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일암 가는 길. 해인사 쪽에서 뻗은 길이다. ⓒ 안병기
국일암을 찾아간다. 약수암 위로부터 흘러오는 계곡을 따라서 눈썹만큼 작은 길이 나 있다. 물 없이 돌들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계곡이 적막하다. 그러나 적막한 느낌을 미처 지울 새도 없이 금세 국일암에 닿고 만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회칠한 건물. 지척이란 싱겁기 짝이 없는 거리이면서 동시에 어처구니 없는 거리이기도 하다.
문간채 오른쪽으로 난 대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한자로 쓴 국일암(國一庵)이란 현판을 단 법당이 반갑게 마중나온다. 새시로 만든 법당 미닫이문 안에서는 스님이 혼자서 염불 삼매에 빠져 있다.
국일암은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벽암 각성 스님(1575~1660년)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는데 그 뒤로 정인이란 스님이 1942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서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곳엔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다.
병자호란 등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벽암 각성

▲'ㄴ' 자형 건물 법당. ⓒ 안병기
국일암(國一庵)이란 암자 이름이 매우 거창하다. 국일암을 중건한 것으로 알려진 벽암 각성 스님은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인조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암자 이름은 거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진태(1737~1800)가 쓴 <유가야록>에는 국일암에서 보았던 벽암 각성 스님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백련암으로부터 국일암으로 갔다. 중간에 벽암존자(碧巖尊者)의 화상이 있는데 비단으로 된 금빛 가사를 입고 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임금님이 내린 옷입니다"라고 하였다.벽암 각성 스님(1575~1660)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10세에 화산(華山)에 있는 설묵 스님 휘하로 들어갔으며 14세 때 부휴 선수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 유정이 스승인 부휴 선수를 천거하자, 스승 대신 전장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함께 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8도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의승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자신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해인사로 돌아온 것은 1641년이었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따라서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세수 86세로 입적하였다.
각성 스님의 문하에는 취미 수초와 백곡 처능을 비롯한 뛰어난 제자가 있었으며 이들은 화엄사와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며 청허 휴정에 버금갈 만한 막강한 교단을 형성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26권에 실린 '벽암 각성'이란 시에서 각성 스님의 삶을 이렇게 요약 정리한다.
말 타면 그대로 천하 장수렷다말 내리면 그대로 지상 장군이렷다항마군(降魔軍) 의승군( 義僧軍) 도대당(都大將)벽암 각성저쪽에 거드름피던 관군들이 장수가 나서면 슬금슬금 고개 돌리고머리를 조아셨다후금이 침노할 때왜적이 침노할 때연일 관군이 패퇴할 때거기에 나서는 벽암 각성의 의승군화살받이총알받이로 죽어갔다 어디 전투만인가성벽 쌓았다 군량 져왔다평양성 무너진 곳 다시 쌓았다밀리고 밀려 한양성 내주고남한산으로 물러나 부랴사랴 남한산성도 쌓았다의승군 8도 도총섭 벽암 각성도총섭 2대 응준3대 처능4대 서봉으로 제자들 이어가며 남한산성을 방어한 나머지임금의 항복에 피울음을 울었다본디 임진 정유 그때서산 휴정파와 대응하는 부휴와 부휴의 상좌 벽암 각성10세 삭발14세 수계산중의 걸승이렷다사명이 부휴를 청하자스승 대신 그가 나서 의승 전열에 나섰다임진왜란병자호란두국란 중에도 끄떡없이 살아세수 86세 법랍 72세왕이 내린 시호 원조국일도대선사(圓照國一都大禪師)라승병 4천 이끌어척불(斥拂)의 날 숭유(崇儒)의 날산중에서 일어난 구국의 으뜸이렷다숨질 때한번 껄껄 웃었다웃다가벌린 입 그대로 세상 마쳤다 - 고은 시 '벽암 각성' 전문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란 시호는 엄청난 것이다. 나라의 제일이라 해서 '국일'이다. 거기에다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도(都)자를 넣고 그것도 모자랐던지 큰 대자까지 붙였으니 말이다. 사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적엔 각성 스님의 나이 17세에 지나지 않았으니, 해전에 참가했다는 것 한가지만으로도 대단한 것 아닐까.
어쩌면 벽암 각성이 국일암에 와 머물렀던 것은 그와 비슷한 생의 궤적을 그리며 살다가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한 사명당 유정(1544~1610)의 자취를 쫓아온 것인지 모른다. 선 수행에 열심이던 스승을 대신해서 전쟁에 나간 벽암 각성 스님이니 사명당을 자기 생의 우상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지장전. ⓒ 안병기
이 암자는 한동안 쇠퇴기를 겪었던 듯하다. 그런다가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성원 스님이 감원으로 머무르게 되면서 산내에선 처음으로 비구니 선방이 열리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벽암 각성 같은 활달한 기상을 가진 스님이 머물렀던 암자가 비구니 선방이 되었다는 게 약간 아이러니하다. 선방은 60~70년대 중반까지 운영했다고 한다.
국일암은 'ㅁ' 자형에 가깝게 건물 배치하고 있다. 전각이라야 정남향을 한 법당과 그 뒤에 앉은 지장전과 요사채, 성원 노스님의 거처가 전부이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 크기의 이 지장전은 비구니 성원 스님의 원력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해우소는 없다

