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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22 15:50최종 업데이트 04.11.23 10:29

매국의 문, '위문'을 걷어치워라!

'위문'은 일제통치의 산물... 원 이름 '백운문' 찾아야

대한민국 국보 제1호는? 기성세대는 남대문, 젊은 세대는 숭례문이라 답할 것이다. 왜곡된 부침의 역사가 남긴 간극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문(城門)은? 아마도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 삼각산(북한산)을 올라본 사람이라면 이내 대답할 것이다. 위문(衛門)! 그렇다. 위문은 삼각산 정상인 백운봉(836m)과 만경봉 사이 고갯마루에 있다. 왜 그 높은 곳에 성문이 있을까?

숙종(肅宗) 37년(1711년) 한성의 도성을 외곽에서 방어하고 유사시 궁을 옮겨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자 삼각산에 북한산성을 쌓았다. 경기도 북한리를 중심으로 주변의 봉우리들과 마루금(능선)을 이용해 쌓은 이 성은 총길이 13km에 달하는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우러진 요새였다.

북한산성에는 5대문과 7암문, 수문 이렇게 해서 14성문이 있는데 위문은 보급로나 비밀통로로 이용되던 암문이었다. 전략적으로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만든 문이었기에 문루(門樓)도 없고 규모도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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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의 위문은 특별하다. 가파른 산중에 있으면서도 도심의 숭례문처럼 번잡하다. 한 해 삼각산에 오르는 등산객이 수백만에 이르고, 정상인 백운봉에 오르려면 누구나 위문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위문은 등산객들로 북새통이다.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과 내려오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것이다. 북한산성의 첫 관문인 대서문보다 위문이 더 유명한 까닭이다.

특별한 점은 하나 더 있다. '衛門'이라는 이름이다. 북한산성을 군사용으로 생각해 보면 사뭇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수도 서울을 호위하며 드높은 기상을 자랑하는 장군봉들 사이에 연결고리와 보루 역할을 하는 성곽과 성문이 있다. 그래서 다른 성문들과는 달리 지킬 위(衛)자를 취한 것일까?

위문은 작은 암문일 뿐이지만 산성의 방어 구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더욱 위풍당당해 보인다.

삼각산 북한산성 백운문(위문)
삼각산 북한산성 백운문(위문) ⓒ 김남용
그러나 '위문'은 거짓이다. 비수를 품고 있는 반역의 유산이다. 기자의 주장이 도발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간의 끝까지 함께 가보시라.

(고증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하게 동기를 밝히고자 한다. 기자는 산행을 좋아해 삼각산에 드나들다 위문이라는 독특한 이름에 자연스레 의문을 가졌지만 역사와 문화에 문외한이라 처음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편집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궁금증에 시달리다 분에 넘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북한산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서울시 문화재과, 경기도 고양시에 위문의 유래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다. 적어도 관리 관청이라면 이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가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 한결같이 "모른다", "없다"는 답변만 보내왔다.

문화재청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위문이 심각한 오류를 갖고 있다는 민원을 넣기도 했지만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담당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기자는 당황했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광화문에 위문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어도 복지부동했을 것인가?

자신의 역량 밖이라는 자괴심을 애써 억누르며 기자는 도서관을 뒤질 수밖에 없었다. 전문지식도 없이 시작한 막연한 출발이었지만, 누런 더께가 쌓인 문헌들을 한꺼풀씩 벗겨가면서 조금씩 확신을 얻어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자보다 먼저 북한산성의 가치를 깨닫고 의미를 되살리고자 한 분들의 저서는 든든한 동지이자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지난 1월 출간된 민경길씨의 <북한산>(집문당, 전3권)은 기사를 쓰는 내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음을 일러둔다.)


위문에 의한 백운문폐위사건

위문의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 또는 '백운문'이다. 삼각산 정상인 백운봉에서 따온 이름이다. 북한산성의 다른 암문들도 마찬가지다. 용암봉 아래 용암문(용암봉암문)이 있고, 보국사 위에 보국문이 있으며, 부왕사 위에 부왕문(부왕동암문)이 있는 것처럼 암문들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지명이나 고찰에서 이름을 빌렸다.

백운문이 제 이름을 빼앗기고 위문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제점령기부터다. 일제의 조선왕조폐위사건에 견주어 기자는 위문의 등장을 백운문폐위사건이라 규정하고 수개월 동안 직접 위문의 실체를 추적하고자 했다.

