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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논란이 주는 의미 

현재 한국사회는 낙태를 놓고 프로라이프 대 프로초이스라는 진영으로 나누어져 격렬히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국회에서 연이어 낙태에 대한 토론회, 모자보건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14조 개정안(인공임신중절 허용한계) '을 마련 중에 있는데, 낙태 허용 한계를 둘러싼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제도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그 기대만큼 성과 없이 계속 반복되는 주장 나열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 등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과 여부를 떠나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간 금기시되어온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서 낙태권이 공론의 장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토론은 한국 사회의 의식과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현행 낙태금지 규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으며, 낙태를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여성의 범죄 행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3.8 여성대회 결의문에 여성의 낙태단속강화·출산강요 반대에 따른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쟁취를 여성계가 한목소리로 포함한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높아진 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여성계를 비롯한 진보진영은 현재 진행중인 법에 대한 모든 논의가 기본적으로 국가나 그 어떤 규범체계의 개입 없이 자신의 몸을 통해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아이와 직접 관계 맺고 소통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낙태 허용의 조항으로 '사회경제적 사유'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 권력하에서 얼마만큼 낙태금지가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이라는 의식이 확산되고 낙태금지조항이 현실적으로 변경이 될지 회의적이다. 사실상 낙태 논쟁의 출발은 정부의 출산강제정책으로 인해서 발단이 되었다.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소위 출산파업으로 불리어지는 사태까지 치달은 상황에 대한 근본원인을 잘못 판단한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정부는 저출산 사태를 사회경제적 원인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해이로 판단하고 불법 낙태 근절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이러한 정부의 의지가 프로라이프 의사들이 동료의사를 고발하는 우스꽝스런 사태로 번졌다.  

필자는 프로라이프 의사회와 한국 정부의 낙태에 대한 윤리적 논쟁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낙태에 대하여 윤리적 기준을 들이댈 만한 자격이 있는지 반문을 하고 싶다. 한국의 근대 역사에서 낙태의 합법 여부를 결정한 것은 윤리적 토대라기보다는 부국을 위한 인구 증감 정책이었다. 사실상 정부와 산부인과 의사들은 과거 30년 동안 인구억제를 위한 (낙태를 포함한) 가족계획정책의 공공연한 협조자였다. 그런데 이들이 현재 낙태를 비윤리적으로 규탄하고, 이들의 협력관계가 또다시 여성들의 자기 신체에 대한 자율권을 억압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상 이러한 논쟁과 억압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전개된 것으로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서구에서의 출산정책과 더불어 낙태 관련 역사를 살펴보면서 여성 억압의 역사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들의 경험을 통하여 한국 인구정책의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출산정책은 낙태 정책과 함께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유럽사회는 출산장려정책을 1900년-1930년 사이에 시행하였는데 특히 1차 세계대전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많은 군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럽에 자리잡은 독재자들은 팽창주의의 야심을 갖고 있으므로 자국민의 수를 증대시키기를 원했다. 즉 전쟁을 치를 군인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이 당시의 인구규모는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유럽 국가들은 출산율 경쟁에 들어갔다.

이러한 출산경쟁은 2차세계 대전 기간까지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파쇼 정부들이었다. 무솔리니는 어머니의 위대함과 국가를 위한 그들의 역할을 칭송하면서 출산경쟁에 돌입하였다. "파시스트 여성들은 제국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군인들을 낳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1937)라는 무슬리니의 발언을 통해서도 당시의 여성 지위를 파악할 수 있다. 여성의 역할은 이탈리아의 종족 수호를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무솔리니 수상은 수백만 명의 인구 증가를 중기계획의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낙태는 국가적 범죄가 되었고, 산아 제한과 성교육은 금지되었으며 독신 여성은 특별세를 내야 했다. 여성들은 가난과 싸우며 아이들을 낳으라는 정권의 모순된 명령에 직면하여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여성들은 불법적인 낙태를 통해 출산을 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여성은 무솔리니 당의 경제체제를 위한 기반 역할도 강요받았다. 당시 무솔리니 당은 경제적 공황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는데, 무솔리니 당은 자급자족 경제를 통해 공황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 기반은 전통적인 가족 연대성에 의지해 저임금으로 야기하는 사회적 폭발을 막을 수 있었다.

