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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凍死者)가 얼어 죽을 때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

대구에 살고 있는 김순례(73) 할머니는 겨울이 반갑지 않다. 이제 익숙해지련도 하건만 도무지 추위에는 자신이 없다. 방 안을 맴도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는 비와 눈이 오면 더욱 진해진다.

할머니의 겨울나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 두터워보이지 않는 옷 몇 벌과 항상 머리와 얼굴을 동여매는 보자기 한 장, 그리고 옆집 새댁이 이사를 간다며 전해준 전기장판이 전부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는 전기장판을 틀어도 괜찮으련만 할머니는 고개를 내젓는다.

"추워도 참아야제…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힘든데 애꿎게 전기세는…."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김순례 할머니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지 않다. 할머니에게는 아들과 딸이 각각 1명씩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젊은 날에 가출을 해서 돌아오지 않았고, 딸은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할머니와 연락은 전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할머니의 경우에는 자녀가 있고 또 부양자의 소득이 일정 수준이 넘기 때문에 '기초노령연금'을 받을 수가 없다.

길가에서 팔고 있는 과일도 추위에 떨고 있다.
▲ 겨울 길가에서 팔고 있는 과일도 추위에 떨고 있다.
ⓒ 손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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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자리도 없이 포대기 한 장에 앉아 하루를 보낸다.
▲ 겨울 변변한 자리도 없이 포대기 한 장에 앉아 하루를 보낸다.
ⓒ 손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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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례 할머니의 생계수단은 시장 길가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것이다. 시골에서 과일농사를 하는 고향친구가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알고 과일을 보내준다고 한다. 오늘은 유달리 겨울바람이 매섭다. 할머니는 얼굴에 동여맨 보자기를 연신 매만진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도 하루에 버는 돈은 만 원 남짓. 더욱이 겨울에는 손님이 없는 편이다. 날이 추워질수록 사람들은 대형마트를 찾고 시장에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찬바람을 맞아가며 장을 보는 사람들은 예전처럼 흔하지 않다. 사람들이 따뜻한 곳을 향해갈 때, 할머니는 보자기 한 장에 의지한 채, 길가에서 하루를 보낸다.

대형마트에 진열된 과일의 모습
▲ 과일 대형마트에 진열된 과일의 모습
ⓒ 손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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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어온 세찬 바람에 흩어진 과일을 정리하는 할머니
▲ 겨울 갑자기 불어온 세찬 바람에 흩어진 과일을 정리하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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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김순례 할머니는 과일로 점심을 대신한다. 길가에 꺼내놓은 과일들 중에서 가장 못난 것을 골라 한입 베어문다.

점심 한나절이 지나서야 첫번째 손님이 과일을 찾는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조금 힘을 내는지 가격을 제하고도 자꾸만 비닐봉지에 과일을 넣는다. 고맙다며 활짝 웃는 할머니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한편으로는 과일을 너무 많이 담아준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시장인심이란 게 별 거 있나… 다 그런게지… 팔아주는 게 어딘데… 고맙제…
과일 사러 오는 새댁들 보면… 서울 사는 딸애가 생각나 가지고… 잘 지내나 모르것네…."

한동안 다시 손님이 없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혹시 물건을 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사람들의 눈을 살핀다.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하게도 옷깃을 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하기에 바쁘다. 온종일 손님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추위에 떨었을 과일들에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는다.

감 한 조각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 할아버지
▲ 겨울 감 한 조각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 할아버지
ⓒ 손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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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찾아온 손님이 그저 반갑고 고맙다.
▲ 겨울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 그저 반갑고 고맙다.
ⓒ 손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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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한 두 명의 손님이 과일을 사가지만 오늘은 영 장사가 잘 되지 않는가 보다. 평소보다 일찍 과일을 거둬들이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파르르 떨고 있다. 허리를 굽히고 과일을 정리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무감각해진 피곤기가 흐른다.

할머니는 "학생이 괜히 고생했네" 하며, 비닐봉지에 과일을 한움큼 넣는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할머니는 자꾸만 과일을 넣는다.

"할머니, 오늘은 꼭 전기장판 틀고 주무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에는 겨울의 시린 바람보다도 더 차가운 인생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에게는 하루였지만, 긴 겨울을 추위와 함께 보내야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겨울은 도무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기초노령연금 : 우리나라 65세이상 전체 노인의 70%(2009년)에게 매월 일정액의 연금을 주는 제도이다. 기초노령연금은 65세 이상 전체 노인 중 소득과 재산이 적은 70%('09년)의 어르신에게 지급하며, 2009년도에는 전체 509만명 중 356만명이 해당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연금액은 국민연금가입자의 연금수급전 3년간 평균소득월액(A값)의 5%기준으로 책정된다. 2009년 4월 1일부터 2010년 3월 31일 까지 단독수급자 매월 최고 8만8000원, 부부수급자 매월 최고 14만800원(노인단독연금액에서 20% 감하여 지급)이다. 다만, 수급자중에서도 일부 소득이 높거나 재산이 많은 경우 감액된 연금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빈곤층은 꾸준히 늘고 있다. 김순례 할머니도 '기초노령연금' 대상자가 아니다.



태그:#겨울, #시장, #할머니, #슬픔이 기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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