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깨끗하고 친절하고 음식 솜씨가 뛰어난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심신이 상쾌했다. 상해의 민박집에서 만난 두 명의 총각들을 우연찮게도 남경의 민박집에서 또 만났다. 참 반가웠다. 그들은 상해를 거쳐 항주 황산까지 다녀왔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남경 답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더니 반나절 정도 돌아보고 바로 심천으로 이동하겠다는 것이었다. 의사소통이 되는가를 고민하지 않고 무작정 길을 떠나온 젊은이들이 기특하였다. 내가 십 년쯤 더 일찍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렇게 가벼운 배낭 하나 메고 길을 떠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남경이라! 중국을 대표하는 고도(古都) 중의 하나이며 중국의 4대 화로라고 할 만큼 더운 곳이라는 것, 명태조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곳이며 손문이 이곳에 임시정부를 세웠다는 것, 그리고 일본인에 의해 3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어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남경대학살기념관’이 있다는 것 말고는 이 도시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남경에 대한 첫인상은, 며칠 돌아다닌 도시에 비해 대단히 정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좀 낙후되었다는 느낌이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이 잠든 중산릉의 입구. ⓒ 조영님
오늘 답사할 곳은 중산릉이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손문(孫文)이 묻힌 곳이다. 민박집 주인이 일러주는 대로 집 앞에서 9번 버스를 타고 갔다. 중산릉은 1926년 3월부터 29년 봄까지 시공하였다고 하는데, 무덤이라기 보다는 울창한 삼림 속에 있는 거대한 공원같다. 손문이 평소 주창했던 ‘박애(博愛)’라고 쓴 글이 입구에 보인다. 손문의 수적(手迹)이라고 한다.
다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 쓰여진 능문을 지나니 국민당 담연개(譚延闓)의 친필이 있는 비정(碑亭)이 보인다. 천하위공이란 말은 예기에 나오는 말로 ‘군주는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평소 손문이 곧잘 인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비정에는 ‘중국국민당장총리손선생어차(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라는 금색 글씨가 쓰여져 있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오르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제당까지 오르는 수 백 개의 계단은 중산릉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엄청나게 많은 계단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손문이 중국역사에서 얼마만한 위상을 차지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계단은 정확히 392개라고 한다. 392개는 손문이 사망하였을 때 중국 인민 3억 9천 2백만 명이 손문을 애도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계단을 반도 오르지 못했는데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수건을 물에 축여 목덜미를 연방 닦아도 더위는 여전하다. 아들은 정말 계단이 392개가 되는지 밑에서부터 세고 있는데 어디에서 잘못 세었는지 맞아떨어질 것 같지가 않다. 여기에도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지 안내표지판에는 중문, 영문, 일문 그리고 한국어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392개의 계단은 손문을 애도한 중국 인민을 상징한 것이다. ⓒ 조영님
드디어 제당에 올라왔다. 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 즉 민족, 민권, 민생이라는 글자가 제당에 쓰여 있다. 안에는 손문의 조각상이 있어서 아들을 앞에 놓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묘실에는 손문의 와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 밑 지하에는 중국의 어느 지도자보다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손문이 묻혀 있다고 한다.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그의 유언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숙연한 마음으로 제당 안을 둘러보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촬영금지라는 안내표지를 미처 보지 못하고 촬영을 한 것이다. ‘미안하다’고 하고 가려고 하니, 그 군인이 필름을 꺼내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잘못하다가는 지금껏 찍은 사진을 몽땅 날려버리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잔뜩 긴장이 되었다. 곧 이것은 디지털 카메라라서 필름이 없다고 하고 가려고 하자,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손을 내밀면서 필름을 꺼내라는 것이다. 맙소사!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을 다시 보여주면서 제당 안에서 찍은 사진을 삭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더니 그제서야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국 인민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중국 지도자 손문이 잠들어 있는 제당에서 예의도 없이 촬영을 하다니! 간혹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황판단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셔터를 누르는 몰지각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중국 안내원에게 주의를 받은 터라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제당을 나서서 후원으로 갔다. 후원에는 중산릉을 건축할 때의 역사사료를 전시해 놓았다. 다시 392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중산릉 앞 숲에는 부채꼴 모양의 야외 음악대가 있는데 3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아이스크림과 과일을 먹으면서 땀을 식혔다.

▲명대에 건축되었다고 하는 무량전. ⓒ 조영님
다음 코스는 영곡사(靈谷寺)이다. 중산릉, 영곡사, 명효릉까지 볼 수 있는 관람표를 사면 셔틀버스로 이동할 수가 있다. 중산릉에서 약 5분 정도 걸린다. 영곡사는 종산(鍾山) 동쪽 자락에 있는 고찰이다. 육조시대에 창건된 개선사(开善寺)가 영곡사의 전신이다. 명나라 주원장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이곳으로 개선사를 옮기면서 사찰의 이름이 영곡사가 되었다고 한다. 천하제일의 선림(禪林)으로도 불린다.
영곡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명대의 건축양식인 ‘무량전(無樑殿)' 앞에는 5.3m 길이의 커다란 ‘돌거북이’가 있다. 표지판에는 ‘돌거부기’라고 되어 있다. 거부기는 거북이의 북한식 표기이다. 무량전은 나무가 아닌 벽돌로 건축하여 들보가 없다고 한다. 또 전에는 법당 안에 무량수불을 모셨기 때문에 ‘무량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현재 무량전 안에는 신해혁명 때 죽은 장군 110명의 청석비(靑石碑)와 신해혁명과 관련된 자료가 진열되어 있다. 비가 온 탓에 무량전 실내에는 습기가 가득하여 앞을 보기가 어려웠고 바닥은 물기로 질척거렸다. 사찰의 일부라기 보다는 신해혁명(1911) 때 죽은 열사들을 모신 사당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래서 좀 으스스하였다.

▲ 천하제일의 선림으로 불리던 영곡사. 공사중이라서 그런지 관광객이 많지 않다. ⓒ 조영님
영곡사에 들어가려면 입장료와 별도로 2위안을 내야 한다. 영곡사에는 대웅보전, 관음각, 삼성전, 장경루 등과 같은 부속건물이 있다. 고찰이라고는 하지만 찾아오는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또 사찰 한편은 보수공사 중이라서 그런지 좀 썰렁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부처님을 향해 간단히 삼배만 하고 나왔다.
영곡사 앞에는 중산의 유명한 경치중의 하나인 ‘팔덕공수(八德功水)’가 있다. 여덟 가지 좋은 점을 가진 물이 영곡사 앞으로 흐르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여덟 가지 장점이란, 맑고(淸), 시원하고(冷), 향이 있고(香), 부드럽고(柔), 달고(甘), 깨끗하고(淨), 목 메이지 않고(不噎), 병을 제거해(除病)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기로 유명한 물이 오늘 보니 검은 흙탕물이다. 비가 온 탓일까!
영곡사의 9층 석탑을 보아야 영곡사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는데 더위에 지쳐 한 걸음도 못 걷겠다고 하는 아들을 억지로 떠밀고 탑까지 갈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명효릉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