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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동네 여자들이 저수지 둑에 가서 울고 돌아온 이후 정말로 많은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놉을 얻기 위해 밤마다 동네를 돌고 비가 내리는 중에도 비옷을 입고 모내기를 한다. 전주댁은 겨우 모내기를 마치고 나서 일년 농사를 굳히지 않게 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을 메마르고 쩍쩍 갈라진 땅이나 누렇게 변색되다가 검게 타 들어가는 벼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가뭄이 지나고 나서 몇 차례 태풍이 닥쳐왔다. 가옥이나 들판의 벼를 모조리 날려버릴 것처럼 바람이 불고 하늘에서는 억수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태풍은 그다지 큰 피해를 남기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태풍이 물러가고 나면 논을 가득 채운 물은 움직임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스르르 빠져버렸다. 그러면 더욱 강렬해진 태양 아래서 농약을 살포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태풍이라고 할 수도 없는 저온현상이 그야말로 한 해 농사를 굳혀 버렸다. 하루 종일 태양이 내리쪼여도 시원찮을 시점에 기온이 떨어지자, 영글기를 기다리고 있던 벼들이 그대로 액체 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면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 쭉정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농촌지도소에서는 '냉해'라고 명명했다.
"올해 농사는 굳혔어, 들에 나갈 맘이 안 나네."
동섭의 말에 전주댁은 침묵을 지킨다. 이왕 아는 일을 가지고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않은가.
"그런디 어제 버스 타고 오다 본께 장탯재 산에 뭐가 시커먼 것이 들어서 있든디……."
"뭐 말인디?"
전주댁은 머릿속에 번쩍 불이 이는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린다.
"인자 그 쪽으로 걸어갈 일이 뭐가 있어? 장에 갔다 오는 길에 본께 뭔 돌이 서 있드라는 말이제."
동섭은 그것들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들이냐고 묻고 있다. 아니 원래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무슨 돌이 있다먼 그것이 비석이 아니여?"
"그냥 무심코 봐서 잘 모르겄어."
동섭은 어떤 것이든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끙끙거린다. 너무 지나치게 눈여겨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명백히 자신의 귀로 들었음이 분명한데도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튼 동섭은 눈을 부릅뜨고 보았음에도 그 사물의 형태가 어떤지 기억하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이 '긴가민가' 하는 병 때문에 전주댁은 얼마나 절망을 했는지 모른다.
"어서, 갑시다!"
"가기는 어딜 가? 오늘 밭에도 가 봐야 허는디……."
한동안 친정 어머니의 묘를 이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남원을 들락거리던 전주댁은 가뭄이 닥치고 농사일이 바빠지면서 잠시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버스 운전사에게 부탁하여 장탯재 선산 앞에서 내렸다. 전주댁이 앞서 걸어가고 동섭이 그 뒤를 따른다. 짧은 오르막을 오르자, 대여섯 마지기의 밭 한가운데 수십 년 간 한 자리에 서 있었던 우람한 낙엽송이 나타난다. 주위의 밭에는 자주색 줄기 위에 이파리가 달린 고구마나 분홍꽃이 진 참깨 같은 것들이 서 있다. 두 사람은 고구마 줄기나 참깨를 건드리지 않고 밭고랑 사이를 걸어간다.
밭을 지나자, 잔디밭이 나타나고 그 너머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던 곳에 두 개의 묘와 비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구머니나! 전주댁이 비명을 지르며 그 쪽을 향해 달려간다. 땅이 파헤쳐지고 소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뽑혀 나가거나 잘려 있다.
"여기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디……."
전주댁이 새로이 둥지를 튼 두 개의 무덤 주위를 돈다.
"이 놈들이 언제 했으까, 잉!"
전주댁은 봉분 위에 덮인 떼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이리 좀 와 봐!"
전주댁은 이끼가 끼지 않은 잿빛 상석을 보며 검은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을 향해 걸어간다. 동섭은 비석 뒷면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그는 비석이 세워진 날짜를 소리내어 읽는다. 그런 다음 앞면의 익수○○노씨지묘(益秀○○魯氏之墓)라는 글자도 읽는다.
"노씨들 거란께."
동섭의 말에 전주댁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지만 잘 버티고 있다. 그녀는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오히려 침착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할지 머릿속에 그려놓은 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누구 묘라?"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놈들 조부 것인 모양이여."
