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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강원도 정선의 탄광 지역 고등학교에서 초임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뭐든 잘해보겠다는 의욕에 비해 아이들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품어줄 사랑은 턱없이 부족했던 게 그 시절 내 모습이었다.

학급 단합대회를 한다고 4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아이들을 학교에 남겼다. 음료수와 과자를 준비해서 먹이고, 축구와 배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이 있어 꼭 가야 될 아이마저 억지로 참여하도록 강요한 의욕 과잉의 시절이었다.

아침에 지각하는 녀석 버릇 고쳐준다고 상습 지각하던 한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준 적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아이의 사정을 알게 된 뒤 얼마나 후회했던지. 교통사고로 누워계신 부모님을 돌보면서 아침마다 다섯 종류의 신문을 배달해서 학비 조달하던 아이였다.

탄광 지역 학교 환경 또한 좋지 못했다. 학교 건물 바로 옆에 철도가 있어 기차 지나갈 때는 소음 때문에 수업을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 아이들의 학습 의욕도 높지 않았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아이들 몇몇을 제외하곤 학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 정도였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도 꽤 많았다. 수학이나 영어에 대한 기본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한글도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은수란 아이

우리 반 아이 중에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은수란 녀석이 있었다. 학기 초 은수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선생님이 어쩌다 수업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시키면 죽을 죄 지은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다. 이런 점만 빼면 다른 아이와 별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학교생활도 무던한 편이었다.

사월 초쯤으로 기억된다. 토요일 대청소를 시키고 교무실로 내려온 사이에 일이 터졌다. 청소를 하다 싸움이 시작되어 은수가 휘두른 주먹에 다른 아이 입술이 찢어진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듣고 교실로 달려가니 입술 찢어진 아이는 주저앉아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훌쩍이고 있었고, 때린 은수는 분이 다 풀리지 않았는지 주저앉은 녀석을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일단 피 흘리는 녀석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어 주저앉은 녀석을 일으키며 교실에 있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병원 갔다 와서 종례할 테니까 한 놈도 가지 말고 있어."

다친 아이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학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어서 돌아올 때는 걸어서 왔다. 걸으며 생각을 했다. 청소 시간에 싸운 은수를 어떻게 할까. 우선 싸우게 된 상황을 들어보고 야단을 치든 달래주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녀석들은 보내고 은수를 교무실로 불러 조용히 얘기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런 생각은 깨끗이 사라졌다. 남아 있던 녀석들은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교실 여기저기서 끼리끼리 모여 웃고 떠들고 심지어는 공을 차는 녀석들도 있었다. 친구를 때려 병원으로 보낸 은수도 공을 차는 아이들 틈에 끼어 웃고 있었다. 그 꼴을 보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있는 힘을 다해 교실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당장 자리에 앉지 못해!"

놀란 아이들이 후다닥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날 종례는 참 길었다. 감정 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잘못을 질책했다. 싸움을 해서 친구가 병원에 가 치료를 받고 있는데 잘못을 반성할 줄도 모르고 장난을 친 행위를 비난했다. 친구의 아픔을 이해해주지도 못하는 못난 녀석들이라고 야단을 쳤다.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반 전체 아이들을 혼내준 것이다.

긴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을 보내주었다. 때린 은수를 불러 싸움의 원인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때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선생님들이 다 퇴근한 토요일 오후,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게 되자 아무리 생각을 해도 녀석들이 괘씸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은수 녀석이 괘씸했다. 일 저지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태연히 교실에서 공을 차는 행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싶어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넘어 있었다. 병원에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무실에서 나와 교문을 향해 가는데 우리 반 교실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문단속도 안 하고 간 나쁜 녀석들'이라고 투덜대며 교실로 갔다.

한글을 모르는 은수가 쓴 편지

그런데 교실에 한 녀석이 앉아 있었다. 은수였다. 내가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여태 집에도 안 가고 뭐하고 있어?"

놀라 돌아보는 녀석은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녀석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지 않아?"

녀석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말 없는 녀석을 일으켜 세워 가까운 구멍가게로 데리고 갔다. 빵과 우유를 사서 먹으라고 했다. 받아든 빵과 우유를 먹지 않고 있던 녀석은 내가 먹는 걸 보더니 먹기 시작했다. 빵과 우유를 다 먹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먹고 난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나랑 병원에 가 볼래?"

한참을 생각하던 녀석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어서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 병원에 들러보니 다친 녀석은 치료를 끝내고 퇴원한 후였다.

그해 5월 15일 스승의 날, 은수가 교무실로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뭐냐고 물으니 그냥 웃기만 했다. 녀석이 보는 앞에서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편지지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선생님, 사랑해요."

삐뚤삐뚤 쓴 글씨. 한 달도 넘게 끙끙대며 배워 쓴 편지였다. 단 한 줄의 편지였지만 그 한 줄이 주는 벅찬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특별한 5월> 응모 글

이 기사 속의 은수는 가명입니다. 정선 기찻길 옆 이 학교를 다니던 당시의 아이들은 지금 삼십 대 나이가 되었을 겁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이제는 훌쩍 자란 그 시절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태그:#스승의 날, #강원도 정선, #탄광 지역, #초임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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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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