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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이 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미국의 새뮤얼 모스는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64km 떨어진 볼티모어까지 전선을 설치하고 모스부호로 처음으로 전신송신에 성공했으며, 영국에서는 조지 윌리엄스 등 12명이 YMCA를 처음으로 설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이해 6월 5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끔찍한 살육이 있었다. 바로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봉기'이다.

고통

1840년대는 산업혁명이 전 유럽을 휩쓴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경제발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단순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가난을 대가로 치른 발전이었다. 농노제의 최후의 잔재가 폐지되고 영업의 자유가 도입되었건만, 새시대는 농민과 노동자에게 무엇보다도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굶주리고 뼈빠지게 일할 '자유'만을 주었다.

독일의 직조공들도 그 같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공장주였던 츠반치거에게 감자를 살 수 없을 정도로 임금이 적다는 하소연을 하자 츠반치거가 "풀이 잘 자랐는데 그거라도 먹으면 되겠네"라고 응수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 돈많은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더욱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여기 이 가정도 그런 극심한 가난 속에 방치돼 있다. 누더기 같은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는 아버지.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케테 콜비츠 <빈곤(Not)>,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3-1894
 케테 콜비츠 <빈곤(Not)>,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3-1894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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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

이제 아이는 죽음에 임박한 것 같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어머니는 지친 듯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모든 걸 체념한 모습으로 망연히 서 있다. 아이는 이미 죽음의 신 해골의 품에 안겨 있다.

케테 콜비츠 <죽음(Tod)>,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7
 케테 콜비츠 <죽음(Tod)>,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7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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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

궁핍으로 비참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운명만 탓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던가. 이제는 행동에 옮겨야 할 때.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그들의 운명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케테 콜비츠 <회의(Beratung)>,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8
 케테 콜비츠 <회의(Beratung)>, 석판(Lithograph printed on yellow chine collE), 1898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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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

그리고 마침내 직조공들은 자신들의 생산의 수단이자 무기인 곡괭이와 삽자루들을 들고 힘을 합쳤다. 이 모든 문제를 짊어지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케테 콜비츠 <행진(Weberzug)>, 동판(Etching and sandpaper aquatint), 1897
 케테 콜비츠 <행진(Weberzug)>, 동판(Etching and sandpaper aquatint), 1897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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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직조공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자들의 굳게 닫힌 철문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싸워본다. 공장주들에게 단지 먹을 것을 달라며 일어섰을 뿐인데, 공장주를 보호하려고 출동한 프로이센 보병대는 직조공들에게 먹을 것 대신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무릎에 총상을 입은 여덟살 소년, 머리가 박살난 여성… 열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케테 콜비츠 <폭동(Sturm)>, 동판(Etching and mezzotint on wove paper), 1897
 케테 콜비츠 <폭동(Sturm)>, 동판(Etching and mezzotint on wove paper), 1897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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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결과적으로, 그들의 봉기는 실패했다. 직조공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된 데 이어 대량 검거가 시작됐고 마침내 6월 9일, '살아남은' 직조공들은 전방위적인 압박에 못이겨 직장으로 돌아가게 됐기 때문이다. 줄지어 집으로 운반되고 있는, 총에 맞아 희생된 봉기자들의 시신들만이 '한때, 우리는 저항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결말(Ende), 동판(Etching, aquatint, and sandpaper ground on wove paper), 1897
 결말(Ende), 동판(Etching, aquatint, and sandpaper ground on wove paper), 1897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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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봉기는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가는 것만 같았다. 성공한 혁명이면 몰라도, 실패한 봉기 따위를 그 누가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약 50년이 지난 후, 이들의 투쟁은 한 걸출한 화가의 손에 의해 재현돼 다시금 우리곁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 예술가의 이름은 '케테 콜비츠(1867~1945)'. 석판과 부식동판의 기법을 사용하여 4년씩이나 걸린 <직조공 봉기(1893~1897)>연작은 케테 콜비츠 세계의 한 전형이면서도 당대의 시대미감을 응축시킨 걸작으로 꼽힌다. <빈곤>, <죽음>, <회의>, <직조공의 행진>, <폭동>, <결말> 등 여섯 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이 연작을 시작으로, 케테는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학대받는 이들의 친구로서 행보를 계속하게 된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이들의 친구, 케테 콜비츠

사실 그녀 자신은 법관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별 모자람 없이 자랐다. 자신의 미술 소질을 발견해주고 그 성장을 적극 도운 가족의 배려 아래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축복이었다.

