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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수저우(苏州)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약간 지난 시간이었다. 터미널에 내리니 여행을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들로 발 내디딜 틈도 없다. 1주일 연휴가 시작됐으니 한바탕 혼잡을 각오해야 한다. 마침 하천을 건너 터미널 맞은 편에 내가 찾는 호텔이 보였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방이 있을까. 염려와 달리 빈 방이 하나 있다. 다만, 오늘 하루뿐. 내일은 오래 전에 예약이 끝났다고 한다. 짐을 풀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수저우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 받은 정원을 군락처럼 형성돼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줘정위엔(拙政园)을 먼저 찾았다. 걸어서 20분 거리다. 산뜻한 거리이면서 차분한 모습이 격조가 높다. 입구를 들어서니 연꽃이 핀 연못 옆에 푸룽씨에(芙蓉榭) 정자가 반겨 준다.

 

명나라 시대인 1509년 어사 왕헌신(王献臣)이 낙향해 만든 정원으로 중앙무대에서 못다 이룬 꿈을 고향에서 여생을 위안 삼고자 했으리라. 정원 이름도 매우 소박한 듯하면서 나름대로 고충을 담은 듯하다. 16년 동안 정원을 만들면서 그는 서진(西晋)시대의 문학가이며 미남의 대명사이기도 한 반안(潘安)의 <한거부(闲居赋)>를 많이 읽었음직하다.

 

‘집 지어 나무 심고 유유자적 기뻐하며 물 대어 채소 길러 아침 저녁 반찬 하니 이것 또한 겸허한 자의 업무라네(筑室种树, 逍遥自得 灌园鬻蔬, 以供朝夕之膳 此亦拙者之为政也)’는 집에서 거하며 한가로운 사람의 심정을 잘 드러낸 것이라 여겼으리라. 더불어, 거창한 정원에 대한 겸손이야말로 처세요, 또한 후대에게 오래 이어질 가훈과도 같았으리라. 영문 이름 The Humble Administrator's Garden도 참 적절하다.

 

푸룽씨에와 슈샹관(秫香馆)이 있는 동위엔(东园)은 가세가 기울어 남에게 양도했다가 12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되찾은 곳이다. 그래서 구이티엔위엔쥐(归田园居)라 부르기도 한다. 정자와 호수 그리고 수련과 나무의 조화가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풍취가 아름답다.

 

반면 중위엔(中园)은 화사하고 화려하다. 게다가 문이나 정자 등 곳곳에 있는 작명법도 4자까지 늘려 그 운치를 빛내고 있다.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问答>의 별천지와의 경계를 나누는 듯한 비에여우둥텐(别有洞天)까지 곳곳의 이름을 새겨가면 감칠맛 나는 곳이라 하겠다.

 

허펑쓰멘(荷风四面)는 연꽃이 바람처럼 사면에 흩뿌리고 있다는 것일까. 정말 정자에서 바라보는 수련은 어디에서든 피어있다. 쉬에샹윈웨이(雪香云蔚)은 살색처럼 하얀 구름이 울창한 것일까. 정자에서 바라보면 아마도 구름 같은 물 안개가 잔뜩 피어 오르니 그렇게 지었나 보다.

 

시위엔(西园)으로 넘어가면 1877년 당시 염상(盐商)이던 장이겸(张履谦)이 건축한 2개의 재미있는 건물이 있다. 18만퉈뤄관(十八曼佗罗花馆)과 36위엔양관(三十六鸳鸯馆)이다. 독말풀이라는 한해살이 풀과 원앙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간판에는 ‘30’을 뜻하는 싸(卅)를 써서 싸려우(卅六)라고 적혀 있으며 실제로 연못의 건물 아래에 몇 마리 새들이 헤엄을 치고 있기도 하다.

 

비록 사람들이 많지만 연못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제 나름의 모양새를 갖고 자라난 나무들도 운치를 더해준다. 늘어진 나무 가지와 호흡하려는 듯 바위에 잠시 걸터앉은 사람들도 있다. 때로는 햇살에 반사된 수련 그늘로 살짝 들어가고픈 물고기들도 그저 여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을 뿐 바쁠 게 없다.

