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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다. 사람들이란 누구나 뽑혀지지 않는 나무밑동 같은 아픔을 갖고 있단다. 그래, 그 아픔을 느낄 때마다 나무뿌리를 때리듯이 제 가슴을 치면서 살아가는 거란다.

 

소천하신 정채봉 작가의 얘기에요.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며 가슴을 쳤어요. 누구나 그렇듯 ‘뽑혀지지 않는 나무밑동 같은 아픔’이 제게도 있었으니까요. 그 밑동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죠. 그럴 때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현실에 분노도 하고 푸념도 늘어놓았지요.

 

평탄하지 않은 가족사, 꼬이기만 하는 연애, 욕심을 따라가지 못하는 가벼운 주머니, 운을  핑계거리로 삼는 부족한 능력, 게다가 마주치는 지루한 일상까지 잠 못 이룰 때도 많았어요. 청춘이 버겁게 느껴지더군요. 

 

특히, 낙엽이 흩날리고 스산한 바람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이면 여러 감정에 휩싸였죠.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도 옷깃을 여미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쓸쓸하더군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고 하늘은 어찌 그리 캄캄한지. 별빛 한 점 없는 밤길에서 앞으로 어디로 걸어야 할지 힘들었어요.  

 

쓸쓸종합선물세트, 눈썹달

 

2004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에 나온 이소라 6집, <눈썹달>은 운명의 짝처럼 제게 나타났어요. 보통 가수 앨범의 주제를 보면 이별과 사랑, 세상이야기가 알맞게 섞여있는데 <눈썹달>은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슬퍼요. 슬프다 못해 서글프고 애통해요. 외로움과 애절한 감정을 세련되게 담은 앨범이지요.

 

앨범에 녹아있는 그 우울함이 좋았어요. 그동안 사람들의 눈길과 세상이 바라는 지표들에 얽매여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거든요. 수많은 모임을 만들고 쫓아다니면서 활달하고 밝은 척 살았지요. 이소라씨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즐거운 가면’ 뒤에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휘젓더군요. 꽁꽁 숨기던 우울과 외로움을 건드렸지요.

 

‘쓸쓸종합선물세트’같은 이 앨범은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게 했어요. 제대로 가을을 타게 하였지요. 신나는 댄스음악과 힙합음악에만 몸을 흔들어대던 제가 느린 발라드를 들으며 감정을 흔들었지요. 밑에 가라앉아서 발목을 잡곤 하였던 상처와 아픔들이 떠오르더군요. 싫으나 좋으나 내 감정임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이소라씨는 곁에서 슬픔을 노래했지요.

 

바람이 분다 - 작곡/이승환, 작사/이소라, 노래/이소라

 

바람이 분다 / 서러운 마음에 / 텅 빈 풍경이 / 불어온다 /

머리를 자르고 / 돌아오는 길에 / 내내 글썽이던 / 눈물을 쏟는다 /

 

하늘이 젖는다 / 어두운 거리에 / 찬 빗방울이 / 떨어진다 /

무리를 지으며 / 따라오는 비는 / 내게서 먼 것 같아 / 이미 그친 것 같아 /

 

세상은 어제와 같고 / 시간은 흐르고 있고 /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

바람에 흩어져 버린 / 허무한 내 소원들은 / 애타게 사라져간다 /

 

바람이 분다 / 시린 한기 속에 / 지난 시간을 / 되돌린다 /

여름 끝에 선 / 너의 뒷모습이 / 차가웠던 것 같아 / 다 알 것 같아 /

 

내게는 소중했었던 / 잠 못 이루던 날들이 /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

사랑은 비극이어라 / 그대는 내가 아니다 /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

 

나의 이별은 /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 치러진다 /

세상은 어제와 같고 / 시간은 흐르고 있고 /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

내게는 천금 같았던 / 추억이 담겨져 있던 /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

눈물이 흐른다 /

 

노래가사처럼 절절히 외로웠던 시간

 

‘바람이 분다’는 눈썹달 대표곡으로 영화 <여자, 정혜>(이윤기 감독, 2005)에도 쓰였지요. 이 곡은 선율과 박자도 좋지만 가사만으로도 아름다운 시예요. 멜로디와 이소라씨의 목소리가 빚어내는 노래 분위기에 가을 바람같은 가사들이 가슴속을 파고드는 이 곡은 남녀 사이의 이별노래만은 아니지요. 자신에 감정에 취해 여러 모로 해석이 되어요.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는데 나만 달라져 있대요. 그것도 혼자만. 얼마나 외로울지 감정이입이 되더군요. 2절에서 사랑은 비극이라고 탄식하며 자신과 당신이 다르다는 것을 고백하는 가사는 무척 아프지요. 하나가 되길 바랐던 열망이 컸던 만큼.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지는 이별을 할 때 소중한 추억들로 목이 메지요. 그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지요. 노래 듣는 사람들 가슴 속에.

 

이 앨범을 한창 들을 때는 하늘보다는 땅을 보고 걸었고 손을 호주머니에서 빼지 않았지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자주 노래가사를 되뇌이며 창밖을 바라보았지요. 나지막하게 보고 싶은 사람들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천천히 속내를 글로 적어도 보았지요. 영화와 책만 보며 음울한 동굴로 들어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곰처럼 시간을 보냈어요.

 

혼자 달라진 것을 시간이 흐르면 받아들이게 되지요. 세상에 대한 화와 미움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더군요. 어두운 밤에 홀로 있는 눈썹달처럼 외로웠지만 눈썹달도 보름달이 되듯이 사람은 달라지더군요. 그 절절한 외로움마저도 품게 되더라고요. 한결같이 음울한 노래로 채워진 앨범을 암흑이나 밤이라고 하지 않고 <눈썹달>이라고 붙인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슬퍼할 때는 하염없이 슬퍼하자

 

솔직하게 살라고 <눈썹달>은 가르쳐주었지요. 즐거울 때는 실컷 즐거워야겠지만 슬퍼할 때는 하염없이 슬퍼하라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가슴 속에 평생 남는다고. 슬픈 감정을 인정하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슬픔을 제대로 느끼게 되자 즐거운 감정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겠더라고요. 모든 것이 빛과 그림자를 갖고 있고 어떻게 여기느냐가 중요하게 되었지요. 

 

눈물을 먹고 영혼은 자라지요. 슬픔의 밑바닥에서는 즐거운 일들만 남지요. 고단하고 세상살이기에 희망이 생기지요. 허무한 인생이기에 사람에게서 뜻을 구해야겠지요. 그 해 불어온 가을바람은 소원들을 흩어버리게 했지만 욕심들도 허무하게 하였지요. 쌀쌀한 추위는 쓸쓸한 낙엽을 만들었지만 단풍을 연출하며 아름다운 이별을 보여주었지요. 

 

뽑혀지지 않은 나무밑동에서 가끔 앉아 하늘을 바라봐요. 그럴 때면 하늘은 참 파랗지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군데군데 옹이를 문질러 봐요. 새로 솟는 움을 고맙게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봅니다.

덧붙이는 글 | 나의 가을 노래


태그:#가을노래, #눈썹달, #이소라, #바람은분다,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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