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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은 타이 재벌총수 출신이면서 집권에 성공한 탁신 친나왓 수상의 경제실험을 주목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외환위기이후 글로벌 스탠더드에 내몰린 아시아 재벌들이 반 신자유주의 정서에 파고들어, 집권에 성공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태국 방콕에서 폐막된 APEC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기자회견중인 탁신 태국총리.
ⓒ 연합뉴스
아시아 민주주의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여전히 지주계급의 보호막이 되고 있는 필리핀 민주주의로부터 군부를 후견인으로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 . 그러나 금융세계화 이슈가 부시정권의 군사주의적 행동에 밀려 잠시 주춤하고 있는 와중에 주목을 끄는 것은 타이 민주주의이다.

“회사는 국가고, 국가는 회사다. 국가와 회사의 경영방식은 다르지 않다.”

타이 최대 정보통신 재벌의 총수 탁신 친나왓이 수상직에 오르기 이전인 1998년에 한 말이다. 2001년에 들어와 “타이를 사랑하는 타이당”이라는 뜻의 타이락타이당은 타이 선거사상 유례없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하고, 당 총재 탁신은 수상에 취임하였다.

재벌총수 출신의 타이 총리, 탁신의 경제 실험

탁신이 이끄는 신생정당 타이락타이당이 급부상해서 제 1당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1997년 경제위기 직후 들어선 추언 위기관리내각은 세계은행과 IMF의 권고에 따라 자유화, 작은 정부, 자유시장 등의 세계화 패키지를 지체없이 수용하였다. 그리고 ‘세계표준’의 이름으로 투명성이 부족하고 부실한 국내자본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그 공백을 외자 유치로 메꾸려는 경제회생 전략을 추진하였다.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의 등장은 바로 ‘세계표준’의 공세에 대한 국내 대자본의 위기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맹대상을 총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농촌에서 찾았다. 경제적으로 금융산업 육성에 몰입하였던 추언내각과 달리 국내의 구매력 창출에 역점이 두어졌던 것이다.

1997년 위기 관리내각으로 출범한 추언 경제팀이 IMF의 요구에 따라 추진한 구조조정이 남긴 것은 경기침체 밖에 없다고 느낀 대중들에게 탁신의 민중주의노선은 더 없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농가부채 상환유예, 부락당 1개 특산품 개발을 위한 100만바트(약 4천만원) 지원, 30바트(약 1,200원)로 기본의료서비스 일괄 공급 등 농촌지역과 서민층을 겨냥한 탁신의 재정확대정책은 추언 전 내각의 정책 기조와 너무나 대조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분배와 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지도자로 부각

탁신의 민중주의 프로그램은 비도시지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세계경제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국내경제의 활성화를 꾀한다는 탁신노믹스의 이중전략(dual track)은 성장으로 이어졌다.

재정확장 정책이 수반할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국내외에서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타이경제는 동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점차 탁신은 분배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탁신이 ‘마하티르 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마하티르는 ‘자유시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노동부문과 비판적 정치세력에 대해 억압 일변도로 나아갔다. 1997년 경제위기 직후 마하티르의 ‘강한 국가, 자유시장’ 기조는 반(反) IMF 정치수사, 나아가 경제민족주의적 정책집행으로 이어졌다.

당시 마하티르는 경제위기의 요인을 아시아경제의 정실주의(cronysm)로 환원시키고 있는 IMF에 대적해서 위기의 진원이 투기자본에 있음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급기야 1998년 9월 1일 마하티르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냉소를 무릅쓰고 투기자본의 국내 유입을 규제하는 자본통제 정책을 폈다.

반 IMF정책 선 말레이시아 경제의 회복

고정환율제가 도입되고 외국인의 경우 매입한 주식을 1년 이내 매각할 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마하티르의 반 IMF 정책은 말레이시아 경제를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일각에서는 서방에 대한 마하티르의 도전은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정략적 행동일 뿐이며, 정치자금을 제공한 대가로 연성대부, 조세감면 등의 특혜를 누려온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눈감아주려는 수법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과 비관적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레이시아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다. 그렇다면 ‘마하티르 모델’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1981년 당시 부수상이었던 마하티르가 수상직에 올랐다. 마하티르가 권력을 잡으면서 내건 슬로건은 ‘동쪽을 보라’였다. 이때의 동쪽은 ‘압축성장’의 신화를 낳은 한국과 일본이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박정희식 산업화’에 감동했다.

