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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루손 중북부 산악지대를 방문했던 한 다큐멘터리 촬영 팀은 바나우에(Banaue) 일대에 펼쳐진 계단식 논(Rice Terrace, 라이스테라스)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준다.

 

'천상의 녹색계단'.

 

플라스틱 봉지에 담아주는 콜라보다 털모자가 더 잘나가는 이 동네에선 새벽녘이면 입에서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입김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머털도사가 구름 위에 우뚝 솟은 곳에 집을 짓고 스승님과 살아가듯이, 이푸가오(Ifugao) 사람들은 구름 위에 투명한 녹색빛깔을 만들어내며 3천년간 그 곳을 지켜왔다.

 

한 병에 5천원씩(필리핀 어느 가게에서)이나 하는 소주 한 병을 마음 먹고 마시는 어느 날, 아는 형님은 익살스럽게 내게 그런 말을 건넸다.

 

"(계단식 논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돈다며. 이푸가오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걸 다 만들었겠어. 외계인이 만들었다니까, 외계인이!"

 

그런가? 소주 한 병에 취해, 그리고 할 일 없는 외계인이 만들어 놓은 녹색계단에 취해 어느덧 그 곳을 다섯 번이나 찾은 어떤 이가 여기 있다.

 

 

싱글벙글 할머니의 동전주머니는 짤랑거렸다

 

세달 전쯤인가. 심술맞은 길 탓에 요동치는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며 지프니(Jeepney) 안에서 나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바기오에서 놀러왔다는 어학연수생들은 그 요란한 길에 적응하지 못하고 녹초가 되어가는데, 할머니는 왜 이리 싱글벙글이신지. 내 멋대로 구사하는 영어가 주책맞게도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시데?"

"손주 보러가는 게 재미나지."

"아니, 집이 어디시간디요?"

"나는 본톡이라는데 사는데, 우리 손주는 바나우에 근처에 살거든. 1년 만에 보는거여. 이젠 제법 컸다고 돈이라는게 뭔 줄 안다네. 그래서 용돈 줄라고 동전을 한 움큼이나 바꿨다니까."

 

단어를 신나게 나열한 대화를 내 마음 속 한 켠에서 정리하며 듣다보니 자못 신이 났다. 할머니의 기분 좋은 설렘이 나를 전염시켜 놓은 탓이었다.

 

"손주가 할머니를 기억하나?"

"기억하고 말고. 보고 싶다고 해서 가는 건디!"

 

할머니가 내릴 무렵, 조그마한 마을 초입에서 손주는 엄마와 함께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짤랑짤랑' 동전 소리 내며 내리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오랜만에 본 할머니가 낯설었는지 쭈삣거리면서 한 움큼 미소를 머금은 손주의 얼굴에서 나는 여행을 설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설렘은 불현듯 나를 감염시킨 뒤였다.

 

 

원주민 할머니가 보여준 놀라운 반전드라마

 

바나우에 근처에는 보기 좋은 곳을 '뷰 포인트(View Point)'라 부르며,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곤 한다. 그 곳에 가면 이빨도 성치않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할머니들이 이푸가오 사람들의 오래된 옷을 입고 여행온 이들을 맞이한다.

 

"사진 한 장 찍을까?"

 

해맑은 표정의 할머니들은 카메라를 매고 있는 여행객을 보면 곧잘 이런 말을 건넨다. 이런 요청을 누가 마다하랴, 절경을 본 만족감에, 원주민과 사진을 찍어본다는 포만감에 여행객들은 싱글벙글한다. 그 때, 불현듯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돈 좀 주세요."

 

'플리즈'가 들어간 나즈막하면서도 강한 어조의 한 마디, 깊게 패인 주름 속에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바뀐 할머니들에게 여행객들은 돈을 쥐어주곤 한다. 여행으로 만난 사람들, 그 속에서 만들어진 관계. 할 일 없는 외계인은 이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부분이 분명 틀어졌다.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도 서러워한다는 이푸가오 사람들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스페인이 미국이 그리고 일본이 총칼을 앞세우고 들어와서 잘 나갈때도, 이푸가오 사람들에겐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갔다던데. 돈이라는 놈이 사람들을 굴복시킨 것일까?

 

배우러 가고, 쉬러가고, 정리하고, 만나고… 일련의 행위를 해낼 때에 여행이라는 건 무릇 설레야 할 텐데, 그리고 그 여행하는 이가 어느 곳을 찾았을 때 그를 맞는 사람들 역시 설렘을 간직해야 할 텐데.

 

이곳은 세계 8대 불가사의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불리고 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틀어져 있었다. 싱글벙글 할머니의 설렘을 간직하며, 나를 매혹시킨 '천상의 녹색계단'을 지켜보고 싶단 작은 바람 아래, 나는 엉뚱한 일에 뛰어들게 된다.

 

나는 왜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려 하는가?

필리핀 루손 중북부의 이푸가오 지역에 산들과 밭들이 너무 좋아져버려, 계속 다니다보니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이 곳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사라져가는 광경을 보면서 이 곳을 지키는데 조그마한 힘을 보태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공정함'이라는 말을 차용해 이 곳에 문화유산인 계단식 논을 복원해보는 신명나는 놀이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관련 내용은 아시안브릿지 홈페이지(www.asianbridge.asia) 혹은 블로그(http://blog.daum.net/fair)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공정여행, #바나우에, #계단식 논, #라이스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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