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이름은 김삼순>의 한 장면. 극중 주인공 김삼순은 개명하려고 시도를 하다가 남자 친구의 방해로 이름을 고치지 못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한 장면. 극중 주인공 김삼순은 개명하려고 시도를 하다가 남자 친구의 방해로 이름을 고치지 못한다.
ⓒ MBC

관련사진보기


김. 귀. 자
金 貴 子

나의 닉네임은 '귀한자식'이다. 웃는다. 다들 키득키득 거린다. 안 봐도 뻔하다. 자기 입으로 '귀한자식'이라는데, 안 웃고 가만히 있을 사람 별로 없다.

오히려 놀라는 건 내 진짜 이름이 '귀자'라는 걸 알고 나서다. 눈 동그랗게 뜨고, 꼭 다시 물어본다.

"아니 정말, 진짜 이름이 귀자예요?"

그렇다. 내 진짜 이름은 김귀자다. 귀할 귀, 아들 자, 이름 그대로 '귀한자식'이라는 뜻이다. 나도 안다. 내 이름이 그다지 예쁘지 않다는 걸. 오히려 옛 향기가 나며, 독특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이미 눈치 채시겠지만, 내 다음 타자로 '아들'을 바라고 지은 이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5남매의 마지막을 장식했고, 덕분에 많은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한창 '미리내, 가람이' 같은 예쁜 한글이름이 유행하던 때, 자주 이런 얘기를 듣곤 했다. "와, 신기하다. 우리 이모랑 이름이 똑같아요." 헐~ 부모님 또래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름인 것도 모자라, '귀남이, 귀똥이, 귀신' 뭐 이런 별명이 초등학교 시절 내내 따라다녔다.

나도 정말 '귀남'이란 내 이름 때문에. 나도 보람이, 미미, 은선이, 뭐 이런 예쁘고 정감 가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데, 그럴 자격 충분한데, 고작 이름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불공평했다.

'이름' 바꿀 수 있는 운명의 시간... 내 선택은?

결국 운명의 순간이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까무라칠 정도로 반가운 소식을 알려줬다.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이름을 바꿔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단다.

아, 드디어 내게도 빛이 오는구나. 부모님도 흔쾌히 동의하셨고, 엄마는 '명선이', 언니는 '흰', 나는 '지원이' 등등 바꿀 이름까지 후보로 쫙 세워 골라뒀다. 그런데 막상 바꾸려고 하는 순간, '김귀자'라는 이름을 버린다는 게 너무 아까워졌다. 촌스럽던 내 이름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았다. 이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왠지 내가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름에 일종의 사명감까지 느껴졌다. 그 결과, 지금까지 나는 '김귀자'로 살고 있다.

이 이름이 내 꿈까지 정해주기도 했는데(끝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게 바로 '기자'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어이, 김귀자 기자'라고 놀려댔고, 나도 이에 화답하느라 친구들의 연애담이나 치부를 캐내어 황색저널리즘을 만들어내곤 했다.

수 년 동안 '김귀자 기자'라 불리는 것에 익숙해졌고, 예상치 못하게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게 됐다. 그러다 졸업 즈음엔 우연히 한 인터넷 언론사에 들어가서 인턴을 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OOOOO 김귀자 기자입니다~"

SBS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의 한 장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이 하나같이 특이하다. 한심한, 이기적, 나화신 등등..
 SBS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의 한 장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이 하나같이 특이하다. 한심한, 이기적, 나화신 등등..
ⓒ SBS

관련사진보기


인턴기자로 지내는 동안, 이름 덕분에 재밌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취재요청을 위해 외부에 전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녕하세요, OOOOO 김귀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꼭 이렇게 되물어온다.

"아, 김 기자님~ 그런데 기자님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예, 제 이름이 '김귀자'입니다"라고 하면 또 "아니, 김 기자인 줄은 아는데, 진짜 이름이 뭐냐구요!" 가끔 이렇게 거칠게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이렇게 또박또박 인사를 했더랬다.

"안녕하세요, OOOOO 김귀자 기자입니다."

초등학교 개명 사건 이후, 누가 놀리든 말든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전혀 없어졌다. 오히려 '귀한자식'처럼 하나씩 의미를 부여해가기 시작했다. '귀자'의 영문이니셜 'KJ'가 '국제'의 영문이니셜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글로벌한 인재로 규정짓기도 했다.

신기한 건 내가 내 이름을 좋아하니 남들도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더라는 거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름 독특하다며, 심지어 이쁘다며 활짝 반응해 주고 있다. 전에는 나를 괴롭히던 내 이름이 이제는 '나를 귀하게 만들어 주는' 이름이 되었다. 귀한자식 김귀자. 심심할 때마다 신이 내게 준 의미를 하나씩 찾아볼 생각이다.


태그:#이름, #에피소드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