스 해링이 뉴욕 41가(街) 지하철에서 벽화 그리는 모습(가상설치) 1983
 키스 해링이 뉴욕 41가(街) 지하철에서 벽화 그리는 모습(가상설치) 1983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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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팝아트작가답게 "대중에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예술은 만인을 위한 것,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예술을 고집스레 추구하는 건 자기를 과시하는 허튼 수작일 뿐이다"라는 글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는 이렇게 고급문화인 예술과 대중문화인 미디어산업의 경계를 없애려 했다.

또한 그는 동시대 낙서화(graffiti)의 또 다른 거장인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와 함께 80년대 뉴욕지하철 광고판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다. 당시 광고나 간판글씨처럼 하위문화 취급을 받던 낙서를 당당한 미술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한다.

그렇게 그는 미술관 벽을 넘어 거리로 나선다. 개인적 감정도 공공적 공간에 표출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은 누구나 즐기며 소비할 수 있음을 알린다. 점차 이런 생각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뉴욕은 물론 베를린, 암스테르담, 런던, 동경, 파리, 보르도, 몽트뢰, 피사 등 세계도시로부터 초대받아 벽화작업을 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마지막 날인 듯 그리다

'종말(Apocalypse)' 연작 실크 스크린 96×96cm 1988
 '종말(Apocalypse)' 연작 실크 스크린 96×96cm 1988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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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보다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인다. 그가 에이즈 감염자였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그래서 죽음을 생명으로 코드 변경하거나 잉태의 환희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그가 임신부를 많이 그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기 2년 전 남긴 위 '종말' 연작에 바로 그걸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 네덜란드계 보수적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을 작품에 구현한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예술로 극복하려 했는지 모른다.

상업성을 뛰어넘은 탁월한 예술성

'무제' 실크 스크린 127×107cm 1983. 형광효과를 줌
 '무제' 실크 스크린 127×107cm 1983. 형광효과를 줌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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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파는 가게인 팝 숍(Pop Shop)을 1986년에 열어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그는 그런 범주를 넘는 풍부한 상상력과 높은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그는 작업을 통해 신화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키스 해링은 예술이란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은 더 멀리 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처럼 그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작업에 몰두하고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어느 날 혜성처럼 지구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은 사람들 가슴 속에 길이 오래 남을 것이다.

ⓒ 김형순

덧붙이는 글 |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 02)410-1343 www.somamuseum.org
-평일, 주말: 10:00-19:00 매주수요일: 10:00-21:00 휴관일 없음
-성인 대학생: 개인 12,000원 청소년(13-18세):10,000원 어린이(4-12세): 8,000원
*20명 이상일 단체일 경우는 2,000원씩 할인



태그:#키스해링, #바스키야, #팝아트, #낙서화(GRAFFITI), #공공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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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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