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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최고의 책>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전문가와 시민기자, 누리꾼 패널들이 뽑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 그리고 누리꾼 투표 등을 거쳐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10권을 선정해 최종 결과를 5월중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서평 기사를 공모해 좋은 기사로 선정된 경우 소정의 특별원고료(사이버머니)를 지급합니다. [편집자말]
최호철 선생님을 알게 된 건, 3년 전 <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잡지를 통해서였다. 우연히 만난 <고래로 그랬어>에서 만화 <태일이>를 만난 건 참 행운이었다.

사실 나는 전태일을 운운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에(난 80년생이다), 앞으로 더 멀어지기만 할 지난 역사들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그런 면에서 <태일이>는 아이들이 충분히 재밌게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아 책을 다 구입했을 정도로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다. 그때 나는 최호철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온라인 서점에서 낯익은 그림체를 발견했다. 수만 가지의 살아 있는 표정의 사람들, '어, 이 다양하고도 익숙한 표정들!' 하면서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림만큼이나 익숙한 작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에 서점에 달려가 묵직한 책을 한 권 샀다. <을지로 순환선>이라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단 한 장의 그림, 을지로 순환선

책 속에는 수만 가지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러니 성급하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마라.
▲ 을지로 순환선 책 속에는 수만 가지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러니 성급하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마라.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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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은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헉, 소리가 나온다. 그냥 슬쩍 보면 오밀조밀하게 그려놓은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사진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그 어느 공간도 소홀하게 넘어가는 일 없이 디테일하게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만화책처럼 손가락에 침 묻혀가며 빠른 속도로 다음 장을 넘길 수 없게 되어 있다.

빽빽하게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느라 침을 묻힌 검지손가락만 노심초사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라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와 성급한 내 손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단 한 장의 그림을 10분 동안이나 쳐다본 적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인, 표지 이미지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림 '을지로 순환선'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림의 주무대는 을지로 순환선 전철 안이다. 앉을 자리는 없지만, 그다지 붐비지 않는 오후의 2호선 안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전철 안을 들여다보자.

누추한 옷차림의 옆 사람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아줌마, 성경책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포교활동을 하는 아저씨, 그 아저씨를 흥미롭게 쳐다보는 아이, 열공 중인 남학생, 조금 더 먼 칸에는 한 여자아이의 볼을 쓰다듬어주는 할머니, 손잡이대에 얼굴을 얹어놓고 자는 아저씨, 조금 더 멀리엔 외국인 노동자도 보인다. 왼쪽 차장 밖으로는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려 청소하는 인부들과 그 건물 안에서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조금만 더 자세히 건물 안을 들여다보면, 그 인부 중 하나는 창문에 매달려 담배를 태우는위태롭고도 짜릿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건물 안에 사람들은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또 수만 가지의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 풍경, 집집마다 들어찬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까지 다 보인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최호철이라는 사람에게 인간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나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이 한 장소를 도대체 몇 번을 갔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 한 번에 그릴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가 퐁퐁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한줄 카피는 진실이다.

"한 장의 그림에 거대한 장편 서사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한다면...

다채로운 직업, 다채로운 나이, 다채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그림을 통해 만나지만, 사실 그 한 장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 옆 동료의 얼굴이자, 내 가족,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이라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림에 푹 빠져서, 그 그림이 내게 선물하는 따뜻한 순간을 공유하고 있노라면, 문득 아주 어릴 적에 눈이 빠져라 탐독했던 <월리를 찾아라>가 떠오르기도 했다. 단 한 명의 진짜 월리를 찾기 위해 수백 명의 가짜 월리의 삶을 훑고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 날은 진짜 월리 찾는 것도 있고, 가짜 월리의 재미난 삶에 키득거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세밀하고 따뜻하게 세상을 관찰해 그림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간 한 남자가 있다. 삶이 무료하고 건조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책을 추천한다.

당신의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이 책에서 얼마나 특별하게 펼쳐지고 있는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침 묻혀 놓은 검지손가락을 사용할 순간을 몇 번이나 놓치면서 단 한 장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할 것을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글. 니콜키드박


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거북이북스(2008)


태그:#내인생의책, #최호철, #을지로순환선, #태일이, #박진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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