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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는 우리 나라 누각의 으뜸이다. 임진왜랜 때 불탄 것을 광해 임금이 중건했다. 그뒤 경인년 남북전쟁으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진주고적 보존회에서 복원하여 지금 전하고 있다.
▲ 촉석루 촉석루는 우리 나라 누각의 으뜸이다. 임진왜랜 때 불탄 것을 광해 임금이 중건했다. 그뒤 경인년 남북전쟁으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진주고적 보존회에서 복원하여 지금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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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지다. 그 옛날 변한의 수도였다는 진주는 지금도 그 옛날 변한의 수도 구실을 톡특히 하고 있다. 진주에 있었던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고 난 뒤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이 되었다. 그러자 이 지역 사람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 사람들이 도청을 되찾아 오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서부 경남 중심지로서의 진주의 역할은 여전하다 할 것이다.

진주는 내 고향 합천 삼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나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나와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략 오년 넘게 진주에서 살았다. 그 뒤에도 형제들이 진주에서 공부하고 처가 역시 진주에 있어 진주는 내게는 고향이나 진배없는 도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진주를 대상으로 여행기를 쓴다는 것이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한 번은 그려보고 싶어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촉석루는 남원의 광한루와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3대 누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남원사람이나 밀양사람이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지만 촉석루는 영남루나 광한루 보다 빼어난 이 나라 제일의 누락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촉석루 바로 곁에서 하숙을 했다. 그때의 하숙집은 촉석공원으로 바뀌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지만 흐르는 바람결에 따라 추억은 일렁이고 있다. 여름 한낮 촉석루 마루에서 땀을 식히던 일이며 여름밤이면 푸른 남강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즐기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은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그때만 해도 남강가 하얀 모래밭에 옷을 벗어놓고 선남선녀가 어울려 멱을 감기도 했다. 자살한 주검이 발견된 어느 날부터 그만두긴 했지만 새벽 일찍 가끔씩 냉수욕을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촉석루는 려말 김충광이 창건한 뒤로 7차례나 중건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광해 임금때 중건한 것이 근세까지 전해왔는데 육이오 남북전쟁으로 불타고 만 것을 1960년에 중건하여 지금 전하고 있다. 앞면 다섯칸과 옆면 4칸의 웅장한 건물은 진주시민의 넉넉한 쉼터가 되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 남강 가에는 3.7m×3.3m 크기의 의암이 있다. 의암위에 서면 푸른 강물위로 논개의 붉은 핏자국이 흐르는 듯하였다. 밤이면 남강 카바레에서 흘러나오는 풍악소리는 귀전을 두들겼다. 또한 시공관(극장)에서 마이크로 영화를 선전하였지만 그것이 그렇게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때만 해도 진주는 조용한 시골 같은 도시여서 그랬을까.

1963년 사적 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은 내가 진주에서 살 던 1960년대 후반에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지금보는 석축은 아마 겨우 삼사십 년 밖에 안 되었을 것인데 세월의 땟자국이 더덕더덕 끼었다. 남강가 촉석루 절벽으로 이어져 성곽은 밤에는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빛의 띠를 이루고 있어 보기가 좋다.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5년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으로 개조했다.  그 둘레는 1.7킬로미터에 이른다.
▲ 진주성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5년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으로 개조했다. 그 둘레는 1.7킬로미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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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의 북쪽 망루다.
▲ 북장대 진주성의 북쪽 망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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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 바로 아래에 승병의 지휘소가 있었던 호국사 절이 있다. 서장대 바로 아래엔 남강이 유유이 흐르고 있다.
▲ 서장대 서장대 바로 아래에 승병의 지휘소가 있었던 호국사 절이 있다. 서장대 바로 아래엔 남강이 유유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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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안은 촉석공원이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각종 전각과 북장대와 서장대와 같은 망루가 우뚝 솟아있다. 망루에 서면 흐르는 바람결이 그 옛날 진주성 대첩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1592년 10월 3만명이 넘는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 김시민 목사는 3800여명의 민관군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김시민 장군은 얼굴에 화살을 맞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 다음해 6월 10만여명의 왜적의 침입을 맞아 7만명의 민관군이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촉석공원안에 있다. 진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위인을 비롯 진주를 빛낸 인물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 비림 촉석공원안에 있다. 진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위인을 비롯 진주를 빛낸 인물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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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관아의 정문이었다.
▲ 영남 포정사 진주의 관아의 정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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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포정사는 경남도청의 정문이 되기도 했던 곳이지만 그 이전 벌써부터 진주성의 중심으로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포정사 앞에는 하마비가 있어 길손은 말에서 내렸던 것이다. 서장대 아래 산기슭엔 진주에서 가장 큰 절 호국사가 있다. 호국사는 의병들의 지휘소가 있었고 의병들의 집결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서장대 위에 서면 바로 눈 아래 굽어 도는 남강의 모습이 보이고 천수교 다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진주는 역시 남강이 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굽이치는 남강수는 진주의 젖줄이 되어 진주를 보석처럼 아름답게 가꾼다. 진주성을 밝힌 조명등은 진주의 밤을 더욱 정겹게 만든다. 진주성 성벽은 꿈틀거리는 용이 되어 진주를 감싸고 돈다.
진주성 포대를 복원한 건물로 여기 포를 설치 해 놓았다.
▲ 진주성의 포대 진주성 포대를 복원한 건물로 여기 포를 설치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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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문 밖에서 성문을 통하여 호국사를 들여다 보았다.
▲ 호국사 진주성문 밖에서 성문을 통하여 호국사를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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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강엔 다리가 5개 있다. 사진은 그 중 가장 윗쪽에 있는 천수교. 다리 밑 강물이 더욱 푸르다.
▲ 천수교 진주 남강엔 다리가 5개 있다. 사진은 그 중 가장 윗쪽에 있는 천수교. 다리 밑 강물이 더욱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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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다.
▲ 공북문 진주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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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 22일 진주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dharmanet.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진주성, #남강,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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