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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 히데키
일본 '소학상' 수상 만화인 모리 히데키의 <묵공>. 춘추전국시대 묵가의 사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상으로 실현해 가고자 하는 '혁리'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그린 작품으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만화다.

영화 <묵공>이 곧 개봉한다고 한다. 영화는 원작 중 전반부인 양성전투를 스크린으로 옮긴 것으로 류더화가 혁리 역할을, 공격하는 조나라의 대장군 역은 안성기가 맡았다. <묵공>은 그 소재 자체가 한국과 중국에 친숙하고, 만화 원작의 경우 마지막을 일본에 '올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세 나라 모두 싫어하지 않는 내용이랄 수 있겠다.

전쟁을 미워하고 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가 사상. 묵가란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에 반전 이론을 펴는 이들로 묵자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전쟁을 살인행위이며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불의라고 주장했다. 주로 성읍 방위 전에 한해서 활동을 했고 그들이 고안한 전술은 전적으로 수비에 치중된 것들이었다.

묵가는 제자백가(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중에서도 가장 실천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혁명가 집단이었다. 초기 묵가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으로 전쟁을 사라지게 하려는 봉사자들이었다.

묵자의 삼대 제자인 전양자(田襄子)에 와서 변질되었지만 실제로 묵가는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쟁의 기술을 연구했다. 손자병법이 공격에 관한 것이라면 묵가병법은 오로지 수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방어적인 전쟁은 지지했으며 약자의 편에서 공격도 했다고 한다.

민중의 편에서 묵묵히 평화를 갈구하는 '혁리'

▲ 실감나는 전투장면
ⓒ 모리 히데키
그 묵가의 제자들 중 최고의 실력자인 혁리가 바로 이 만화 <묵공>의 주인공이다. 작가인 모리 히데키는 거친 화법으로 전투 과정과 전쟁의 참혹함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해 냈다.

춘추전국시대의 강대국 조나라가 인접국 연나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한다. 그 길목에 위치한 연나라의 초라한 성 양성. 인구가 4000명 남짓인 작은 성은 조나라의 대군을 막을 방도를 못 찾아 묵가에 지원을 요청하고 그에 따라 묵가인 혁리가 도착한다. 수백 명의 원군도 아니고 달랑 혼자에 그것도 작고 볼품없는 모습이라니, 뚱보 성주와 백성들은 실망을 한다.

▲ 혁리(위)와 황 장군
ⓒ 모리 히데키
혁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보통 '영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영웅들은 전부 미남에다 천하장사'란 환상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혁리가 조나라 군대를 맞아 보여주는 신념과 지도력은 양성 주민들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과 함께 조나라 명장 항엄중이 이끄는 10만 대군과 맞선다.

공격장인 황 장군과 성을 지켜야 하는 혁리. 황 장군은 혁리에게 모의 전쟁을 해 보자고 제안한다. 황 장군은 묵가의 저력을 알고 있으며 혁리는 황 장군의 실력을 알고 있다. 양성의 모형을 놓고 서로가 전략 전술을 동원하여 사전에 승패를 예측해 보는 것이다. 바둑알로 시작된 모의 전투에서 온갖 전술을 다 동원했음에도 양성은 함락되지 않는다. 결과가 그랬다 하더라도 전쟁을 물릴 수는 없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칠 것인가. 혁리, 그가 보여주는 신기에 가까운 능력은 마치 우라사와 나오키 작품 <마스터 키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전쟁은 군웅들에게 어떨지 몰라도 강한 나라 건 약한 나라이건 일반 백성에게는 고통일 뿐이다. 혁리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편에서 묵묵히 평화를 갈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터전인 묵가로부터도 쫓기는 신세가 되어 떠돌아다니게 된다. 만화를 읽다 보면 혁리에 대한 깊은 철학에 빠져 어느새 그가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묵가의 대표적인 인물 묵자(墨子, BC480~420)는 이름이 적(翟)인 송나라 사람이다. 그는 유가학설을 공부했지만 후에 독창적으로 묵가학파를 세웠다. 묵자는 겸애, 비공, 상현, 상동, 천지, 명귀, 비락, 비명, 절용, 절장의 10대 주장을 내세웠는데 특히 '겸애(兼愛)'는 묵자학설의 핵심이다. 

겸애란 다른 사람과 자기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으로 묵자는 사회가 혼란에 휩싸여 서로를 공격하는 원인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있으니 서로를 사랑과 이익으로써 감싸 안으면 사회는 평등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관리에게는 영원한 고귀함도 없고, 백성에게는 영원한 비천함이 없으니 유능하면 등용하고 무능하면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묵자는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송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한 적이 있었으나 후에는 지위가 낮아져 수공업 노동자가 되었다. 그의 학설은 전국시기 혼란한 사회에 처한 소생산업자가 자기의 지위 개선을 바라는 평등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평등의 요구는 자연히 통치계급의 의도와는 부합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진한(秦漢) 이후에 묵가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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