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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어디시죠?"
"예? 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 부모님 고향은요?"
"전라북도 순창입니다. 고추장으로 유명한."


저는 가끔 고향을 묻는 분들이 계실 때마다 머뭇거리곤 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선뜻 서울이라 하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바로 부모님 고향을 대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정서에 영향을 끼친 곳으로 고향을 묻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제 기억 속에도 '고향' 하면 태어난 서울 강북보다는 순창이 먼저 떠오릅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방학 때면 항상 한두 달씩 순창에 있는 친가와 외가에서 지내곤 했으니까요.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의 정겨움과,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물고기를 잡거나 곤충을 채집하러 산에서 뛰놀던 기억은 '고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살가운 풍경입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의 고향은 어디?

▲ 고층아파트와 고가도로 아래에서 펼쳐진 체육대회. 높이 솟은 조명등이 각박한 도시의 삶에 빛을 주려는 것일까?
ⓒ 최육상
지난 22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옆에 자리한 살곶이 공원에서 '재경 순창군 청년회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일손을 도우라고 하신 말씀도 있었고, 향우회는 어떻게 진행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또 좋은 경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낮 12시 무렵 대회 장소로 향했습니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과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였다는 '살곶이 다리'가 눈에 띕니다. 하천 위로 차들이 내달리는 고가도로가 있고, 그 뒤로 고층 아파트들이 키를 재는 모습이 보입니다. 조선과 현재의 역사가 겹치면서 문득, '향우회와 도시의 절묘한 만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인간 장벽을 두른 윷놀이는 웃음꽃을 피웠다.
ⓒ 최육상
체육대회는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약 8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11개 읍·면별로 출신지역을 구분해 놓은 천막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는 줄다리기가 한창이었고 본부석 뒤편에서는 윷놀이가 이어졌으며, 공원 여기저기서는 풍물패들이 체육대회의 흥을 돋우려 내뿜는 꽹과리와 징, 장구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습니다.

제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무렵이었는데 몇몇 사람들은 벌써 불콰해진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고향의 정을 나누는 데에는 중천에 솟은 태양의 강렬함도 별 장애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막걸리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꼬리에 꼬리를 잇는 웃음소리가 연방 천막을 들썩거렸습니다.

태양의 강렬함도 막지 못하는, 고향의 막걸리

▲ 잔치에는 역시 기름기를 쫙~뺀 삼겹살이 있어야
ⓒ 최육상
천막 한편, 맛있는 연기를 피워 올리며 숯불 위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삼겹살의 맛은 기가 막혔습니다. 막걸리 한 잔과 함께 기름기 쫙 빠진 삼겹살을 입 안 가득 밀어 넣으니, '이것이 고향의 맛이구나!'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낮술에 취하면 어미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벌컥벌컥 대여섯 잔을 받아 마시니 알싸하게 취기가 올랐습니다.

취한 기운을 빌어 어머니를 쫓아다니며 제게 참 많은 이모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옛 시절을 보낸 친구·언니·동생들이 모두 이모였으니까요. 그렇게 많은 이모들은 몇 번 뵀던 분과 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의 저를 기억하시는 분, 외가와 친가의 친척들을 잘 알고 계시는 분 등 이래저래 혈연·지연으로 한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혈연·지연·학연을 떠올릴 때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와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데에는 이만한 끈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부정되는 것은 부조리와 비리가 연결될 때의 일일 겁니다.

이 날처럼 술잔을 건네고 함께 운동장을 뛰는 모습에는 정을 두텁게 하는 혈연·지연·학연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읍·면으로 천막을 구분하기는 했지만 여러 천막 사이를 오고 가며 봄나들이를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이나 음식과 함께 봄날의 화사함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고향'에 대한 정겨움이 물씬 묻어났습니다.

국회의원과 군수도 참여해 정을 나누는 향우회

▲ 이강래 의원이 참석해 체육대회를 축하했다. 왼쪽부터 이홍기 향우회장, 김양섭 청년회장, 이강래 국회의원, 임주실 부녀회장, 박용구 명예회장.
ⓒ 최육상
체육대회가 축구 결승전을 치르며 종반에 이르고 있을 무렵, 이강래 국회의원이 참석했습니다. 이 의원은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남원·순창을 지역구로 둔 입장에서 순창군 향우회원들이 이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치르는 체육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고 축하 인사를 전했습니다.

향우회 회장단들과 한 천막에 자리를 잡은 이 의원은 "전라북도 새만금사업에 대한 향우회원들의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새만금 특별법안에는 서명하지 않았다"며 "사업성공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나, 서해안에 집중된 사업은 내륙지역인 남원·순창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국회의원이 지역구 향우회에 참석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주민들의 민심과 의견을 구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정치인의 행위는 어떤 것이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날 만난 이 의원은 향우회의 한 사람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체육대회를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 강인형 순창군수(왼쪽 2번째)와 향우회원들이 막걸리를 기울이느라 여념이 없다.
ⓒ 최육상
이런 모습은 강인형 순창군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른 아침 순창에서 올라 온 강 군수는 대회가 끝날 때까지 줄곧 자리를 지켰습니다. 선거 기간이 아닌 때에 이렇게 많은 주민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일 테지요. 강 군수는 술잔을 들고 천막을 옮겨다니면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진지하게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향우회는 힘겨운 도시의 삶에 힘을 줘요"

▲ 400m 계주를 준비하는 한 향우회원의 해맑은 웃음.
ⓒ 최육상
체육대회는 축구결승에 이어 400m 남녀혼성계주를 끝으로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끝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도착할 당시보다 더욱 불콰해졌습니다.

처음 만난 한 향우회원은 제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저는 서울이고 제 부모님 고향이 순창읍"이라고 답하자 그 분은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향우회의 의미를 잘 모를 거예요. 서울뿐만이 아니라 순창, 전주, 인천 등 각 지역에서 모인 고향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주고받는 정은 힘겨운 도시의 삶에 힘을 줘요.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을 봐요. 어린 나이에 사람 사는 정도 모른 채 이민을 가니까 그런 사고를 친 거 아니겠어요? 끈끈한 정이 있는 한 그런 사고는 어림없는 이야기죠."

어린 시절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다시 올라 오면, 저는 이후 한 달 정도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아따, 거시기허네∼", "워매, 어찌야쓰까∼"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불쑥불쑥 튀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얼마나 창피했던지….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신 뒤 그 창피함이 얼마나 철없던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이후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순창을 찾았을까. 정신적으로 자리 잡은 고향인 순창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도 이제는 색이 많이 바랬습니다. 각박한 도시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기 때문이겠지요.

저처럼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고향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서울 강북과 순창 중 제 고향은 어디인지, 부모님 향우회에 참석하고 나니 더욱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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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사람들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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