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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적이 사라진 벤포스타의 초라한 건물
ⓒ 이임주

"벤포스타 어린이공화국은 어른보다 어린이에게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보장한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일궈가는 것이다. 교과서가 아닌 약간은 지루한 듯한 일상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교육과 주민자치활동을 통해서. 월요일과 수요일 밤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어린이공화국의 주민 전체가 모여 주민총회를 연다.

일상 생활의 사소한 불편함부터 정책적인 결정까지 자유롭게 다루며, 벤포스타의 정신이나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한다. 벤포스타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으로 경제자립을 중요하게 여긴다.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나눠 한다. 자기가 맡은 일을 했을 때 공화국 독자 화폐인 코로나를 받을 수 있다. <한겨레> '벤포스타 탐방기 중'(2001년 9월 9일)"


몇 해 전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에버하르트 뫼비우스의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란 책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생각이 난다.

정말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대안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늘 무언가 부족함에 갈증을 느꼈던 나는 우리의 이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그 곳에 직접 가서 행복한 아이들의 눈을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상을 실현으로 옮긴 실바 신부를 만나 내 갈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행히 최근 영국 에머슨 대학에서 슈타이너 교육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유럽 내 공동체와 꼭 가보고 싶었던 몇몇 단체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몇년 전 전해들은 '벤포스타', 바로 이거였다

ⓒ 보리
물론 벤포스타는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뻗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아무리 찾으려 해도 인터넷 홈페이지는 물론 그 곳에 닿을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었다.

이곳 저곳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벤포스타에 관련된 전화는 다 해봤으나 그 때마다 헛수고였다. 그리고 벤포스타에 꼭 가보고 싶어 하던 한국분들을 인터넷상에서 몇몇 만날 수 있었다. 그 분들 역시 가보고 싶지만 마땅히 닿을 길이 없는 듯했다.

다행히 같이 공부하는 스페인 사람 헤수스(jesus)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는 이 곳에 오기 전 미술교사였는데, 그 분이 사이트를 뒤지면서 관련 정보를 찾고 지인들을 통해 벤포스타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스페인에 살고 계시는 그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친구 말에 따르면 벤포스타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고 건물은 엉망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실바 신부는 재정 문제와 성적인 문제(믿고 싶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성적인 부분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확인하진 못했다) 등등 여러 복잡한 문제로 어디로 사라진지 오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그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분에게 벤포스타의 주소는 얻을 수가 있었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올해 4월 초 무작정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벤포스타 찾아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싣다

▲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하면서 어렵게 벤포스타를 찾아갔다.
ⓒ 이임주
4월 11일 오비에도에 있는 아스투리아스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바로 벤포스타에 가고 싶었지만 그곳과 연락이 닿지 않아 첫날은 오비에도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일찍 벤포스타가 있는 오렌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1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 그 곳에서 다시 세이살보행 버스를 탔고, 30분 뒤 종점에 도착했다. 내려서 30분쯤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니 벤포스타의 푯말이 보였다.

벤포스타를 찾기까지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던 나는 많은 어려움에 부딪혀야 했다. 손짓발짓으로 모든 대화를 해야 했다. 하지만 상업적인 도시와 많이 떨어져 있는 탓인지 너무 순박하고 마음이 고운 사람들을 만나 무사히 벤포스타가 자리했던 오렌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척 한적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치 꿈 속 같은 아득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공화국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이었다.

오렌세 역에 내리자마자 인포메이션센터에 가서 무작정 주소를 내밀었고 그 분들은 드문드문한 영어로 "이제 더 이상 그 곳은 없다"고 말했다.

"알고 있지만 꼭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 곳에 도착하는 길을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예전에는 벤포스타의 서커스단 이름인 무차초스라는 이름을 마을 지명으로 쓴 것 같은데, 지금은 지명이 '세익사보'로 바뀐 듯 했다.

마지막 종점인 그 곳에 내려 이제는 익숙해진 손짓발짓과 드문드문 익힌 스페인어를 동원해 물어보며 한참 굽이굽이 올라가다 보니 '벤포스타'라는 푯말이 보였다.

푯말을 본 순간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이 곳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며 나를 반겨주기를 바라며 입구까지 걸어갔다. 정말 책에서 보던 사진과 그대로였다.

꿈은 사라지고 쓸쓸함만 덩그라니

▲ 벤포스타 입구
ⓒ 이임주
하지만 뭔가 삭막한 기운이 맴돌고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막혀있는 입구를 넘어 조금씩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기고 있는데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 곳에 남아있는 쳥년 한명이 영어를 드문드문 할 수 있어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로베르토(22). 과르말라에서 왔으며 7년 전부터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청년에 따르면 2000년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2004년엔 완벽하게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아무도 없는 그 곳에 다섯명의 소년들만 남아있다고 했다.

▲ 벤포스타란 이름은 세익사보로 바뀌어 있었다.
ⓒ 이임주
그는 벤포스타가 사라진 것을 무척 슬퍼하며 이곳저곳 건물들을 소개해주었다. 정말 건물들은 책에서 보던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실바 신부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영어를 잘 못해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을 무척 답답해하며 안타까워했다. 영어로 못다한 말은 스페인어로 직접 내 수첩에 적어주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정말 살고는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할 만큼 그 곳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청년과 아쉬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벤포스타를 돌아서는 마음이 너무 짠하고 뭔가 가슴에서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꿈꿔왔던 것은 그저 막연한 꿈이었던 것일까? 이상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그 곳엔 그저 몇 십년 전 아름다운 이상을 꿈꾸었던 쓸쓸한 존재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벤포스타'란 어떤 곳인가

1956년 실바 신부와 열다섯 명의 아이들은 에스파냐 오렌세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여러 아이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이 나라를 이웃 사람들은 '어린이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벤포스타 나시온 데 무차초시'. 우리 말로 하면 '벤포스타 어린이 나라'라는 뜻이다. 벤포스타란 말은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포도농장의 별명으로 '위치가 좋다'는 의미다.

1957년 이 곳 아이들이 에스파냐 청소년 하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국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1964년 서커스 학교를 만들어 다시 한 번 관심을 끌었다. 여기엔 에스파냐의 유명한 서커스 집안 출신인 실바 신부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초기엔 남자아이들만 있다가 1973년 이후 여자아이들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네 살에서 열다섯살 아이면 누구나 이 곳 주민이 되며, 대통령을 비롯 장관, 시장 등이 다섯 개 행정구역을 맡아 다스렸다.

또한 신청자에 1년 동안 '큰 모험'이라는 특별 수련을 받는데, 병원에서 한 달, 고기잡이배에서 한 달, 교도소에서 한 달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체험을 한다.

벤포스타는 다른 나라에도 전파돼 콜롬비아 보고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볼리비아 코차밤바에 만들어졌으며, 일본 도쿄, 콜롬비아 라구아히라, 니카라구아와 모잠비크에 대사관이 세워져 있었다.

▲ 이상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그곳엔 그저 몇 십년 전 아름다운 이상을 꿈꾸었던 쓸쓸한 존재들만 남아있었다.
ⓒ 이임주

태그:#교육, #대안학교, #벤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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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동백작은학교에서 생태, 인권,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며 아이들과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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