착실하게 미술수업을 받아온 케테는 24살이 되던 해인 1891년, 의사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칼 콜비츠와 결혼하고, 이때부터 평생 자신을 이끌게 되는 '민중'들을 만난다. 칼 콜비츠는 자신이 가진 의료 지식을 사리사욕을 위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칼 콜비츠는 베를린 외곽에 자선 병원을 세워 그곳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활동을 펼쳐나갔다. 가난한 노동자와 빈민들이 칼 콜비츠의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케테의 첫인상은 매우 황홀했고, 그만큼이나 관념적이었다. 그녀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고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짐꾼이 아름다웠으며 민중들의 활달함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더 지나자 이내 케테는 삶이 얼마나 끔찍하고 지겹도록 질긴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병들고 지친 노동자들의 푸석한 몰골들, 이중의 노동으로 쭈글쭈글 늙어가는 여인들….

"남자는 아랑곳 않고 여자는 탄식하는데 언제나 똑같은 가락이다. 질병, 실직, 그리고 또 술. 늘 그 신세이다. 아이를 열한명 낳았지만 그중 다섯만 살았다. 큰 애들이 죽고 나면 또 자꾸 작은 아이들이 생긴다."

1930년대 초의 콜비츠 사진(좌)과 1920년에 그린 팔을 괸 자화상(우)
 1930년대 초의 콜비츠 사진(좌)과 1920년에 그린 팔을 괸 자화상(우)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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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행동하는 작가로

그녀는 사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부르주아 계급의 안락함을 누리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분과 계급이 다름에도 노동자와 농민의 아픔을 내 것같이 절절히 느끼면서 안타까운 감정을 일기장에 써내려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녀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침내 케테를 행동하는 작가로 이끈다.

1893년, 케테는 운명적으로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들>을 보게 된다. 민중에 대한 연민으로 감화돼 있던 케테가 이 작품을 만난 것은 사실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단지 미술을 공부한 자선병원장의 아내일 뿐이던 케테를 마침내 한사람의 예술가로 일으켜 세웠다. 이 연극을 보고 케테는 강한 영감을 얻었고 앞서 본, 자신의 출세작으로 꼽히는 <직조공 봉기>를 작업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하우프트만의 극과 많이 다르다. 케테의 작품은 직조공들의 투쟁에 작품의 중심을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 평전을 쓴 카테리네 크라머가 이렇게 얘기했을 정도다.

"하우프트만이 행동하는 프롤레타리아를 무대 위에 올린 최초의 작가였다면, 케테 콜비츠는 조형예술분야에서 계급투쟁을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개척자에 해당한다."

특징적인 것은,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억압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직조공들의 실존과 삶, 투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계급투쟁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고, 당시 자본가의 악랄함과 직조공들의 분노를 처절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나아가 그녀의 작품은 계급투쟁과 노동자들의 분노 표출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여섯장의 작품은 그 다음의 역사를 예견하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은  비극적으로 죽음을 당한 자와 남겨진 자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 주는 등 슬픔의 정서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어둠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느다란 희망을 나타낸다. 순간의 패배가 간결하게 패배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 연작은 사회의 진보 세력을 표현하고, 여기에 맞는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주의 형식을 발굴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사실주의적'인 것은 주제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그녀가 단순히 귀족들을 위한 그림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자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에게 케테 콜비츠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케테가 '판화'를 선택한 이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판화작업'을 즐겨 했던 것 같다. 처음 그녀는 유화작업을 하였으나 그녀의 교수인 칼 스타우퍼 베른을 통해 동판 부식법을 배우고, 클링거의 상징주의 판화를 보면서 유화를 버리고 판화로 작업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아가 케테는 색채라는 것이 심미적인 유희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검정색, 회색, 백색을 통해 인간의 아픔과 슬픔, 어둠을 표출해 내는 판화야말로 예술을 대중화시킬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판화는 미술의 귀족 성향을 제거해주는 장르, 즉 유일성이라는 신화를 부수고 다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복제예술이다. 복제라는 의미는 또 곧 민중의 대열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특정인에 의한 독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술의 민주화와도 연결된다.

