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1 -

옆지기 신발 뒷굽이 한쪽으로 많이 갈려서 걷기에 무척 나쁩니다. 낮에 인천 만석동 9번지 골목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에,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서 동인천 앞에 죽 늘어서 있는 신집에 들릅니다. 신 값은 보지 말고 바닥 튼튼하고 뒤꿈치가 안 까지면서 무게도 좀 가벼운 녀석으로 찾아보라고 하면서 어깨 너머로 무슨 신이 있는가 구경해 봅니다.

신발 바닥이 한쪽으로만 갈렸습니다.
▲ 옆지기 신 신발 바닥이 한쪽으로만 갈렸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옆지기보고는 값을 보지 말라고 했고, 저도 값은 안 보려고 했지만 얼핏설핏 보이는 신 값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바닥고무가 단단해서 웬만한 거님길에 쓸리지 않을 만해 보이는 녀석들 신값은 20% 에누리한 값이 4∼5만 원부터 7∼8만 원 안팎. 그나마 20% 에누리된 값이라 그렇지, 에누리 안 된 온값으로 치면, 어지간한 운동화 한 켤레에 10만원쯤 하는 셈.

한참 이 신을 보고 저 신을 살피지만 마땅한 녀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그냥 나오기로 합니다. 신 집을 나서면서 옆지기가 한 마디.

“어차피 비싸고 좋은 신발을 신어도 지금 이 신발처럼 여섯 달도 못 갈 거면, 시장에서 만 원짜리 싸구려를 여러 켤레 사서 신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신 집 앞에 있는 포장마차 할머니가 파는 오징어다리를 사 달라고. 지갑에서 2000원을 꺼내어 종잇잔에 담긴 오징어다리를 삽니다. 값을 치르고 건네 받을 때는 조금밖에 들어있지 않았거니 했는데, 하나하나 꺼내어 냠냠짭짭하다 보니, 할머니가 꾹꾹 눌러 담아서 퍽 많습니다.

동인천 지하상가로 들어가서 신 집 앞을 지납니다.

“신발들이 다 저렇게 생기기는 했지만 뒤꿈치가 까지는 단화예요.”

그런가? 그럴 수 있겠구나.

터덜터덜 아픈 발 때문에 느릿느릿 골목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뒷굽이 한쪽으로 갈려서 기울어져 있으니 얼마나 걷기 힘들꼬.

잠자리에 들기 앞서, “이러다가는 걸어다닐 수도 없으니, 내일은 송현시장에 가서 만원짜리든 이만원짜리든 신발 한 켤레 꼭 삽시다.”

- 2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등학교 여자아이들 발에 자꾸만 눈이 갑니다. 옆지기 신발을 사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신발도 살펴보는 셈인데, 학교 옷을 차려입은 여자아이들의 신은 거의 다 운동화입니다. 하나같이 신 집에서 꽤나 비싸게 팔고 있는 신발들.

인현동 지하상가에 있는 신집에 들렀습니다.
▲ 신집에서 인현동 지하상가에 있는 신집에 들렀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아이들의 걸음새를 봅니다. 발이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게 걷느라 뒷굽이 비뚜스름 닳는 아이들이 꽤 보입니다. ‘저 아이들도 신을 자주 갈아야겠구나. 그나저나 아이들이 왜 저렇게 걷지?’

신이 덜 닳게 걷자면 ‘로보트 걸음’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 걸음새를 생각해 봅니다. 무릎이 많이 올라가도록 걷는다면 신이 끌릴 일이 없으니 조금은 뻣뻣해 보일 수 있는 걸음. 그렇지만 신이 끌리지 않을 만큼만 무릎을 올려서 걸으면 뻣뻣해 보이지도 않고, 걷는 이 스스로 자신도 뻣뻣하다는 느낌이 없을 테지.