 

커다란 수련 위에는 사람들의 인자한 적선일지 장난일지 모를 여파로 고마운 동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기도 하다. 늦은 오후 시적 정감이 가득한 이름의 건물 지붕 사이로 햇살이 강하게 빛을 뿌리고 있으니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정원이 보여주는 풍경은 담백 그 자체다.

 

그런데 워낙 유명한 줘정위엔이다 보니 기대가 컸었던가. 한 번 두루 둘러봤으나 감흥이 남다른 것은 없다. 그저 잘 설계된 자연 속의 사람 손길이 느껴지는 정도라는 감회라면 족하다 싶다. 그럭저럭 마음에 하나 담아올 수 있는 것은 역시 무수히 많은 현판의 글자들이 아닐까 싶다.

 

그 중에도 가장 인상적인 두 글자는 '소풍(梳风)'이었다. '바람을 빗다'는 뜻에 이런저런 동사를 대입해 봤는데, '쓰다듬다' '어루만지다' '더듬다' '매만지다' 등등 보다 훨씬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말이 아닐까 줄곧 생각해 봤다.

 

바람이 별로 불지 않는 정원을 빠져나오면서 중국을 대표하는 4대 정원 중 하나를 훑었건만 인상에 그다지 깊게 남지 않는 것은 왜일까. 정원에는 자연의 정서만 남겨둔 듯하고 애처로운 역사나 설화 구조가 느껴지지 않으니 그저 빗으로 바람이나 어루만지며 노닐기엔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4대 정원 중 하나인 려우위엔(留园)을 비롯 무수히 많은 수저우 정원들을 다 본다는 것은 낭비일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스즈린(狮子林)을 더 보고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다. 시내를 흐르는 좁은 수로에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려는 풍광을 따라 걸어가니 작은 정원 입구에 도착했다.

 

중국에는 참 많은 정원이 있다. 그 중에서도 그 멋을 더욱 부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4대 밍위엔(名园)을 정하고 그 품격을 순위로 정하기도 한다. 대체로 중국을 대표하는 정원은 수저우에 있는 줘정위엔과 려우위엔을 포함해 베이징의 이허위엔(颐和园)과 허베이 청더(承德)의 비슈산좡(避暑山庄)을 꼽는데 이곳들은 다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걸었다.

 

강남 4대 정원도 있다. 줘정위엔과 려우위엔 외에 난징(南京)의 잔위엔(瞻园)과 우시(无锡)의 지창위엔(寄畅园)을 꼽는다. 강남이라 하는 것은 창장(长江) 이남을 뜻하는데 진시황의 군현제 이래 강남을 도(道)나 부(府)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강동과 구분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넓은 의미로 '창장 남쪽의 수향(水乡)의 정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변함없이 줘징위엔과 려우위엔이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수저우는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니 수저우를 대표하는 4대 정원조차 있다. 송나라 때의 창랑팅(沧浪亭), 원나라 때의 스즈린, 명나라 때의 줘정위엔, 청나라 때의 려우위엔이다.

 

스즈린은 인공으로 만든 돌산이 가장 멋지다. 연못에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생긴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이 정원을 만든 천여선사(天如禅师)의 제자들이 자금을 만들고 땅을 구입해 건물과 정원을 꾸미면서 스승이 스즈옌(狮子岩)에서 의발(衣钵) 사승(师承)하던 곳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진다.

 

이 가산(假山)은 정말 오묘한 미궁과도 같다. 불과 몇 미터 높이이고 너비도 겨우 몇 걸음 걸으면 그만일 듯한데 돌고 돌아도 다시 또 돌아가는 길이 나타난다. 귀퉁이를 돌아 오르는 길을 따라 약간 높은 곳으로 오르면 연못과 정자가 어울린 경관이 마치 높은 산 정상에서 보는 착각이 든다. 게다가 타이후(太湖)에서 가져왔다는 돌들의 부드러운 곡선 사이로 바라보는 느낌도 예사롭지 않다. 금방 내려갈 듯한데 다시 오르락 내리락 해야만 한다. 정말 예상을 뒤엎는 긴 산책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완전한 밤이다. 거리의 가로등이 밝게 빛나고 있다. 오토바이와 삼륜차가 빠르게 지나다니는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앞 하천의 야경과 초록색 나무 줄기가 어울리는 수저우의 밤이었다.

