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의 자료관은 평일인데도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많은 청소년과 외국인들로 분주했다. 숨소리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 원폭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1945년의 나가사키 모습은 성스런 공간을 연출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1945년 8월 6일 그리고 8월 9일
신형폭탄인 원자폭탄 ‘리틀보이’(길이 3m, 직경 70cm, 중량 4톤의 우라늄탄)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지금까지 전혀 사용해 본적도 없는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일본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사흘 후 1945년 8월 9일 아침 3시 무렵 미국은 티니안 기지에서 새로운 원자폭탄 ‘패트맨’(길이 3.2m, 직경 150cm)을 싣고 2차 폭격을 위해 고구라로 향했다. 하지만 구름이 잔뜩 덮여 있어 목표지점을 배회하던 ‘복스카’호는 연료부족으로 목표를 나가사키로 바꾸었다. 나가사키의 운명은 이렇게 선택되었다.

▲피폭 2일 전 나가사키(미군 촬영) ⓒ 원폭피폭사진기록자료집
히로시마는 당시 서일본의 중심지로 총감부, 철도국, 체신국, 재무국, 전매국, 군수관리국 등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군 관련 인원만 약 9만명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강제연행 된 많은 조선인이 병기창,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등 군수공장에서 징병과 징용으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나가사키도 일본 제일의 군함제조를 자랑하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군수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조선소에만 7000여명의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있었다.

▲피폭 3일 후 나가사키(미군 촬영) ⓒ 원폭피폭사진기록자료집
원자폭탄
나가사키에 투하된 패트맨은 열과 광선, 폭풍과 폭압, 방사선 등 엄청난 에너지로 땅 위에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싹 쓸어 버렸다. 공중폭발로 폭원이 140m에 달하며 불덩어리의 표면온도가 9천도, 지상의 투하 중심지도 4천도에 이른다(철을 녹이는 용광로의 온도가 1500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원폭으로 인한 열상으로 가옥이 전소되고, 사람이 불에 타거나 다행히 목숨을 건져도 평생 동안 게로이드(ゲロイド, keroido 화상·궤양이 아문 후에 게발 모양으로 불거지는 융기)가 남아 있다.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9000도에 이르는 고열로 급격한 대류현상이 일어나 강력한 폭풍과 폭압 현상이 나타났다.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의 내장이 파열하여 죽기도 하였으며, 고막파열과 출혈, 난청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나무, 벽돌, 유리 등 건물의 잔해가 폭풍에 날려 사람과 가축을 살상하였다. 특히 방사선은 열상, 폭압 등 물리적 살상과 달리 보이지 않지만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남겼다. 방사선은 원자폭탄 중심지에서 1㎞ 이내에서 치명적이며 2㎞ 이내에서도 인체 조직 안으로 침투하여 중추신경이나 세포를 파괴하여 중대한 장애를 일으켰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패트맨(뚱뚱보)의 모형 ⓒ 원폭자료관 자료집

▲피폭 후 미군기에서 촬영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 원폭자료관 자료집
"1945년 8월 9일 우리들은 결코 이 날의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은 원폭투하 중심지 공원, 평화공원, 자료관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플릿 표지에는 원폭으로 멈춘 시계와 함께 "1945. 8. 9. 우리들은 결코 이날의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 있다.
원폭자료관은 지하 2층의 상설 및 기획전시실, 지하 1층 자료관, 평화학습실, 서적판매점, 1층 도서실, 비디오코너, 아동도서코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반 200엔(단체 160엔), 초중고생 100엔(단체 80엔)을 받고 있다. 여기에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스페인어로 된 가이드 리시버를 원할 경우 대여료가 150엔이며,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설명판이 준비되어 있다.