어릴 적 어머니는 “신이 끌리게 걷지 마라” 하셨습니다. 일부러 질질 끌다가 꿀밤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지루하게 걷던 길에 백 걸음, 천 걸음을 속으로 센 적 있습니다. 신이 끌리지 않으면서 몇 걸음이나 걸을 수 있나 하고 세는데, 사이에 한 번이라도 끌리면 처음부터 다시. 철길을 밟고 걸으면서도 하나둘 세기도 했고, 거님길에서도 일부러 끝쪽 돌만 밟으며 곧게 걸어 보려고 했습니다.

따로 걷는 연습을 한 셈은 아니고, 심심해서 이렇게 걸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이나 여섯 시에 집에서 나와 학교로 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이었고, 말벗할 사람도 둘러볼 사람도 없으니, 걷는 제 발만 보고 걷곤 했고, 집부터 학교까지 몇 걸음이 될까 헤아려 보기도 했습니다.

윤승운님 만화를 보면, 축지법을 쓰는 도사가 나옵니다. 축지법 도사는 길을 걸을 때 ‘1’ 자를 그은 듯 똑바로 걷습니다. ‘나도 저렇게 걸어 보면 빨리 걸을 수 있나?’ 생각하며 따라해 봅니다. 길에서 걸음 빠른 어른을 만나면 부러 그 아저씨를 따라잡으려고 꽁무니를 좇곤 했습니다.

- 3 -

송현시장에는 신 집이 없습니다. 인현동 지하상가로 들어갑니다.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어느 신 집으로 갈까 하다가, 운동화가 많이 보이는 한 곳으로 들어갑니다. 요모조모 살피며 요 신발 조 신발 신어 봅니다.

“많이 걸어다녀야 하니까 폭신하면서 바닥이 안 갈리는 신발로 신어야 해요” 하고 말하니, “신발이 안 갈리면 우리들은 어떻게 먹고살아요. 다 갈리기 마련이에요” 합니다.

옷장수는 사람들 옷이 자꾸 해지고 버리게 되어야 새로운 장사가 될 테고, 수선집 사람은 사람들 옷이 자꾸 뜯어져야 고치게 되면서 꾸준히 장사가 될 테지요. 사람들이 집이나 일터에서 쓰는 연장도 자꾸 닳고 망가져야 공구장수도 밥벌이가 되겠지요. 사람들이 차 한 대로 넉넉하다고 느껴서 열 해고 스무 해고 알뜰히 간수하면서 몰고 다닌다면, 자동차 회사며 자동차 가게며 영업사원이며 모두 굶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꼭 새 물건을 만드는 장사만 해야 할는지.

신 집에서 신기료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헌신을 고치고 헌신을 다독여 주는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새 우산을 값싸게 많이 팔기만 할 게 아니라, 고장난 우산을 고쳐 주는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옷장수는 옷만 팔지 말고 옷 고치는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어릴 적 일을 떠올려보면, 어머니 손을 잡고 찾아가서 옷을 사던 옷 집에서는 으레 옷수선도 함께 했습니다. 또는 옷가게에서 옷수선 집을 알음알이로 소개해 주고요.

서울로 책방 나들이를 할 때면 두 손으로 바리바리 드는 책들. 가방에는 벌써 책으로 꽉 찼고, 따로 두 손에도 하나씩 책꾸러미를 들고 가슴에 안고 해야 합니다.
▲ 책짐 서울로 책방 나들이를 할 때면 두 손으로 바리바리 드는 책들. 가방에는 벌써 책으로 꽉 찼고, 따로 두 손에도 하나씩 책꾸러미를 들고 가슴에 안고 해야 합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는 꼭 새로운 책을 자꾸자꾸 만들어야 할까요. 출판사가 깃든 동네에서 동네사람들을 모아 놓고 문화교실을 열 수 있지 않을까요. 조그마한 방 한 칸으로 동네도서관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요. 책 하나는 거저로 만들지 않고, 책 하나 만들기까지 수많은 다른 책과 자료를 살펴야 하는 만큼, 출판사 햇수가 하나둘 쌓이면 쌓일수록 자료로 두는 책이 늘어날 테니, 이렇게 늘어나는 책을 누구한테나 열어 놓고 나눈다면 더 좋을 텐데.