기법이나 표현력의 내재적 의미보다는 현실에 참여할 '힘'이 필요했던 케테에게 판화는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 예술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추상에서 사실주의로, 회화에서 복제성과 선동성이 강한 판화(수백장의 그림을 동시에 노동자들의 눈앞에서 보여주고 손안에 쥐어줄 수 있는 것은 당시엔 판화밖에 없었다)로 나아갔는지 모를 일이다.

판화기법의 탁월성으로 19세기 말에 케테는 이미 명성을 떨쳤다. 케테는 자신의 작업모토를 이렇게 규정했다.

"나는  이 시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내 작품의 목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은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자세를 허물고 남을 위한 존재로서 협력, 연대, 원조로 나서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케테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 눈을 돌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회 문제들을 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힘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횡포를 고발하고, 사회 약자들이 당하는 삶의 고통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24년에 석판화로 제작되어 독일의 거리 곳곳에 나붙었던 그녀의 반전 포스터들은 반전운동 확산의 촉매 역할을 했다.
▲ 케테 콜비츠 <전쟁은 이제 그만> 1924년에 석판화로 제작되어 독일의 거리 곳곳에 나붙었던 그녀의 반전 포스터들은 반전운동 확산의 촉매 역할을 했다.
ⓒ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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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케테 콜비츠는 미술사를 기준으로 볼 때는 주변부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초에는 큐비즘을 비롯하여 야수파, 표현주의 등 갖가지 미술 경향이 봇물 터지듯 흘러넘쳤다.

이런 여러 양식들은 표현방식에 있어 새로운 길을 열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문제와는 점점 멀어졌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든말든 상관없이 새로운 미술실험에만 몰두하다보니 그림은 더욱 어려워지고, 관객들은 갈수록 그림을 외면하게 되었다. 비평가의 설명없이 혼자서 그림을 감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른 예술가들이 현실과는 벽을 쌓은 채 갖가지 실험적인 화풍을 선보이는 동안 케테는 '쉬운 예술'을 도구삼아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인생의 즐거운 면만을 보려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미술에서 조화나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정직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케테 콜비츠는 성실한 인간이자 예술가였다. 인간의 고통, 가난, 격정, 폭력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느꼈던 그녀.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후대에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혁명적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나는 그저 진화된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이 살았던 특정한 시대를 충실하게 묘사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금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케테 콜비츠 작품 세계에 흐르고 있는 휴머니즘 정신, 단순한 감상 차원에서 머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실천의 성격을 띠고 있는 휴머니즘 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휴머니즘 정신은 동시대인들에게는 현실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며, 1930년대 루쉰이 주도하던 중국 신흥 목판화 운동, 1980년대 한국민주화운동에 사용된 '걸개그림'까지,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왔다.

87년 6월 항쟁을 뚜렷이 기억시킨 최병수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87년 6월 항쟁을 뚜렷이 기억시킨 최병수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 최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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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 상실되고 폭력이 난무하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로 인하여 두려움이 커지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케테가 이 시대를 살아간다면, 영업이익을 위해 원가절감을 위해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 처절하고 호소적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봉기' 판화 연작를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까. 바로 이것이 21세기 현대사회가 케테의 그림을 더더욱 필요로 하는 이유다.


태그:#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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