▲원폭투하 중심지 ⓒ 김준
상설전시실에는 원폭 투하되기 전, 나가사키 번화가의 모습과 풍경, 시민들 일상생활 속의 피폭상황 등을 보여주고,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파괴되었음을 말해주는 11시 2분을 가리킨 채 멈춰버린 시계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들은 원폭 투하 직후의 나가사키의 참상을 재현하고 원폭의 파괴력과 그 무서운 재해를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목표로, 전쟁과 핵무기에 대한 문제,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멈춰버린 시계 ⓒ 원폭자료관 자료집

▲피폭을 당한 어머니와 아이 ⓒ 원폭피폭사진기록자료집
원폭투하 중심지 공원에는 중심지를 표시하는 구조물과 폭파 후 부서진 성당, 지층, 나무, 학교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평화공원에는 평화기념(祈念)상을 비롯한 원폭 당시의 나가사키 형무소 흔적과 각종 구조물과 각국에서 보낸 기념(祈念)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피폭으로 불에 타 죽은 희생자 ⓒ 원폭피폭사진기록자료집
원폭피해자 10명 중 1명이 조선인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피폭자는 각각 42만명과 27만명이었으며 그 중 피폭으로 사망한 사람은 각각 약 16만명과 약 7만4천명에 이른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피폭을 당한 조선인은 히로시마 5만여명, 나가사키 2만여명에 이르며 이들 중 히로시마에서는 3만여명이 사망하였고, 나가사키에서는 1만여명이 사망하였고 종전과 해방 후 2만3천여명이 귀국하였다.
조선인희생자 추모비
당시 외국인 중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조선인들의 흔적은 평화공원, 원폭중심지 공원, 자료관 어디를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조선인 희생자들 추모비만 공원도 자료관도 아닌 도로 옆 구석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더구나 안내판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몇 번 주위를 배회한 후 원폭투하 중심지로 연결되는 다리를 건너기 직전 구석에서 작은 추모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상황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보여주는 듯했다.
1975년 일본의 양심적인 한 ‘시민들의 모임’에 의해서 건립된 추모비 앞에는 일본어와 한글로 소개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은 ‘강제로 연행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조선인과 원폭으로 폭사하거나 피폭을 당한 조선인 피폭자를 추도하기 위해 추도비를 세우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무력으로 끌고 와 학대 혹사하여 강제노동 끝에 비참하게 원폭으로 죽게 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은 물론 핵무기의 완전철폐와 조선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염원한다’고 적혀 있다.

▲조선인희생자추모비 ⓒ 김준
원폭자료관에서 판매하는 평화학습자료집에 소개된 조선인희생 추모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시 중, 일손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 수는 236만명에 이르고, 탄광이나 조선소 등에서 일을 하였다. 나가사키 현 내에는 약 7만명, 나가사키시 주변에 약 2만명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고, 나가사키 시 조사에 의하면 약 1만2천명이 피폭당했다.
1957년 나가사키 시 大浦元町의 誠孝院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153명의 유골이 발견되어, [나가사키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위한 모임]에 의해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비의 표면에는 [강제연행 및 징용으로 중노동에 종사 중 피폭된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해 1979.8.9]라고 새겨져 있다.(평화학습 입문서 중에서)

▲조선인희생자 추모비 안내판 ⓒ 김준
망각과 기억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은 피폭의 참상과 이후 부흥의 모습, 핵무기의 개발과 역사, 평화 등을 스토리를 갖추어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역사관 혹은 기념관(6·25전쟁, 4·3, 5·18 등)을 생각하면 부럽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나가사키 자료관은 ‘잊지 말자’는 각오만 있을 뿐 전쟁이 어떻게 기억되는가, 무엇을 기억시키고 있는가 하는 기억의 형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미국에서 진행된 원폭 전시를 둘러싼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며 ‘미국은 히로시마의 비극을 모르고 있다. 역사왜곡은 안 된다’라고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자료관의 전시 내용이 지나치게 희생자에 초점이 맞춰져 일본의 중국침략과 전쟁동안의 조선인 연행 등은 거의 전시되어 있지 않다. 히로시마의 경우 국내외의 비판을 받고 일부 자료를 전시했지만 극히 부분적이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원폭을 투하한 책임을 따지지 않고 핵무기의 완전폐기와 전쟁의 소멸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자료관의 ‘평화’ 혹은 ‘평화운동’은 (전쟁)원인에 대한 제거(사죄)는 없이 결과(핵무기 폐기, 전쟁 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원인도 결과도 모두 역사적 사실인데 원인은 ‘망각’ 시키려 하고 결과의 ‘기억’을 강요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료관을 보고서 ‘기억하는 사람, 세대’가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