크고 작은 새책방은 책을 파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가볍게 찾아가서 이 책 저 책 홀가분하게 즐기는 도서관 구실도 합니다. 요사이는 만화책이나 잡지책이나 사진책에 비닐을 뒤집어 씌워서 구경을 못하게 막아 놓지만, 이런 책들을 빼고는 아무 때나 찾아가 즐겁게 둘러볼 수 있어요.

동네 헌책방도 도서관 구실을 합니다. 헌책방에는 비닐 씌워진 책이 없으니 새책방보다 한결 나아요. 더욱이 판이 끊어진 예전 책들까지도 덤으로 구경할 수 있고, 읽다가 마음에 들면 바로바로 살 수 있으니, 꽤나 멋진 도서관이라 할 수 있어요.

새책방에서는 틈틈이 ‘작가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일꾼이 책손들한테 ‘책과 부대끼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책을 잔뜩 고른 책손이 있으면, 오랜 세월 무르익은 솜씨로 착착착 재빠르게 끈으로 묶어 줍니다. 야무지게 묶인 책끈은 집에 들고 갈 때까지 풀리지 않고 책도 안 다칩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은 헌책방 일꾼이 끈으로 책 묶는 모습을 잘 지켜보았다가 나중에 써먹습니다. 자기 집을 옮길 때. 이삿짐 꾸릴 때, ‘헌책방 일꾼이 십자 매듭 묶는 솜씨’가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데요.

책을 아주 잔뜩 산다고 할 때는, ‘헌책방 일꾼이 책 나르는 솜씨’를 곁눈질로 배울 수 있습니다. 다친 책을 손질하는 방법도 헌책방 일꾼한테 배울 수 있습니다. 새책방에서는 ‘다친 책 = 반품’일 뿐이지만, 헌책방에서는 ‘다친 책 = 되살려 쓰기’입니다. 그리고, 헌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옛날 책갈피, 옛날 광고전단, 옛날 사진, 옛날 편지들을 보면서, 우리가 걸어온 생활문화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습니다.

- 4 -

2만원짜리 신을 삽니다. 헌신은 종이가방에 넣습니다. 지하상가에서 나와 골목길을 걷다가, 할인매장에서 귤 한 상자를 7900원에 팔기에 냉큼 삽니다. 귤 상자를 가슴으로 안으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송현시장 앞을 지납니다. 여기에서는 귤 한 상자를 6000원에 팝니다. 헉! 과일가게 앞을 지납니다. 7000원에 파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2만원짜리 새신은 얼마나 버티어 줄까요. 한 해? 두 해? 두 해까지 버티어 준다면 고맙습니다. 세 해를 넘긴다면 아주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 해만 버티어 준다고 해도 고맙습니다.

제 발이 되어 주는 고마운 길동무인 고무신.
▲ 고무신 한 켤레 제 발이 되어 주는 고마운 길동무인 고무신.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집으로 돌아와 제 고무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한 켤레에 3000원짜리 고무신. 딱 한 해를 신으면 뒤축이 다 닳아서 더는 못 신는 고무신. 돈 2만원이면 여섯 해 동안 넉넉히 신을 수 있는 고무신.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안 신는 고무신.

도시에서는 파는 데 없는 검정고무신. 시골에서는 웬만한 오일장에서도 들여놓지 않는 고무신. 농사 많이 짓는 깊은 시골 신집에서 겨우 살 수 있는 고무신. 가장 큰 치수가 280문밖에 안 되는 고무신. 처음 신는 사람은 뒤꿈치가 다 까지게 하는 고무신.

바닥이 얇아 자기가 밟는 땅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발목에 힘이 많이 받는 고무신. 도심지에서 신고 다니면 다들 한 번씩 쳐다보며 키들키들 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하는 고무신.

상표는 틀림없이 한글로 ‘타이야표’이지만, ‘made in China’가 새겨진 고무신. 고무신을 신은 사람을 만나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씨익 웃으면서 반갑고, 다른 고무신과 섞이어 임자가 바뀌어도 군말 없이 신고 다닐 수 있는 고무신.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태그:#책이 있는 삶, #책읽기, #신발, #신, #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