 

10월 2일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겼다. 오늘은 다른 숙소를 구해야 한다. 일단 시내 구경을 다녀온 후에 천천히 숙소를 구할 생각으로 전형적인 수향 정취가 있는 산탕제(山塘街)로 갔다. 당나라 이후 수저우의 가장 번화한 거리이면서 문인들이 즐겨 찾던 거리였던 곳이라 입구부터 강남 분위기가 한껏 물올라 있다.

 

입구 오른편에 뜻밖에도 백거이(白居易) 기념관이 있다. 이 거리는 장장 7리(里)에 이르는 고성 거리였는데 백거이가 당나라 시대 조성한 이래 '고소제일명가(姑苏第一名街)'로 불렸다고 한다. '姑苏'는 수저우를 별칭이다. 그 유래는 역사의 기원이기도 한 하(夏)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胥)라 불리는 유명한 사람이 있어 치수의 왕이란 불리는 우(禹) 왕을 도와 공을 세우고 존경 받아 수저우 땅의 주인으로 책봉(册封) 받았다고 한다. 원래 '姑'는 토착어에서 온 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G'라는 자음을 갖는 전치사처럼 사용됐고 '胥'과 '苏'는 점차 발음이 유사해지게 돼 점차 '姑苏'라 불렸다. 그러니 거의 한 개의 음을 갖는 수(苏)라 봐도 된다.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춘추전국 시대에는 각 지방의 이름이 외자로 사용했던 듯하다. 이후 군현제가 보편화되면 중앙집권적인 작명을 하려다 보니 한 개의 글자로는 변별력이 떨어지게 됐음직하다. 대부분 지금도 중국 시골마을에 가면 외자에 현(县)자를 가진 곳이 아주 많은데 이곳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전후해 독자적인 문화와 규범을 가지고 번성했던 역사적인 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기원이 오래된 중국 도시들도 대부분 이렇듯 옛 마을 이름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수저우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때는 춘추 시대인 기원전 514년에 오(吴)나라 왕의 지시에 따라 명 재상이며 전략가이던 오자서(伍子胥)가 성을 쌓으면서 시작됐다니 벌써 2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라 하겠다.

 

기념관 마당에는 백거이 상이 있고 건물 안에 들어서니 옻칠을 바른 그림 앞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산탕제를 건설 공사를 지휘하는 백거이가 다리 위에서 지도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으며 농부는 소를 몰고, 어부는 배를 타고 함께 일하는 모습이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기념관 옆 개천에 한 외국인과 중국여자가 결혼식 사진을 찍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흥미로운 구경인 듯 모여 있다. 외국인 남자는 까만 양복을 입어 산뜻하고 여자는 전통복장인 치파오(旗袍)을 입고 우산을 손에 들었다.

 

본격적으로 산탕제 거리로 접어들었다. 강남 수향의 형태는 대체로 개천이나 수로가 흐르고 그 양 옆으로 옛 가옥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으며 그 옆으로는 좁은 골목이 조성돼 있는 구조다.

 

골목길은 대부분 문화거리가 돼 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거나 특산 요리 식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거리에는 먹거리 마차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개천에는 당연히 지역별로 독특한 형태의 작은 배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다.

 

산탕제도 비슷하다. 옛 거리를 오면 시작부터 흥분된다. 이런 분위기를 워낙 좋아할 뿐더러 새롭게 뭔가 신기한 물건이나 먹거리가 없을까 기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듯 하면서도 늘 뭔가 몇 가지는 여느 다른 곳에서는 없는 것이 있으리라는 느낌이 한껏 풍겨온다.