"그러먼 이 놈들이 이씨 선산을 노씨 것으로 만들 작정인가 보네, 이 놈들이! 그냥 포크레인을 갔다가 파 내부리까."
"아이라, 그랬다가는 큰일나!"
전주댁이 당장 포크레인이라도 몰고 올 기세에 동섭은 손을 내젓는다.
"그럼, 어쩌자는 거여."
"그랬다가 그 놈들이 고소라도 허먼 지서에 잽히간단께."
겁 많은 위인 같으니라고. 전주댁은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는 일이고 어머이를 어서 아부지 옆에다 모시야 되겄어."
"법으로 해도 승산이 없담서, 그 놈들 명의로 돼 있어서."
"일단 집으로 갔다가 내일 나하고 어디 좀 알아봅시다."
"어디를?"
동섭은 정직하기도 하지만 말을 잘 참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곧잘 해버린다. 그것을 아는 전주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그 날 저녁이다. 설거지를 서둘러 마친 후 전주댁은 전화기를 든다. 그녀는 몇 번 혀를 굴려 연습한 후 공손한 말투를 만들었다.
"사돈한테 한 가지 부탁을 좀 드릴라구요."
긴 신호가 창성 안우성의 안방으로 전달된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고 안우성이 전화를 받는다.
"아이고 사돈이 어쩐 일이신가요?"
전주댁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한다.
"보통 풍수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놈들을 이길 정도로 억센 사람이 아니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래요. 아는 사람이 있는디 소개를 해 디리야겠네요. 근디 꼭 집으로 와야 돼요. 안 그러면 소개 안 해 디립니다."
"내일 집으로요? 예, 그러먼 들어가시요."
전화기를 내려놓는 전주댁의 표정이 사뭇 달라져 있다. 그녀는 동섭에게 말했다.
"내일 사돈어른이 집으로 놀러 한 번 오라네요. 그러먼 몇십 년 동안 법조계에서 일한 억센 풍수를 하나 소개를 해 준다구요."
다음 날 대충 할 일을 마친 후 두 사람은 오전 10시 버스에 오른다. 전주댁은 이런 일로 사돈에게 폐를 끼치게된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다. 명자가 이 일을 알게된다면 쌍심지를 켜고 대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영리에서 내린 두 사람은 그 때부터 논두렁길을 따라 길을 걸어간다. 앞서 말한 대로 물을 건너 점을 지나는 지름길이다.
창성리로 가는 동안 동섭은 뚱해 있다. 전주댁이 말을 붙여도 시큰둥했다. 전주댁은 동섭이 그런 이유를 곧 알아차렸다. 동섭은 전화를 통해 알려주어도 무방할 일을 굳이 자신을 부른 사돈에 대해 언짢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제 몸 움직이는 것을 이렇게 싫어해서야 원! 전주댁은 사돈이 굳이 집으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우성은 동섭 같지 않았다. 이런 기회에 서로 얼굴을 보고 말하자는 것이었다.
안우성 집 어귀에 들어서면서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은 동섭의 얼굴이 펴졌다. 그새 언제 장을 보아다 음식을 장만한 것일까, 전주댁은 놀라워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마루에 앉아 있던 안우성은 두 사람을 보자, 황급히 뛰어나온다.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만나 뵐 기회가 있어야지요."
전주댁은 가능한 한 크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다. 이것은 친정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르침이다. 기분이 풀린 동섭도 소탈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간 별고 없으시지요?"
두 사람이 방안에 자리를 잡자 접시들이 비좁게 앉아 있는 상이 들어온다. 마치 꽃무늬처럼 실고추와 참깨를 뿌린 나물, 부침, 생선, 돼지 고기볶음 등. 그것을 보며 전주댁은 사돈이 얼마나 성의를 다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돈 간의 대접은 과연 이렇게 해야하는 거야.
"안 사돈도 어서 들어오세요."
전주댁이 인사를 차린다. 순간 전주댁은 또 친정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릴 때 배운 사소한 가르침이 나이가 들수록 잊혀지기는커녕 더욱 뚜렷하게 떠오른다.
"예, 어서 들어오세요."
동섭도 덩달아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부엌에서 혼자 음식을 장만하던 안 사돈이 막걸리를 가지고 들어온다.
"사돈이 막걸리를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이후 동섭 내외는 사돈 내외와 얼굴을 맞대고 갖가지 집안일과 자식들의 일을 물었다.
"울산의 애들은 정말 성공했어요. 인제 억대 부자가 되었으니까요."
안우성이 희고 큰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