조선시대의 북한산성 관련 문헌들에는 암문, 백운봉암문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성능의 <북한지>를 들 수 있다. <북한지>는 북한산성 축성과 관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팔도도총섭 성능이 북한산성의 연혁과 축성 과정, 지형지물을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이 때문에 전문기관에서도 북한산성을 고증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하는 자료다.

이 성에는 14개의 성문이 있다. 북문·대동문·대서문·대성문·중성문 이상 다섯 개 문은 높이가 11~13척, 너비가 13~14척으로 홍예(虹蜺) 형태의 문에 초루(譙樓)가 설치되어 있다. 소동문·소남문도 홍예문을 만들었고, 서암문·백운봉암문·용암봉암문·동암문·청수동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 등 아홉 개 문은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다. 또 수문이 있는데 높이가 16척, 너비가 50척이다.(<북한지>성지(城池)편)

또 <비변사등록>의 <북한축성별단>(1711)에도 '백운봉암문'이라 기록되어 있다. <북한축성별단>은 북한산성이 완공되자 비변사에서 그 과정과 내용을 기록한 문헌이다. 이후 조정에서 북한산성에 관해 기록할 때는 주로 이 두 가지 문헌을 바탕으로 삼았다.

'백운문'은 조선시대 문헌에 시퍼렇게 살아 있어

이처럼 널리 알려진 문헌에 성문의 본래 이름이 존재하는데도 '위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는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인쇄물에서 이름이 바뀐 시점과 그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국토와 사회·문화 전 분야에 걸쳐 치밀한 조사 작업을 벌였다. 고적조사와 토지조사가 대표적이다. 겉으로는 조선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결과를 보면 수탈이 주요 목적이었다. 고적조사는 <조선고적조사보고>로, 토지조사는 1931년까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지형도(1:25,000)인 <조선반도지도집성>로 귀결되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조사보고>의 <경기도고양군북한산유적조사보고서> 35쪽을 보면 '白雲門(일명 介口營門)'이 등장한다. 이는 북한산성의 14성문 이름을 고증하기 위해 당시 태고사 주지였던 이자훈(李慈訓) 스님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백운문'으로 쓰였으나 '개구녕문'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보고서에서는 <북한지>를 인용하여 '백운봉암문'이라 표기하고 있다. 위문은 보고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931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발행 <북한산> 지형도
1931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발행 <북한산> 지형도 ⓒ 김남용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지형도의 바탕이 된 <조선반도지도집성>의 '북한산' 지형도에는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봉우리는 물론 북한산성 성문 이름들도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백운문'이 빠져 있다. 지도에서처럼 성문 표시만 되어 있을 뿐이다. 역시 위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도 작성자의 단순한 실수일까?

'북한산' 지형도는 이후에 발행된 모든 지도의 바탕이 되었다. 지도뿐만 아니라 여행안내 책자에도 그대로 이용되었다. 이는 <조선고적조사보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사 작업이 진행 중이던 1910년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발행된 <경성안내>나 <조선명승기행>과 같은 관광안내 책자에서는 북한산성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간행물로 1934년에 발간된 <경성부사>의 제8장 북한산성 부분을 보면 <북한지>의 기록과 현존 성문 이름을 비교하고 있는데 '백운봉암문'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공식 문헌에 '위문'이 등장한 시점은 1930년대 중후반이다. 1937년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발간한 <北漢山:京電ハイキングコ-ス>에서 최초로 위문이 발견되었다. 표지의 등산지도와 등산길 목록에는 '衛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등산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 5쪽을 보면 '衛門(白雲門)'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공식으로는 위문을 쓰되 백운문이라는 이름도 살아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책은 표지 디자인만 달리해 1943년 다시 발행되었다. 적어도 해방 바로 전까지 백운문은 희미하게나마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1937년 경성전기주식회사 발간 <북한산> 표지의 등산지도
1937년 경성전기주식회사 발간 <북한산> 표지의 등산지도 ⓒ 김남용
해방 전까지 생존이 확인된 백운문, 해방 후 완전히 사라져