 

특산품이나 가게 이름이 적힌 깃발이 휘날리면 정말 거리를 걷는 게 더욱 신난다. 게다가 하늘이 파랗고 약간의 구름이 오락가락해도 미치도록 좋다. 한 곳에 사람들이 모두 서서 빵처럼 생긴 것을 먹고 있다. 이름을 보니 메이탕가오(海棠糕)이다. 가오는 떡이고 메이탕은 재료 이름일 듯하다. 알고 봤더니 생긴 모양이 메이탕, 즉 베고니아 꽃처럼 생겨서 지은 이름이다. 원래는 이곳과 아주 가까운 강남 땅 우시(无锡)에서 청나라 시대부터 만들어 먹던 간식이라 한다.

 

마차 위에 있는 호두, 쌀 떡, 해바라기 씨를 비롯해 붉은색, 녹색, 검은 빛깔의 씨와 깨와 잣을 콩가루(豆沙)와 밀가루(面粉) 반죽에 넣고 기름을 두르더니 5분 정도 익힌다. 그런 후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나누더니 하나씩 종이에 싸서 판다. 5위엔을 주고 하나 사 먹었는데 아주 달콤하고 쫄깃한 것이 간식으로 손색 없다. 무엇보다도 향긋한 내음이 날 듯한 모양새가 눈부터 침이 돌게 만든다.

 

거리에 굳이 이곳 특산만 있는 것은 아닌 종합풍물이다. 처우더우푸(臭豆腐)와 훈둔(馄饨)도 보이더니 전통 연인 펑정(风筝)과 종이 오려 만든 지엔즈(剪纸), 져우취안(酒泉) 특산인 옥 술잔 야광배(夜光杯), 이싱(宜兴)의 도자기 차도구인 자사(紫砂), 따리(大理)의 은 제품,창저우 빗(梳篦)도 보인다. 이런 중국적인 물건들을 보노라면 요즘은 6개월 가까이 발품취재를 한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아! 이 물건은 그곳에서 본 것이구나' 하는 감회가 생기니 말이다.

 

그뿐인가 그 물건들의 역사와 문화도 동시에 떠오르면 기쁘고도 유익하다. 예를 들어 야광배는 실크로드 문명을 상징하며 둔황 예술을 닮아가며 발달한 것이니 비록 강남 땅 수저우의 당나라 거리에서 보는 것이니 생각할 이야기도 많지 않은가.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 갔던 야광배가 정반대 방향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옛 강동 오나라 땅에 있으니 말이다. 천 년의 역사를 넘어 현실로 타임머신처럼 오가는 역사기행의 묘미가 아닐까. 혼자만의 상상을 즐기는 홀로 여행이 심심하지 않은 이유다.

 

그렇지만 뭐니 해도 산탕제에는 하천 풍경이 최고다. 거리 중간에 작은 다리 위로 올라서니 길게 뻗은 수로를 달리는 배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그러니까 서쪽 방향으로는 배들이 여행객들을 기다리며 정박해 있고 배 옆 길가에는 차나 음료수를 사서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줄 서 있다.

 

서너 개씩 한 줄로 연결된 홍등이 줄줄이 발처럼 내려있기도 하다. 고개를 돌려 왼편을 보니 허름한 하천 가옥을 헤집고 배 한 척이 노 저어 오고 있다. 외국인 여행객 몇 명이 타고 오는데 그들은 다리 위의 나를 찍고 나는 그들을 찍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로 계면쩍었기에.

 

다리 위에서 보니 멀리 서쪽에 또 하나의 높은 다리가 보인다. 거리를 따라 옛날 무대가 있던 구시타이(古戏台) 옆에 다리로 올라갔다. 아까 올랐던 다리가 보였다. 두 곳의 느낌이 다소 달랐다. 이곳이 훨씬 더 은은하다고 할까. 아마도 시선의 차이일지 모른다. 하천 한 쪽에는 사람이 오가는 길이 있고 한 쪽은 그야말로 바로 집 담과 이어져 있으니 약간 인상이 다르다. 담에는 문도 있고 몇 개의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하천에 발을 담글 정도로 붙어 있다.