▲요사 옥상의 장독대. ⓒ 안병기

▲김천 청암사 것과 바슷하게 생긴 국일암 해우소. 처마 아래엔 삼태기가 걸려 있다. ⓒ 안병기

▲고방으로 보이는 맞배지붕 건물. ⓒ 안병기
국일암에서 나그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장독들과 해우소이다. 장독대에 놓인 수십 개의 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어떻게 저렇게 반질반질하게 닦아 윤을 냈을까. 부지런히 장독을 닦다 보면 정신도 저절로 반짝반짝 닦일 게 아닌가.
대문 옆에 있는 측간은 국일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앙증맞다'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귀엽다. 작고한 건축가 김수근은 승주 선암사 측간을 가리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측간이다"라고 했지만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규모를 얘기하는 게 왜 필요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 측간은 약간 작긴 하지만,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김천 청암사의 화장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해우소로 들어가는 문 없는 문 위엔 '정통'이라 쓰여 있다. 흔히 쓰는 정랑(淨廊)도 아니고 정통이다. 해우소로 들어가는 문엔 문짝이 달리지 않았으며 안엔 나무 바닥이 깔려 있다. '큰 일을 보신 후 왕겨 한 바가지를 뿌려 주세요'라고 벽보가 붙어 있다. 이 글귀를 보니 남원 실상사 해우소가 생각난다.
남녀로 칸이 구분돼 있긴 하지만, 개별 공간의 출입문은 없다. 저래 가지고 어디 볼일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낸 창은 이미 그런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환히 꿰뚫고 있다. 계곡 건너 숲에서 조릿대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망아(忘我)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알다시피 해우소란 근심을 푼다는 뜻이다. 육체에 맺힌 근심은 풀면서 정신이 품은 걱정은 잊게 해주는 것이다. 해우소 처마 아래엔 삼태기가 3~4개 걸려 있다. 아마도 해우소 분뇨를 치우는 데 쓰나보다. 아무튼 국일암은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걸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는 암자다.

▲고방 뒤편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 안병기
법당 왼쪽에 수줍은 듯 앉아 있는 맞배지붕 건물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하얗게 회칠한 벽과 지붕이 어울려서 매우 정갈한 느낌을 자아낸다. 판문이 달린 것으로 보아 곡식 같은 걸 넣어두는 고방으로 쓰이는 건물이 아닌가 싶다.
고방 뒤로 돌아가자, 커다란 호랑가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감탕나무과의 상록관목이다. 타원상 육각형으로 생긴 잎 끝에는 예리한 가시가 달려있는데 가을이 되면 열매가 적색으로 익는다.
서양 사람들이 산딸나무와 더불어 성목(聖木)으로 치는 나무다. 날카로운 가시는 예수의 가시관을, 빨간 열매는 예수의 핏방울을 상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나무로 인기를 끈다고 한다.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 조경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국일암을 나선다. 좀 전에 온 길이 아니라 암자 좌측으로 뻗은 큰길을 따라간다. 아마도 이 길이 해인사 쪽에서 접근하는 통상적인 길인가 보다. 한참 내려가다 보니, 왼쪽 산기슭에 부도 8기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다.
이곳에 벽암 각성 스님의 부도가 있다고 하지만

▲국일암으로 올라가는 산 기슭에 있는 부도밭. ⓒ 안병기
해인사 홈페이지는 " 이곳에 벽암 스님의 스승인 부휴 선수 스님과 도반인 희언 고한 스님·벽암 스님 등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고 돼 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주인공을 새긴 부도의 제액 부분이 희미해져서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다.
속리산 법주사 앞에 세워진 벽암국사비는 벽암 각성 스님이 스승 부휴 선수 스님을 만난 후 줄곧 그를 따라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을 유력(遊歷)했다고 쓰고 있다. 또 벽암대사의 사리를 조계산 송광사, 지리산 화엄사, 종남산 송광사, 속리산 법주사의 네 곳에 나누었다고 전한다.
서산대사 이후 보편화한 고승 사리를 분장하는 경향에 따라 사리를 여러 곳에 나누어 모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완주 송광사나 구례 화엄사에 가면 벽암당부도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알기로 각성 스님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스님의 부도 존재 여부가 그다지 대수로울 것도 없다. 높은 정신으로 살다 가신 여덟 분 스님들이 남기신 부도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존경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가닥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일 이곳에 벽암 각성 스님의 부도가 있다면 왜 안내판 하나 세우지 않는 것일까.
역사는 스스로 교훈을 주지 않는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전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전각 한 채를 세우려는 노력보다 부도 1기를 잘 관리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역사에서 무언가 배우려는 의지가 부족한 건 아닌지. 내려왔던 산자락을 다시 거슬러 올라 희랑대사가 수도했던 희랑대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