독일 나치즘은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달리 생식이 아닌 인종재생을 통해 독일 대국을 만들려고 했다. 인종차별주의의 기반으로 여성들이 아이를 낳도록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종의 특질을 잃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은 것을 금지하고 민중의 어머니로 인정된 여성들만이 아이를 낳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치체제는 온전한 독일인의 출생율이 30% 증가하기를 바랐다. 나치의 출산정책은 노골적인 인종정책에 기반한 것으로, 즉 나치는 '바람직하지 않거나'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범주의 사람들에게는 성적 자유 및 출산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1월 1일 이후 인종 및 계급에 따른 강제 불임과 출산 제한은 제반 법령을 통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아리안족 부부들에게는 다산을 장려했고 아리안족 여성들의 산아 제한 권리를 폐지했다. 낙태는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나치는 초창기의 한 법령을 통해 남편이 직장을 가진 기혼여성의 경우 공직 취업을 금지하는 등 여성를 가정의 틀 안에 묶으려 했다. 잔인한 인종주의와 여성의 자율성 상실이라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소름이 돋는다. 

사회주의 루마니아의 낙태 금지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벌인 야만 중 하나였다. 루마니아가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가 늘어야 된다고 확신한 그는, 1966년 "배 속의 태아는 사회의 재산"이라고 선언한 후 낙태를 국가 안전을 해치는 범죄로 금지하였다. 이 강권적 조처로 출산율이 두 배로 증가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기다린 것은 차우셰스쿠의 전횡과 비리로 얼룩진 루마니아 사회의 비참한 삶뿐이었다. 이들 세대는 학업과 직업 전선 모두에서 이전 세대보다 뒤떨어졌고, 많은 수가 범죄자로 전락하였다.

이상과 같이 낙태금지 정책을 통한 출산 통제정책은 파쇼의 대표적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프랑스의 비시정부도 가족법을 강화하여 이혼을 제한하고 1942년부터 낙태는 사형에 처해져야 하는 반국가 범죄로 만들었다. 그래서 불법낙태 시술자를 단두대에서 처형을 시키기도 했다.

러시아의 경우도 좀 다른 경험을 겪게 되는데,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에 가족법이 공포되고 급진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법에서는 임신한 노동자에 대한 보호와 출산휴가가 보장되었다. 1920년에는 낙태를 자유롭게 결정하여 무료 시술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스탈린 체제하에서 러시아가 가족주의로 다시 전환됨으로써 1936년 신가족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서 낙태의 자유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합법화되었던 이혼의 절차가 까다로워지고 소송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대신 출산장려를 위해서 양육비가 높아지고 가족수당이 지급되었다.

동시에 다산자들에게 영광의 칭호를 부여하고 미혼모에게는 상당액의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며, 독신자나 아이 없는 부부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에 출산에 대한 규제가 느슨해졌다. 그래서 낙태가 다시 자유화되고 합의 이혼이 복원되었다. 러시아의 경험은 여성들의 낙태권, 출산권이 국가의 정치적 성격과 깊이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를 포함한 대다수 국가들은 베이비붐 현상으로 출산장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 전후의 회복기를 거쳐서 1960년대 후반부터는 고도경제성장과 함께 출산율도 본격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출산 시점을 연기했다. 그리고 이혼이 증가하고 동거비율이 증가했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는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1965년에 서구에서 여성 1명당 아이의 수는 2.5명에서 3.2명 사이였으나 1970년대에는 이미 북유럽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에서 대체수준을 밑도는 출산율을 경험하였다. 75년에는 출산율이 1.5명에서 2명 사이로 변했다. 서독에서는 출산율이 1.2명까지 떨어졌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출산율이 하락하여 93년에 경제위기와 가계위축으로 인해 다시 떨어졌고 97년 이후가 되어서야 출산력이 1.77명으로 증가했다(은기수 외 2005).

