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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한명숙 후보의 선거 패배 책임을 둘러싸고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였던 한명숙 후보의 패배에 대한 책임 추궁이 패배 당사자인 민주당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정당인 진보신당과 노회찬 후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명숙 후보가 선거 직전의 각종 여론조사 결과 수치를 훨씬 상회하는 득표력을 보인 까닭에 선거에 패배한 정당과 당사자는 '면죄부'를 받고 진보신당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이다. 진보신당의 게시판에는 노회찬 후보의 완주를 질타하는 글이 쏟아졌고, 이태경씨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진보신당 지지자들을 향해 점잖게 '노회찬 후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볼 것'을 권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진보신당 지지자인 나로서는 개인의 정치적 입장과 선택을 존중하는, 이른바 '근대적 상식'을 강력히 옹호한다는 이들이 도대체 왜 다른 정당의 후보와 그 지지자들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훈수를 두려 하는지가 의아하다. 또한 <오마이뉴스> 지면에 실린 이태경씨의 인식과 주장 역시 여러 면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이 글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이태경씨의 글에 대한 나름의 비판과, 이른바 '진보신당 책임론'에 대한 반박을 하고자 한다.

이태경씨는 그의 글을 통해 '경제결정론'의 입장에서는 민주당(으로 통칭하도록 하겠다)과 한나라당의 차이가 거의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이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무시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진보신당과 그 지지자들을 '경제결정론자'로 몰아붙인 편견과 비약도 당황스럽지만 핵심적인 쟁점은 아니므로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어쨌든 그는 한국이 '식민통치, 외세에 의한 해방과 분단, 전쟁, 군사독재, 압축적·폭력적 산업화, 민주화'를 1세기만에 압축적으로 겪어 온 특수성을 지녔다고 판단한다. 그로 인해 '식민, 분단, 반민주, 자본 같은 요소들이 한국사회 안에 착종(錯綜)돼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태경씨는 대담한 비약을 감행한다.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직면한 고통의 핵심이 자본의 지배라는 판단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물리친 그는, 그 핵심이 바로 불공정 경쟁과 승자독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저 한국 사회가 '합리성/비합리성, 정상/비정상, 공정/불공정, 상식/몰상식, 주술/이성의 대립항 구조로 짜여 있다'는 자신의 판단을 강조할 뿐이다.

한국 사회가 겪는 고통의 핵심이 불공정 경쟁에 있다는 이태경씨의 판단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장 첨예하게 느끼는 고통은 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요인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고, 따라서 '한국 사회 및 그 구성원 일반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고통의 핵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판단이지만, 이것은 토론해 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작 의아한 것은 그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불공정 경쟁과 승자독식이 바로 한국 사회 고통의 핵심'이라는 지점까지 내달아 버렸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는 상식/몰상식의 간편한 구도로 한국 사회를 재편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아무런 설명 없이.

오늘날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행태가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몰상식과 비이성'이 정치적으로 유효한 비판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을 '상식'으로 상대방을 '몰상식'으로 규정하는 구도 자체가 더 이상의 논의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명박 대통령의 행태가 몰상식하다고 해서 한명숙씨와 유시민씨가 모든 유권자들에게 상식으로서 강요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한명숙씨와 유시민씨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상식'이라는 공동선을 해치는 일이 되는가. 이쯤 되면 이것은 '내 상식을 강요하는 몰상식'일 뿐이다.

대의민주제 사회에서 선거란, 투표란 무엇일까. 나는 투표 행위의 핵심이 승리 그 자체보다도 정치적 의사 표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권리를 대의민주제를 통해 위임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세력에게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그 실현을 도모하는 것이 선거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를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축제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를 싸움으로, 투표를 운동으로 보는 관점은 이러한 제도 정치행위로서의 투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투표를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으로 보는 이런 관점에서는 당연히 오직 승리만이 지상과제가 된다. 패배는 곧 몰상식과 비정상으로의 추락인데, 정치적 입장이니 의사표현이니 하는 말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그것이 누구의 상식이고, 왜 정상인지 물을 수조차 없다.

이번 선거에서 한명숙씨가 얻은 46.8%의 지지가 존중받아야 하는 만큼, 노회찬씨가 얻은 3.3%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은 오세훈 씨에게 쏟아진 강남 3구의 몰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기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에 투표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의 선택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이번 선거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패악질을 막기 위해 한명숙 후보와 민주당을 지지한 이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동시에 진보 정치 실현에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진보 정당을 지지한 나를 비롯한 이들의 선택 역시 존중받기를 희망한다. 좀 더 좋은 미래와 선택을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되 다른 이의 선택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대의민주제와 선거에 대한 나의 으뜸가는 '상식'이다.


태그:#진보신당, #노회찬,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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