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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분석과 대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매주 2차례에 걸쳐 [대안칼럼]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대안연대회의 소속 국내외 학계와 연구소 전문가 18명이 칼럼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4일 북간도 용정에서 열린 남북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는 통일문제에 대해 또다른 새로운 경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 통일운동과 통일정책 사이의 갈등관계, 남북경협의 특정 재벌 편중, 신세대들의 통일에 대한 인식과 남남 갈등 등에 대해 제기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고 문익환목사가 방북한지 15년, 고인이 된지 어언 10년. 그를 기리는 남북 토론회가 지난 4월 4일부터 6일까지 북간도 용정에서 개최되었다. 남측에서는 그가 생전에 제창하였던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 측에서, 그리고 한 때 문목사가 몸담았고 또 행사 주최자이기도 한 한신대학교의 교수들이 참석하였다.

토론회 장소로 용정이 선택된 것은 당연히 이 곳이 문목사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 근대사에서 이 용정이라는 곳만큼 한 마을에서 그렇게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도 두 번 찾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굳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전화를 피해 국경부근에 급조된 일종의 난민촌과 비교될 법한데 말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북간도로 알려진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 주도에 해당될 연길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도 나는 북측 참석자가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고위급'이 올 것이라는 말 정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과연 그 '고위급'이 누구일까 나로서도 적잖이 호기심이 동하는 대목이었다.

문익환 목사에 대한 북한의 특별한 배려

도착 첫날 남북 참석자의 상견례를 겸한 만찬이 북측에서 경영한다는 연길 시내 한 호텔식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비로소 이 때야 북측 참석자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리문환 천도교청우당 부위원장, 손효순 평양 봉수교회 담임목사, 김경남 북측 민화협 상무위원을 비롯한 실무자들, 장경률 김형직사범대 강좌장(우리식으로 보면 대학 교무처장?), 조국통일연구원, 사회과학원의 연구진들이 소개되었다.

탄핵국면 이후 남북접촉이 일체 중단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안경호 조평통 부위원장의 참석은 분명 다소 격이 맞지 않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다. 나중에 들어본 북측의 설명은 문목사에 대한 "대를 이은 장군님의 특별한 배려" 덕분이라 한다.

다음날 이어진 토론회는 오전·오후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것은 무언가 '다른 목소리'였다. 그러나 남북 발제문과 토론문을 남북 양측이 충분히 상호 '사전검열(?)'을 한 덕분인지 그런 사고(?)는 일어날 수 없었다.

북측의 주된 발표논지는 1989년 문 목사와 김일성 주석과의 통일방안 '합의'가 1972년 7.4공동성명과 2000년 6.15 선언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평가, 6.15 선언 이후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을 지지하는 기운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상황인식, 미제의 민족이간책동을 분쇄하고 '우리민족 제일주의'로 나가자 등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북측의 발표문은 사전에 충분한 조율과 역할 분담을 거친 탓인지, 흔히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수사를 제외한다면 말하자면 '통일된 한 목소리'였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정당의 당론이 대변인을 통해 한목소리로 나오듯, 사회주의 국가 북의 대외적 목소리가 통일되어 있는 것은 일견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북측이 현재 당면한 제반 문제에 대한 그 어떤 심도있는 토로가 없다는 것은 몹시 아쉬운 대목이었다.

4.15총선과 탄핵정국에 큰 관심을 보인 북한

남측의 기조발표는 김경재(한신대), 박순경(전 이화여대) 그리고 강만길 상지대 총장 등 세분의 원로학자들이 담당해 주었다. 앞의 두분이 주로 문익환 목사의 삶과 사상을 지근의 거리에서 조감해 주었다면, 강만길 교수의 발표는 6.15 이후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이 극히 형식적 행사주의로 흐르면서 방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라는 아픈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다.

남북간 화해협력사업은 안일과 정체에 빠져 있고, 민간통일운동 단체는 난립하고 있다는 지적에 이어, 강 교수는 그 대안으로 현재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로 방치되어 있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화해협력을 위한 기구로 재편하고, 나아가 통일문제연구소 설립을 통한 민간통일운동의 씽크탱크 구성이 시습하다는 제안으로 끝을 맺는다.

통일문제에 있어 새롭고 다른 경로를 모색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기에 몇가지를 덧붙여 보았다. 먼저 통일'운동'과 정부의 통일'정책'은 기본적으로 갈등적일 수밖에 없다고 할 때, 현재의 통일운동이 통일정책의 하위파트너가 되고 있는 경향. 둘째, 남북경협이 특정 재벌에 편중됨으로써 통일사업이 자칫 '통일업자'에 의해 독점될 수 있다는 점.

셋째, 이른바 신세대의 경우 한편으로 여중생사건에서 보듯 강한 자주성과 경우에 따라 반미성향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장 선호하는 국적으로 미국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대학생 여론조사에서 보듯이 그 자체 대단히 모순적이라는 점, 다시 말해 신세대에게 있어 통일은 그다지 심각한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사실. 넷째, 남북공조의 실질적 걸림돌인 미국의 신보수파 문제. 다섯째, 최근 새롭게 정치세력화하고 있는 '자생적' 친미반북세력에서 나타난 남남갈등의 문제 등이 지적되었다.

