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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앉아 있는 까치가 설날을 기다린다.
 텃밭에 앉아 있는 까치가 설날을 기다린다.
ⓒ 이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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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명절' 설날이 다가왔다. 올해 설날은 밸런타인데이와 겹쳐 '설렌타인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있지만 '설렘'은커녕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이 있다.

설날 연휴에 방구석에 들어앉아 있으면 부모님은 "옆집 철수는 대기업 취직했다더라. 그냥 그렇다구"라는 말로 새해 '덕담'을 건네고 친척들은 "너 빨리 취직해야 이런 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지. 언제 그럴래?"라며 가슴을 후벼파기 일쑤다.

또 평소에는 그렇게도 귀엽던 조카들이 명절 때만 되면 악마처럼 보인다. "세뱃돈 주세요"라며 고사리손을 내미는데 텅 빈 지갑을 바라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도 한다. 심지어 3일 동안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설날 세배로 하루 만에 받는 조카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야말로 백수들에게 설날은 명절이 아닌 '웬수'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2년째 취업을 준비 중인 배미희(26)씨. 백수 기간이 길어지자 취업 여부를 묻는 친척들이 부쩍 많아져 명절은 그에게 1년 중 가장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배씨는 "친척들이 직장 구했느냐고 물어볼까봐 얼른 차례를 지내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러 가게 된다"고 말했다.

배씨는 이미 '절친'에게 SOS를 요청한 상태. 배씨에게 '만약 친구가 사정이 생겨 약속이 깨지면 어떡하냐'고 질문하자 그는 "그건 정말 완벽한 배신"이라면서도 "커피숍에서 책 보며 공부하면 된다"고 개의치 않아 했다.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 중인 이영환(가명·29)씨는 올해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작정이다. 꼭 취직해서 부모님을 호강시켜주겠다던 다짐의 '공소시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에게 설날은 365일 중의 하루일 뿐이지만 왠지 자식 없이 차례를 지낼 부모님을 생각하면 속이 쓰려온다. 오곡빛깔의 맛난 음식은 그림의 떡이다. 그는 "고시촌에서 보내는데 설날이라고 별 수 있느냐, 역시나 컵라면"이라고 말하며 씁쓸해했다.

사범대를 졸업한 이민하(29)씨는 임용고사에 4차례 낙방했다. 그는 서른을 앞두고 다른 일을 찾고자 해외유학을 준비 중이다. 유학준비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설날에 친척들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다시 가슴이 갑갑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석에 만난 친척들은 "취직도 어렵다는데 애쓰지 말고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이나 가라"고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느낌은 '무시와 조롱'이었다. 그는 이번 설날에 혹시 친척들이 "'취직이 안 되는데 해외유학 다녀온다고 달라지니? 괜히 엄한 데 돈 쓰지 말라'고 할까봐 신경이 쓰인다"고 전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내 인생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마치 끝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정말 짜증난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다! 관심과 참견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달라!"

백수들의 취업 스트레스는 명절이 되면 절정에 이른다. 특히 평소에도 민감했던 얘기들은 명절 때 더 큰 상처가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백수에게 명절은 정말 피하고 싶은 날이다. 아예 밖으로 나가버리면 속이 편하지만 친척을 잘못 만나면 "밖에서 할 일도 없는 애가 집에 붙어 있지도 않는다"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정말 서럽고 또 서러운 날이 '명절'이다.

'한 번 백수'가 '영원한 백수'는 아니다!

400만 백수시대. 그들에게 설날이 구직 준비로 숨가쁜 일상의 '쉼표'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해답을 전국백수연대에서 찾았다. 전국백수연대는 백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날인 명절 때마다 백수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고 있다.

전국백수연대 회원들은 "스스로 백수임을 인정할 때 백수도 '명절특수'를 누릴 수 있다, 집안 일을 열심히 도와드려 효자·효녀라는 이미지를 부모님께 각인시키자, 대형마트에서 설맞이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면 한 달 동안 집에 손 벌리지 않아도 된다" 등의 '내공이 담긴' 비법들을 전수했다. 이들은 특히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설날을 맞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백수 여러분! 사랑합니다♥
 백수 여러분! 사랑합니다♥
ⓒ 고혜성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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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한 전국백수연대 대표는 백수의 세계에도 '하수'와 '고수'가 있다고 전했다.

"설날에 집에 있지 않거나 방에 콕 박혀있는 백수는 내공이 약한 하수"이며 "조카들을 데리고 나가 종일 놀아주는 백수는 내공이 강한 고수"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주 대표는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게 함께 어울리는 것"이라며 "어른들 눈길도 피할 수 있고, 칭찬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백수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이번 설날에 꼭 부모님을 찾아뵐 것'을 당부했다. 주 대표는 "백수를 '하는 일이 없는 사람'으로 정의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봐주는 주변의 시선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솔직히 눈치를 안 볼 수 없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설날에 꼭 부모님을 찾아뵙고 가족과 함께 음식을 장만하며 시간을 보내세요. 지금은 백수이지만 당신은 언젠가 꼭 취업을 할 것이라 믿고 있지 않습니까? 취업을 못했다고 해서 졸업사진을 찍지 않고 졸업식에 불참하면 언젠가 후회하게 됩니다. 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세요. 당신의 축 처진 어깨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처럼 '한 번 백수'가 '영원한 백수'는 아닙니다."

덧붙이는 글 | 손일수 기자는 오마이뉴스 11기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백수, #설날,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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