그러나 북한산성과 관련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제작한 여러 인쇄매체를 뒤져봤지만 백운문은 없었다. 백운문 또는 백운봉암문이라는 본래 이름이 완전히 사라진 반면 위문이라는 이름이 단독 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지형도나 언론 기사에서도 쉽게 위문을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 1962년 9월 21일 금요일자 6면을 보면 '선데이가이드:서울근교하이킹코스 <서울의 진산 북한산>'이라는 기사에 위문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발간한 <북한산>과 내용이 흡사하다. 같은 계열사인 <월간 山>에서도 삼각산 등산길을 소개할 때 어김없이 위문이라 쓰고 있었다. 당시에는 언론사가 한 축이 되어 산악운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언론매체의 정보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1962년 9월 21일 금요일자 6면 기사
조선일보 1962년 9월 21일 금요일자 6면 기사 ⓒ 김남용
혹자는 성문이나 사찰 이름이야 시대 여건에 따라 변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실제로 대서문->서문->대서문, 동문->동북문->소동문->대동문, 소남문->대남문 등 북한산성의 다른 성문들의 이름도 변천해 왔다. 그러나 위문은 기록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천한 이름이 아니라 창씨개명한 왜색풍의 이름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衛門'을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지키는 문'이다. 군대에서 쓸 수 있는 용어로 위병소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위문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대 국어사전에서도 다루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에 장수와 군사가 궁궐 안에 들어가 위문을 설치하고 숙직하는 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산성 성문의 역할과는 전혀 목적이 다를 뿐만 아니라 널리 쓰인 제도도 아니었다.

위문에 대비되는 이름으로는 아문(衙門)이 있다. 조선시대에 아문은 관아나 관아를 드나드는 문을 뜻했다. 또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처리하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처럼 군사체계와 관련이 있다. 굳이 백운문이라는 고유한 이름을 버리고 군사 성격의 이름을 취하고자 했다면 위문이 아닌 아문을 썼을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衛門'이 보통명사처럼 널리 쓰여 왔다. 경위를 담당하는 무관의 관공서로 좌우위문부(左右衛門府)와 좌우병위부(左右兵衛府)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의 치를 떨게 했던 일본 헌병체계에도 위문부가 있었다.

더구나 에몬[衛門]은 무사들이 활극을 벌이던 시대에 주로 사내아이 이름에 붙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버지 '木下彌右衛門'이나 겐우에몬(源右衛門)처럼 일본인의 이름에서 쉽게 '衛門'을 찾아볼 수 있다.

위문은 일본에서만 두루 쓰는 보통명사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폐위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합방조약체결로 일제는 우리 국토를 강제 점령했다. 일제는 곧바로 조선 근대화를 명분으로 한반도 수탈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제국주의에 복종시키기 위해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을 펼쳤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선전구호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수탈의 부라퀴에 북한산성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북한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지에 일본 헌병주재소가 설치되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주로 독립군을 색출하는 일이었으나 그것을 빌미로 북한산성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사찰이나 성랑을 불태우거나 거주민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던 것이다. 일제가 삼각산 백운봉과 노적봉에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던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일제가 창씨개명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뽑고 있을 때 '백운문'도 '위문'이라는 왜색 이름으로 바뀌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산악회를 중심으로 행군(등산)이나 암벽과 같은 산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위문을 누가 달았는지는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일제가 만든 지형도에서 백운문이 누락되었고, 그 지도를 바탕으로 등산지도나 등산 관련 책들이 발행되었으며, 이름을 잃은 성문에 누군가 자의적으로 위문이라는 괴이한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여태 우리는 '관습'대로 일제 지형도를 복사하고 있고, 삼각산 백운봉에 오를 때마다 위문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다.

우이동 도선사길을 따라 오르다 백운대매표소-하루재-백운산장을 거쳐 백운문에 닿으면 맨 먼저 위문이라는 문패가 보이고, 왼쪽으로 안내판들이 어지러이 서 있다. 그 중에 경기도 고양시에서 세워놓은 경고성 안내문이 등산객들의 눈을 자극한다.

안내문

이 산성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호 관리되고 있는 대한민국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입니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은 후세를 위한 우리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를 손상케 하였을 시는 문화재보호법 제81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규정에 의거 처벌(3년 이상의 유기징역) 받게 됨을 알려드리오니 산성 또는 주변 시설을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고양시장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누가 누구를 처벌한다는 말인가! 멀쩡한 우리 이름을 버리고 위문을 쓰고 있는 것은 독도를 죽도라 부르는 일처럼 매국 행위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친일과 사대의 모순에 빠져 있다.

아서라. 언제까지 미필적고의의 역사 왜곡에 동의할 것인가? 어디 위문뿐이겠는가? 시대 명제로 떠오른 친일역사청산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좌파의 음모'라며 설레발을 치는 무리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며 이 시대의 지배세력임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위문! 너를 보며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우리네 독립투사들을 떠올리기엔 너무나 가벼운 이름이 아닌가, 조막손이라도 달려가 떼어버리면 쓰레기통에 처박힐 뿌리 없는 '장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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