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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따기들의 도시 피사, 뭔가 삐딱한 기운이 넘쳐나는 곳

 

만약 당신이 현재 피사에 있다면 사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달리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흔히 피사를 하루 코스 여행지라고 하는데, 다들 기념촬영만 하고 바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서둘러 보지 않고서야 하루 여행 코스가 될 리가 있나. 물론 나 역시 '피사의 사탑' 기념촬영만을 위해 왔지만 말이다.

 

성당은 그 자체로는 매력적이었지만 일정을 바꿀 만큼의 흥미를 끌지는 못 했다. 인근 다른 도시의 거대한 성당들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변 도시에 대성당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 것 같다. 밀라노나 피렌체, 로마 등 어느 도시를 경유해 들어왔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성당을 구경하는 것 대신 간단하게 빵을 먹고, 동네 구경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성곽 밖으로 나와 빵을 먹으면서 중간 중간 피사의 사탑을 바라봤다. 짧게 체류하는 만큼 최대한 눈에 익히고 떠나리라. 그런데 우연의 일치겠지만 주변에 있는 나무들도 사탑과 비슷한 각도로 비스듬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은 별로 불지 않았다. '같은 각도'로 휘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사탑과 나무가 한 곳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처럼 보였다.

 

한두 시간이라도 슬슬 걸어 보기로 했다. 문패같이 보이는, 초인종에 달려있는 이름표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뻐서 나도 하나 만들어 갈까 하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철물점으로 가야 하는지, 간판집인지, 아니면 라벨 집으로 가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왔다. 

 

'피사' 정도의 유명 관광지라면 친구들에게 엽서 한 장 보내는 것도 기념이 될 만하겠단 생각에 우체국을 찾으러 다녔다.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피사에서는 엽서 보내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체국을 물어보니, 쉽게 가르쳐 준다. 방향을 쉽게 알아낸 것에 비해 찾는 곳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알려준 방향으로 가도, 그 장소에서 아무리 헤매도 우체국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니 내가 왔던 방향의 반대로 돌아가라고 한다. 여덟 사람에게 물어보니 여덟 가지 방향을 가르쳐 준다. 이 도시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다른 길을 알려준다거나, 장난을 치는 것인지, 뭔가 삐딱한 기운이 넘쳐났다.

 

피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도착했다고 알려주던 기차의 녀석들도 그렇고. 다들 잘못된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천연덕스럽게 제공했다. 살면서 별로 만나 본 적이 없는 행태의 사람들을 종일 만나게 되니 이상한 나라에 도착해 길을 헤매고 있는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다. 이런 곳에서 명패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나마 하다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목표를 수정했다. 기념품 가게를 찾기로 했다. 우체국보다는 기념품 가게가 찾기 쉬울 것 같았다. 엽서를 사고, 주인에게 그곳에서 혹시 부쳐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안 되면 가장 가까운 곳의 우체국이라도 물으면 될 것이다. 우선 편지를 먼저 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엽서를 파는 곳은 그닥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동네 슈퍼였다. 다르게 가르쳐주던 주민들 덕에 그 가게를 네 번쯤은 지나쳤던 것 같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엽서를 찾았다. 피사의 사탑이 무너지는 그림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피사의 사탑을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그림으로 그려놨다. 역시 이탈리아노!

 

주인은 영어라고는 가격 계산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체국도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들고 중앙역을 향해 이동했다.

 

키스 해링의 벽을 보고 버스에서 내리다

 

중앙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로 시내를 내려다 봤다. 어느 광장에서 버스가 잠시 정차했을 때 골목에 있는 벽화를 발견했는데, 팔에 소름이 돋으며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내 몸은 이미 그곳을 향해 뛰고 있었다.

 

키스 해링의 벽화였다.

 

'응? 왜 여기에 키스 해링 그림이 있지? 그의 홈페이지에서 피사의 벽화를 본 적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다양한 예술가들을 좋아하는 만큼, 한 가지에 깊이 몰두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아서 피사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하게 됐다.