이러한 출산율의 감소에 개별 국가들은 일찍부터 나름대로의 대안을 마련해 왔고, 1980-90년대에 이르러서는 출산율이 국가 및 지역별로 달라지는 이른바 다양화 현상이 나타났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합계출산율의 분포를 보게 되면, 2004년 현재 스웨덴, 노르웨이 및 북유럽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국가들은 합계 출산율이 1.7-1.9 수준으로 대체수준에 거의 육박하고 있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게르만 국가들은 1.3-1.6 수준을 맴돌고 있어서 합계출산율의 중간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유럽국가들은 합계출산율이 초저출산이라고 일컬어지는 1.1-1.3수준으로 이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및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와 유사하다(김두섭, 2007).

흥미로운 것은 현재 초저출산을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저출산 현상이 급격히 전개되는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90년대 초까지 인구억제 정책을 정부가 주도해왔었다.

한국의 인구정책만을 살펴보아도 이를 알 수 있는데, 한국정부의 인구정책은 '가족계획사업'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사적 차원의 가족계획이 철저하게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간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구호의 변천을 보아도 가족계획사업의 목표가 인구억제에 있었음를 쉽게 알 수 있다.

가족계획사업은 초기 60년대에 산아제한의 불가피성과 당위성을 강조하는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기르자'로 시작해, '세살 터울로 세 자녀만 낳자'라는 세 자녀 갖기 운동단계를 거쳐, '덮어높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두 자녀 갖기 운동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는 표어를 중심으로 한 자녀 갖기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었다.

그런데 경제성장을 위해서 '잉여인구'를 줄이려던 1970년대 가족계획정책 시행 시에도 낙태죄 조항은 존재했으나 단속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한국은 가족계획이 가장 성공한 나라로 세계보건기구(WHO)에 기록되는 업적(?)을 달성했다.

그러더니 요즘은 출산을 장려하는 새로운 구호와 홍보 영상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는 출산 여부를 애국과 비애국으로 연결하려 하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의 원인을 성찰하지 못하고 산부인과 의사를 이용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여 낙태 시술 의사에 대한 고발사태라는 우스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저출산 위기라는 현실에서 반세기 전의 '출산제한' 망령이 '출산강제'의 모습으로 변천을 한 것이다. 그리고 독신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이런 국가의 정책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궁에 대한 식민지화라고 비판하고 있다.

낙태에 대한 규제와 출산율

그렇다면 유럽정부와 아시아 정부들이 시행하는 낙태에 대한 규제가 출산력에 영향을 미칠까. 폴란드의 사례는 출산력 증대를 위해서 낙태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출산력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폴란드는 90년에는 엄격한 규제, 95년에는 규제의 해제, 97년에는 다시 엄격한 법적 규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적 변화와 상관없이 폴란드의 출산율은 90년대에도 계속해서 감소해왔다. 스페인은 의학적 또는 사회적인 이유로 낙태가 허용되고 있고, 낙태율이 5.7%로 낮은 편이지만 출산율도 1.15%로 낮다. 반면, 노르웨이는 임신 13주 안에 본인의 요청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낙태율 15.6% 출산율 1.89%로 둘다 높다(이재경, 2005)는 조사결과가 있다. 따라서 낙태정책의 변화가 출산력의 실질적 증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여성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낙태 통제 등은 낙태를 음성적으로 행함으로써 여성생명의 위험성을 높이고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높일 뿐이다. 낙태 통제를 통한 출산정책은 여성들의 출산파업에 대한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낙태문제를 단순한 출산조절기술 이상의 여성의 재생산권과 관련된 쟁점이며 부모가 출산에 대해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의 형성이라는 점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우리 사회는 저출산을 설명하는 이론의 하나인 '페미니스트 패러독스'론을 주목해 야 한다고 생각한다.  쉐네 (1996)가 개발한 이 이론은 개발국가에서는 성평등 수준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게 나타나지만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에서는 반대로 성평등 수준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게 나타난다는 경향을 부르는 것이다.