그러나 마하티르는 박정희와 차이가 있었다. 우선 마하티르는 외교노선에 있어서 비동맹노선을 견지하였다. 그의 노선은 같은 이슬람권이면서 친미적인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와 달랐다. 그렇지만 개발독재자였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1980년대 중반 유가 등 1차산물의 국제시장 가격이 급락하자 말레이시아 경제는 타격을 받았다. 마하티르는 위기 타개책으로 개방을 통한 시장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의 개방화정책은 야당 및 반대세력, 노동부문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병행되었다.

마하티르의 개발독재는 성공적이었다. 눈부신 성장이 계속된 결과 말레이시아는 명실상부한 신흥공업국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성장은 마하티르 개인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1998년 마하티르와 대립했던 당시 부수상 안와르를 부실한 명분을 가지고 구속하면서 마하티르의 악명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는 IMF의 요구와 정반대로 자본통제를 실시하였다.

탁신 집권이후의 언론통제와 민주주의 후퇴

바로 재벌 총수 출신 탁신 수상에게 국제금융자본에 의해 지지되는 세계은행, IMF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면서 국내 기업의 연고주의(cronysm)에 대해서는 관대한, 그렇지만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억압적인 개발독재모델의 대중성이 매력적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우선 탁신은 집권과 함께 언론통제에 들어갔다.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작년 10월 방콕에서 열린 아태경제포럼(APEC) 기간에 여러 사회단체들이 시위를 계획하자 이를 외국으로부터 돈을 타쓰기 위한 상술로 폄하하였다.

탁신은 재벌 총수 출신답게 ‘CEO형 국가경영’을 강조하였다. 2003년에는 ‘주식회사 타이’의 경제환경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다. ‘전쟁’ 3개월 동안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법정 선고없이 살해되었다. 마침내 시민사회진영에서 탁신 내각하에서 늘어만 가는 국가테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한 탁신의 ‘법과 질서 회복’ 캠페인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정권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으로부터 고무받았다고 볼 수 있다. 급기야 지난 4월 28일 타이 남부 무슬림지역에서 검문서, 경찰서 등 관공서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려 했다는 100여명의 무슬림청소년들이 군경에 의해 살해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반신자유주의에 편승해 집권한 아시아 재벌의 한계

박정희 개발독재 하에서 성장만 있었고 인권과 민주주의는 유린되었다. 마하티르는 박정희로부터 개발독재의 실용성을 학습하였다. 작년 마하티르는 22년 집권을 마감하고 정치무대에서 퇴장하였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심화를 기대하는 신헌법 하에서 치루어진 첫 총선 결과 재벌 총수이면서 마하티르 지지자인 탁신이 수상직에 오른 것이다.

경제적 지배계급과 정치적 지배계급이 일치하게 된 타이 민주주의는 두 얼굴을 하고 있다. 도발적 수준에서 민중주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부드러운 얼굴이 있는가 하면, 시민사회와 소수종족사회를 감시, 통제하는 강경한 얼굴이 있다.

▲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
주목할 것은 강경한 얼굴이 부드러운 얼굴을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집권한지 얼마 안돼 탁신은 전 추언내각과 별 다름 없이 외자유치와 공기업 민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반 신자유주의보다는 개발독재의 색채가 짙어지면서 타이 민주주의도 퇴보하고 있다.

“타이를 사랑하는 당”, 당명부터 애국주의를 부추긴 타이락타이당은 반 신자유주의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탁신과 타이락타이당의 급부상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세계표준’에 시달리된 된 아시아 재벌들이 반 신자유주의 정서에 파고 들어 마침내 권력화에 성공하고 그간에 쌓아온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우울한 드라마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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