 

다리를 건너 반대편 하천 길을 따라 걸었다. 산탕제 반대편 길을 되돌아 가는 셈이다. 배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 아주 평화롭다. 살짝 출렁이며 직선 수로를 미끄러지듯 떠나는 배를 보며 그늘에 앉아 차라도 한 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길 옆에 앉아 있으면 나른한 오전을 즐기려는 소망이 사라질까 두렵다.

 

걷다가 기가 막히게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다리 옆 귀퉁이에 나무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고 한적한 곳이다. 안성맞춤이다 생각하고 눈으로 찜하고 나서 잠시 옆쪽으로 난 골목길을 촬영하고 오니 그 새 자리가 없어졌다. 웬 중국 여학생 둘이 냉큼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쉽다. 의자가 4개인데 한 곳에는 가방을 뒀고 나머지 한 곳이 비어있으니 같이 앉자고 할까 말까 갈등했는데 그들을 방해하고 나도 방해 받고 그럴 것 같았다.

 

골목 길 한가운데 사람들의 발길을 감독하는 듯한 강아지 한 마리가 앉아있다. 눈 깜박이며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바닥에 주저 앉아 사진을 찍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재미난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다시 산탕제로 되돌아와 빠져 나오는 길에 또 하나 구경거리를 만났다. 탕화(糖画)라고 하는 것으로 녹인 설탕 물을 국자로 퍼서 흘리면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서 파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행 초기엔 지난 5월 노동절 연휴에 카이펑(开封)에서 보고 난 후 다섯 달이 지나 10월 국경절 연휴에 다시 봤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민간예술로 인정해주는 것으로 탕잉(糖影)이라고도 불리니 역시 그림이나 영상은 같은 맥락이리라. 감상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먹을 수도 있다. 용, 봉황, 물고기, 사자, 원숭이 같은 동물들이 순식간에 생겨난다. 아이 하나가 엄마를 조르기 시작한다.

 

10위엔을 꺼내니 아이가 소리친다. 새로 만들어달라고 한다. '후즈, 후즈' 하면서 후즈((虎子)를 애 탄 듯 말하니 걱정 말라며 뚝딱 손놀림으로 흘려 뿌리고 작대기를 넣어 마감한 후 얇은 칼로 삭삭 긁으니 완성된 호랑이 설탕이 생겨났다. 원래 스촨(四川) 민간예술로 전승됐다 하는데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산탕제를 나오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연휴라 사람들도 많은데 날씨도 남방이라 그런지 여전히 덥다. 시내는 정원들 밖에 없으니 약간 시들하다. 거리를 걷다가 점심이라도 먹자고 생각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번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30분 정도 걸으니 번화가 느낌이 난다. 게다가 국경절이라 각 백화점마다 할인행사로 떠들썩하다. 문득 낯익은 호텔 하나를 발견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4성급 호텔이다. 그런데 바깥에 걸어둔 현수막이 불현듯 발길을 재촉했다. 국경일을 맞아 368위엔으로 할인한다는 것이다. 연휴 기간에 할인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의심스럽기도 했다.

 

첸타이(前台)에 관광객들로 법석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바깥에 걸어둔 방 가격이 맞느냐. 그런데 운 좋게도 방금 방이 빠졌으니 가능하다고 한다. 가격은 당연한 걸 뭘 묻냐는 투로. 저녁 무렵 숙소를 구하러 돌아다닐 생각에 걱정스러웠는데 마침 잘 된 셈이다.

 

방으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바깥 날씨가 33도 정도였는데 이미 18도 정도로 맞춰진 듯 시원하고 쾌적한 분위기에 방도 알고 보니 호화방(豪华房)이었다. 축구 팀 전원이 들어와서 합숙을 해도 될 만큼 넓은 데다가 푹신한 침대, 대형TV, 인터넷도 공짜, 아침도 공짜, 화장실과 쇼파도 최상이었다.

 

커피도 있고 철관음 등 몇 가지 차도 수북하게 쌓여있다. 원래 900위엔 정도 하는데 그야말로 훌륭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오후 일정을 다 접었다. 그리고 그동안 일들을 정리 좀 하자는 생각으로 휴식!


태그:#수저우, #산탕제, #정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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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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