 

▲ 키스해링 우연한 기회에 볼 수 있었던 키스해링의 작품. 한적한 주택가에 있다.
ⓒ 정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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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스 해링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됐던 것은 새천년이라고 한참 들떴던 2000년 초 추운 봄이었다. 나는 대학 입시 시험이 끝나자마자 락카를 잡았고, 그래피티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됐던 의욕 넘치는 초보자였다.

 

락카를 쥐는 법부터 가르쳐 줬던 선생님을 따라 PC통신 나우누리에서 활동하던 춤 동호회 연습실 작업에 갔었을 때다. 그때 처음으로 벽을 하나 얻었다.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작업을 했다. 'KICK IT UP'이란 동호회 이름을 사람이 춤추는 모양으로 알파벳을 표현했다. 미술 전공이 아니라 데생에 미숙했던 터라  춤추는 사람 동작의 구체성을 띠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형체만 그렸다. 아이가 그린 것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너 키스 해링 카피했지?"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비슷한 말을 했다. 키스 해링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카피를 했을 리가 있나. 그래피티를 하겠다는 사람이 키스 해링을 모른다니 창피할 법도 하지만 모르는 것을 어쩌랴, 집에 가서 찾아봤다.

 

'카피'가 맞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림들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봤다는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피티에 관심이 없더라도 자주 봤을 법한 유명한 스타일이었다. 보고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표절'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냉정하게 보면 분명 '따라한 것'이 맞다. 어디선가 봤던 그림에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나는 그의 팬이 됐고, 훌륭한 전범으로 생각하게 됐다. 희한하게도 따라했다는 창피함보다는 이 사람처럼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림을 지울까 하다가 그보다는 키스 해링에 대한 존경심에 대해 써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 밑부분에 '키스 해링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썼다.

 

따라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지우지 않고자 했던 것은 그의 작품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부끄럽지만 내 그림에는 '상징'이 없었다. 춤추는 모임이기 때문에 춤추는 사람을 그리고자 했을 뿐이지, 상징의 도구로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세하게 묘사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접근법 자체가 달랐다.

 

또 회색 톤으로만 했기 때문에 총천연색인 그의 작품과는 색감이 명백하게 달랐다. 키스 해링의 작품 중에서 모노톤으로 그린 작품을 제외한다면 회색톤으로만 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표절'을 논할 만큼의 작품이라기보다 하나의 습작에 지나지 않았다.

 

랩 음악과 같은 키스 해링의 벽화

 

설마 이탈리아에서, 피사에서, 그것도 버스가 잠시 멈춘 짧은 순간에 보게 될 줄 몰랐지만 그것은 진짜 키스 해링이었다. 우연이 준 선물이었다. 이탈리아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그것도 완전 꽁짜로! 기적이다.

 

작품 앞에서 도저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의 훌륭한 미술작품들을 다 만나고 왔던들, 이 감동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추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어릴 적 첫사랑을 만난 기분이 이럴까?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89년도 작품인데 그는 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벽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의미가 있었다(퍼블릭 아트 2008년 5월호 132쪽 참고).

 

벽화에는 그가 전하던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는 에이즈로 죽었는데 말년에 에이즈 퇴치 운동을 했다. 그래서 벽화에도 생명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탄생과 죽음, 삶, 사랑, 성, 에이즈. 그런 것들을 어린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 밝고 감각적인 색감, 단순한 표현과 아이콘화, 누구나 좋아할만한 소재들, 강아지, 날개, 사람을 율동감 있게 표현했다. 마치 랩 음악처럼!

 

피사의 사탑을 구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작품 앞에서 한참 구경을 했다. 옆에 초등학교 같은 게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이런 그림을 보고 자랄 수 있으니.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들이 그 앞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역시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일생에 한 번 보는 그림이라며 감동하고 있는데, 일상에서 볼 수 있다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중앙역을 향하다, 엽서는 결국 역 앞의 우체통에 넣었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6월부터 9월까지 여행한 내용입니다. 


태그:#이탈리아 여행, #동영상 여행, #피사, #키스해링, #피사의 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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