요즘의 남한 신세대에게 통일이 과거와 비교해 더이상 '필수'가 아니며, 민족이란 말 자체가 언제나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북측에 상당한 자극이었음은, 뒷풀이 자리에서 뭔가를 해명하고 설득하려는 북측 인사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그들은 처음부터 남한의 4.15 총선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탄핵정국의 추이를 묻곤 했다. 하지만 내 주문은 '누구를 지지해도 좋은데 제발 좀 가만히 있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토론회의 하이라이트는 다음날 용정투어가 아니었나 싶다. 어차피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토론회는 사실 각자가 준비한 자기 글을 읽고 말하는 일종의 모노로그에 가까웠다. 하지만 용정 아래 명동촌에 위치한 문 목사와 윤동주의 생가방문은 초등학생의 소풍처럼 모두에게 즐거운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문 목사와 윤동주의 생가방문

북간도 민족운동 연구자 서굉일 교수(한신대)의 열띤 안내를 들으면서 중국 측이 새로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윤동주의 생가터를 남북공동으로 답사하게 된다. 이 길은 89년 이전에는 없었다 한다.

그 옛날 안중근이 사격연습을 했다는 명동촌 선바위 아래를 지나 윤동주 생가터의 뒷머리와 문익환 생가터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이 길은 함경북도 회령을 지나 동해안 나진으로 이어질 것이라 한다. 그리되면 나진까지 2~3시간이면 충분히 갈 것이라 한다.

나의 벗 중 하나가 '길'을 한마디로 '자본의 빨대'라고 분질러 정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에 나진항을 거친 남측의 상품, 곧 자본주의의 '세포'들이 회령을 지나 윤동주와 문익환이 뛰어놀았던 산기슭을 거쳐 우람하기 그지없는 명동촌 선바위밑을 지나 북간도 전역에 살포되겠구나, 무덤덤한 상념이 스친다.

다음은 일송정이다. 선구자가 어떤 노래인가. 80년대 한 때 우리의 애국가 아니었나. 선구자를 부를 때 옷깃을 여몄던 기억이 생생한 나로서, 일송정 푸른솔, 한줄기 해란강, 용드레 우물가, 뜻깊은 용문교, 룡주사 저녁종, 비암산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공간은 우리 세대의 못해도 8할을 키워냈던 숨겨진 해방구였다. 이제 드디어 그곳을 간다.

과연 거센 바람 비암산에 올라 저 아래 한 줄기 해란강이 굽이치는 광활한 만주벌판은 그 기상이 녹녹치 않다. 아무리 못해도 항일 독립투사들의 운동스트레스를 잠시 잊게해주기는 충분한 그 이상이다. 후세에 새로 만들었다는, 그래서 다분히 조야한 일송정 정자 이편에는 '고향의 봄', '만갑습니다', '선구자(용정의 노래)' 시비가 서있다.

남북간 토론회에 민감한 중국공안 당국

그런데 이 모두에 시멘트 떡칠이 되어 있다. 가까스로 새겨진 글귀들을 군데군데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과연 누가 그랬을까.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 선구자를 작사 작곡한 윤해영·조두남 모두가 친일활동을 의심받는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선구자는 표절시비까지 있지 않은가.

또 하나 윤동주, 문익환 생가 방문 때부터 우리 남북 일행의 버스를 뒤따르는 차량이 한 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송정 답사에도 우리 일행 뒤를 멀찌감치 따르더니 저 편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혹 북측의 고위인사를 에스코트하기 위함일까. 아니 에스코트를 할 량이면 앞에 서야지 왜 뒤를 따를까 의문을 가졌던 차다. 가만히 살펴보니 중국공안이다.

남북이 연변에서 만나 무슨 회의를 한다니까 중국공안 측이 아주 예민해져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연변시내 서점에서는 북 측에서 출간된 고구려사 서적을 아예 치워버렸고도 한다. 하기야 중국으로서 민족문제는 실로 천하대란의 뇌관 아닌가.

메모리의 크기가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IT혁명시대에 기억은 그것의 컨텐츠이다. 과거를 장악하는 자,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기억 곧 해석권을 장악하는 자에게 미래가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동북공정을 동아시아를 둘러싼 헤게모니투쟁의 일환으로 읽고 있다. 과연 여기서 연변의 선택은 무엇일까….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 한신대 이해영 교수
ⓒ 자료사진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동상이몽일지 몰라도 회의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끝은 그렇게 '창대'하지 않았다. 무슨 괴담수준에서 이미 대학가에 유포된 OO대학 OO억, XX대학 XX억 식의 남북학술교류에 따른 비공식 댓가문제는 회의의 끝자락을 서글프게 하는 일이었다.

사익이 게재된 경협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최대의 공익을 목적으로 한 학술교류에서 북측이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자존심'을 지켰더라면 특히 이번 회의와 같은 '상층 통전'사업이 좀 더 '성과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회의가 끝난 지금까지 여전히 나의 머리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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