맥도날드(2000)는 선진산업 사회에서 저출산 현상은 개인지향적 제도(individual -oriented institution)의 성평등수준은 높은 데 비해 가족지향적 제도(family -oriented instituion)의 성평등 수준은 낮은데서 기인한다. 저출산 현상 분석은 성평등 수준 및 공사 영역에서 성별분업 해체와 연관지어 분석해야 할 것이다 (최은영, 2007).

이런 이론을 증명하는 사례로 스웨덴의 30년대 인구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의 인구정책도 다른 유럽국가와 같이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2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스웨덴은 다른 유럽국가와 다르게 대응했다. 스웨덴은 자국 인구정책을 알바 뮈르달과 경제학자인 그녀의 남편 군나르 뮈르달에게 맡겼다.

군나르 부부는 여성들에게 아이들을 책임지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하면서 공동체가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알바 뮈르달은 출산율 저하에 대해 독창적인 방법으로 대처했다. 즉 여성에게 아이를 낳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아이를 원치 않으면 낳지 말도록, 그리고 아이를 원한다면 양육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사빈 보지오 등, 2007). 

스웨덴 인구정책의 선구자
▲ 알바 뮈르달 스웨덴 인구정책의 선구자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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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뮈르달은 낙태에 대해서도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녀와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은 출산력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낙태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일률적으로 낙태율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구문제가 증대되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태불법으로 인한 여성의 생명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에 경계를 했다. 낙태의 주 동기는 이기심보다는 심각한 경제적 압박 때문이라는 가정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낙태보다는 모성을 선택할 것이라는 관점을 촉진시켰다. 그들이 낙태를 선택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성애의 욕구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성의 욕구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결국 1930년대 인구위기는 스웨덴에서 복지국가가 시작되게끔 한 야심적인 사회정책들을 성립시키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구위기는 여성을 목표로 하고 또한 다소 정도는 낮지만 개혁의 주체로 정치생활의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매우 새로운 정책의 장을 여는 역할을 하였다(복지국가와 여성정책, 2000). 

인구를 숫자로 보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여러 쟁점들이 제기되었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쟁점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노동권)과 성적 자율권(여성권)의 관계였다. 이 둘의 관계를 풀지 않는다면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소외시키는 것이며 사회의 질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한국의 인구 정책이 빨리 숫자라는 방정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과 관련한 가치관의 변화와 일과 가정 양립이 현실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없이는 인구 문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유럽의 정책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인구정책도 여성의 평등권과 노동권 확대와 함께 여성의 성적 자율성을 확장하는 기초 위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인구가 경제의 하부단위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주체 단위로 인식되어야  한다. 즉 인구의 숫자가 아니라 인구 내부의 질적인 관계를 우선시하는 정책, 제도들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김두섭, 2007, 『저출산 사회의 결혼, 자녀양육과 가족생활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재경, 2005, 『저출산의 젠더분석과 정책 대안연구』,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
이재경 외 2005, "유럽의 저출산 관련 정책에 대한 여성주의적 분석", 『한국여성학』
유은주 외 2007, "프랑스의 친출산정책에 대한 페미니스트 집단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사회복지학회
최은영, 2007, "한국사회의 저출산 원인",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사빈 보지오 발라시 외, 2007, 『저속과 과속의 페미니즘』, 부키
테레사 클라빅 외, 2000,『복지국가와 여성정책 』, 새물결


태그:#낙태, #저출산, #페미니즘 , #인구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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