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 홈페이지


블랙코미디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끔찍하거나 병적인 풍자로 된 희극'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웃음을 주긴 주되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코미디란 뜻이다. 블랙코미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극 중 장치는 '풍자'이다. 인물의 행동이나 대사를  통해 특정한 사건이나 역사적 배경을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나 사회풍자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탠리 큐브릭이 1964년 초에 만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블랙코미디가 무엇인지, 블랙코미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 영화는 1963년에 개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케네디가 암살되는 바람에 개봉이 늦춰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큐브릭이 이 영화를 만든 계기가 '쿠바 미사일 위기' 때문이었는데, 이 미사일 위기는 케네디의 단호한 태도로 인해 일단락되었었다. 케네디는 큐브릭에게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의 소재를 제공한 후에 생명의 끈을 놓았던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극중 무대는 크게 보아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편집광적인 좌익 혐오증에 걸린 공군사령관 리퍼와 보좌관인 맨드레이크 대령이 갈등을 일으키는 사령관실이다. 또 하나는 리퍼의 핵공격 명령을 저돌적으로 수행하는 B-52 전략폭격기 내부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대통령과 장군, 고위 관료들이 모인 전략상황실이다. 영화는 세 부분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를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핵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지극히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먼저 이 영화는 전형적인 희극의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희극의 특징은 정상적인 상황을 비정상적으로 비틀어버리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광기어린 망상에 빠진 리퍼 사령관은 순전히 혼자만의 의지로 소련에 핵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현실에서 일개 공군사령관이 독자적으로 핵공격을 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큐브릭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이 영화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었다. 적어도 영화 자체만으로 보면 일개 공군사령관의 핵공격 명령은 가능해 보인다. 여기에 이 영화의 희극적 요소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전략상황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면 대통령은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냉정하게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군 장성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허수아비일 뿐이다. 자신이 승인한 'R' 작전에 의해 이런 상황이 도래하였음을 뒤늦게 안 대통령. 그는 합동참모장인 벅 터지슨의 "기왕에 이리 된 거 대대적인 핵공격을 감행하자"는 주장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터지슨은 리퍼 사령관의 복사판일 정도로 좌익혐오증에 사로잡힌 전쟁광이다.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리퍼 사령관과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상 두 장성은 지독한 파시스트이자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군인일 뿐이다. 큐브릭은 이 두 인물을 통해 관료주의와 편협한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치 출신 과학자 스트레인지 러브 박사의 광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희극적 요소이다. 그는 소련이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병기'에 대한 개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기계팔과 휠체어에 의지하는 러브 박사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백 미터의 갱도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자 1명에 여자 10명이라는 비정상적인 가족구조를 유지하면서 100년 정도 땅 속에 살면 인류는 다시 번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략상황실

전략상황실 ⓒ 홈페이지


큐브릭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아마 그가 의도한 것은 인간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인물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일 것이다. 그는 관료주의와 편협함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핵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도, 인류 공멸의 위기 속에서도 반공사상에 사로잡힌 광기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큐브릭의 이런 조롱은 사령관의 정신 나간 명령을 저돌적으로 수행하는 폭격기 조종사들을 통해서 그 정점을 달리게 된다. 모든 통신수단을 폐쇄하고 오로지 핵폭탄을 소련 기지에 퍼붓겠다는 충성심으로 뭉친 그들에게서는 그 어떠한 융통성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단 한발의 핵폭탄을 떨어트리기만 하면 된다. 사령관의 명령이 곧 조국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서 유연함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전략폭격기 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희극적인 요소들 - 가령, 포르노 잡지를 보면서 비행하고 비상품 목록에 콘돔과 스타킹이 있다든지 하는 것들 -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풍자적 장치이다.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를 비행기에서 벌어지는 코미디란 그 얼마나 유치찬란한가 말이다.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고 또 한편으론 위태로움을 간직한 전략폭격기가 소련 땅으로 날아가는 동안, 대통령은 소련 서기장과 함께 상황을 분석하면서 파국을 막고자 노력한다. 여기에 맨드레이크 대령의 필사적인 노력이 보태져서 마침내 폭격기들에게 철수 명령이 하달된다.  그러나 단 한 대의 폭격기에게만은 이 명령이 하달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이 폭격기는 모든 통신수단이 고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폭격기는 점차 소련 땅으로 날아가고, 여기에 소련이 비밀리에 개발한 '최후의 병기'가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단 한 발의 핵폭탄이 터지더라도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는 '최후의 병기'가 작동된다는 무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폭격기는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핵폭탄이 투하되는 장면도 지극히 희극적이다. 폭격기 기장이 핵폭탄을 탄 상태에서 지상으로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이다. 기장이 핵폭탄 위에서 외치는 환호의 휘파람 소리는 그 얼마나 서글픈지.  

 장엄한 버섯구름(?)

장엄한 버섯구름(?) ⓒ 홈페이지


영화의 엔딩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핵폭탄이 터지고, 버섯구름이 피어나는 엄혹한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멜로디. '우리 다시 만나리'라는 노랫말이 풍기는 냉소는 그 얼마나 냉정한지. 큐브릭은 영화의 말미에서까지 저주스럽게 냉소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기계 문명의 무식함과 위험성을 폭격기와 정신 나간 장군, 미치광이 과학자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면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풍자라는 장치를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영화였다. 큐브릭은 이 영화 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셋이>라는 영화에서도 SF영화의 전범을 보여준 바 있다.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게 영화를 만들어버린 큐브릭. 어찌 보면 그 또한 편집광적인 냉소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냉소주의는 결코 부담스럽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유포터에도 송고함
스탠리 큐브릭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풍자 냉소주의 블랙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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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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