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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수산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도매상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31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수산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도매상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 선대식

2008년의 마지막 새벽, 언론의 카메라는 서울 여의도를 향했다. 방송법 등 주요쟁점 법안이 상정될 국회 본회의장을 두고 여야 의원들의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시각, 국회 밖 세상에서 서민들은 경제 위기와 강추위 속에서 삶의 고단함과 정치에 대한 절망감에 맞선 채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이날 새벽 3시 대한민국의 아침을 여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으로 향했다.

가락시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2008년의 마지막 새벽을 맞는 서민들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택시기사 서인철(가명·63)씨는 말한다.

"LPG값이 휘발유보다 비싸졌고, 9만9000원 하는 사납금 내기도 벅차다. (한 달에) 100만원도 벌기 힘들다. 40년 동안 택시기사를 했는데, 요즘이 제일 힘들다. 택시 손님 열에 아홉은 힘들다고 한다. 더 암울한 건 내년엔 더 어렵다는 거다. 정치인들? 멱살 잡고 싸우는 거 말고 뭘 하나? 이젠 짜증내기도 귀찮다."

치열한 삶터, 가락시장에 드리워진 불황의 그림자

불황의 그림자 짙은 가락시장 31일 새벽 찾은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수산시장은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
불황의 그림자 짙은 가락시장31일 새벽 찾은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수산시장은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 ⓒ 선대식
새벽 3시 30분, 가락시장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치열한 삶터였다. 가락시장 인근 도로엔 농수산물을 싣고 전국에서 올라온 트럭들이 '차산차해'를 이뤘다. 가락시장 안에는 트럭과 함께 짐을 옮기는 지게차·오토바이·손수레로 가득 차 더욱 복잡했다.

가락시장 수산시장에서는 방어 경매가 한창이었다. 중개인이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힘든 말로 몇 차례 중얼거리자 경매는 이내 끝났다. 방어는 어찌나 힘이 좋은지 한 번 몸을 뒤집자 바구니 밖 3~4m까지 물이 튈 정도였다.

상인들도 방어만큼이나 바삐 움직였다. 사람들은 분주히 수산물을 날랐다. 경매로 수산물을 산 중간도매상들은 좌판을 펼쳐놓고 손님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머리엔 모자·스카프 등을 두르고, 신발은 털장화를 싣고는 난로 옆에 바싹 붙어 생선 손질을 하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고등어 배를 가르고 있던 김진숙(가명·51)씨의 표정엔 노곤함이 묻어났다. 전날 밤 10시에 나왔다는 그는 "자정에 경매 물건을 매입해서 팔고 있는데, 사는 사람이 없다"며 "기름값 탓에 생선 가격이 30% 이상 뛰어 매출이 1/3 줄었는데, 낮 12시까지 얼마나 팔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전했다.

다른 상인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한 40대 중간도매 상인은 "예전엔 서울시내에서 노점상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며 "매출이 크게 떨어져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동두천의 한 재래시장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최인자(가명·43)씨가 기자를 만났을 때는 2시간 넘게 수산시장을 돌아다닌 후였다. 최씨는 "마땅한 가격대의 생선을 구하지 못했다, 작년에 비해 생선 값이 많게는 100%, 보통 50~60% 올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가 이날 고른 동태 한 짝(20~30마리)은 4만5000원. 작년에 비해 1만원이나 올랐다. 최씨는 "인근의 많은 식당이 폐업하고, 소비가 줄어들면서 싸게 팔아도 사는 사람이 없다"고 전했다. 하루에 3~4시간 잔다는 그는 "피곤하다"며 10분간의 인터뷰를 서둘러 마쳤다.

"이명박 대통령, 가락시장에서 서민경제 얘기만 말고, 실천해 달라"

 31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수산시장에서 만난 꽃게 도매상인 봉승근(61)씨는 "먹고살기 너무 어렵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말로만 서민을 살린다고 하지 말고 직접 실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31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수산시장에서 만난 꽃게 도매상인 봉승근(61)씨는 "먹고살기 너무 어렵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말로만 서민을 살린다고 하지 말고 직접 실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선대식
수산시장에서 잡화를 팔고 있는 이영희(가명·51)씨는 지난 10년 동안 수산시장의 침체를 지켜봐왔다. 이씨는 "작년에만 해도 대단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 좁은 통로를 지나가기 힘들 정도였지만, 10년간 이렇게 썰렁한 건 처음"이라며 씁쓸해했다. 옆에 한 도매상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새벽 5시 수산시장 한쪽에서 꽃게 도매상을 하고 있는 봉승근(61)씨는 멍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수산물이 널려있는 인근 가게의 좌판과는 달리, 그 앞엔 잘게 부슨 얼음만이 가득했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한숨부터 내쉬었다.

"장사가 전혀 안 된다. 힘들다. 작년에 비해 매출이 1/3로 줄었다. 꽃게 가격이 10㎏에 23만~25만원으로 3만~5만원 올랐고, 경제가 무척 어려워 사람들이 사먹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랑 같이 일하는데, 하루에 2만~3만원 벌 때가 수두룩하다. 생활이 안 된다."

봉씨는 기자와 대화를 이어가면서 냉동 창고에서 꽃게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예 개시 못하는 날도 많다"고 부연했다. 봉씨는 매우 졸린 표정으로 "새벽 3시부터 밤 11시까지 가게를 지키는데, 항상 피곤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돈이라도 많이 벌리면 덜 피곤하고 덜 짜증날 텐데"라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는 "재래시장 등 서민경제 좀 살려 달라"며 "가락시장 찾아와 서민경제 살린다는 말만 하지 말고, 직접 실천해 달라"고 강조했다.

"힘들어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1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공판장에서 배추 도매상인들이 배추를 쌓아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31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 공판장에서 배추 도매상인들이 배추를 쌓아놓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선대식

새벽 6시에 찾은 채소시장의 분위기도 수산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채소시장 한켠은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그 분위기는 더 암울해보였다.

채소시장 앞머리에서 장사하는 김현자(가명·69)씨는 "장사가 잘되느냐?"는 물음에 "인건비도 안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배추 등 채소 250만원어치를 사놓으면 예전엔 200만원을 팔았는데, 요즘엔 100만원어치밖에 못 판다"며 "마진율도 떨어져 하루에 10~15만원 남는데, 운반비·식대·석유값·인건비를 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이 없다"고 말했다.

배추 공판장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배추를 잔뜩 쌓아놓았지만, 사는 사람이 없다. 이순희(가명·50)씨는 "지금 이 시각이 가장 바빠야 하는데, 조용하다"며 "어제 배추 900망(1망=3포기)을 샀는데, 400망이 남았다, 오늘도 900망을 샀는데, 200망만 팔렸다"고 하소연했다.

이씨는 "지금 현재로서는 '시장'이라고 할 수 없다, 진짜 춥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정치는 기대하지도 않고, 뉴스도 안 본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예전에 1월1일 하루만 쉬었는데, 이번엔 시장 전체가 오늘부터 4일간 쉰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가 만난 사람 중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이었다. 한서희(가명·48)씨는 "힘들다고 하면 더욱 힘 빠진다"며 "어떻게든 지출을 줄여 견뎌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오전 7시가 넘어서자 2008년의 마지막 하루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중간도매 상인들에게 배추를 산 사람들이 트럭 가득 배추를 싣고 떠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싸게 내놓았는데 많이 좀 사가지! 4일 동안 시장 전체가 다 쉬는 거 알지? 4일 뒤에 보자고!"
"하하. 예, 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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