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밤 영수 내외는 전주댁이 도와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끙끙대며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동섭은 밤새 아랫방에서 짐을 싸는 소리들 들으며 싱숭생숭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전주댁과 정말 저 녀석들이 가기는 가는 것 같다는 말도 주고받았다.
아침이 되자 영수 내외는 방안에 싸 두었던 짐을 끌어내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동섭은 영수가 짐 싣는 것을 거들기 위해 아래채로 걸어간다. 몇 개의 짐을 트럭에 실었을까. 사돈 오현구가 식구들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사돈 그간 별 일 없으십니까?"
"예, 사돈도 별 일 없으십니까?"
동섭은 사돈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 고 묻고 싶지만 이렇게 인사하고 말았다.
"우리 큰사위가 이사를 한다는데 안 와볼 수가 있어야지요."
영수의 장모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는다.
"예."
동섭은 말끝을 길게 빼며 말한다. 부엌에 있던 전주댁도 마당으로 나와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자, 어서 실읍시다!"
오현구의 말에 따라 동섭은 장롱을 싣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짐은 그리 많지 않다. 장롱과 냉장고, 세탁기를 실으면 별반 할 것이 없다. 작은 살림살이는 두 명의 여자아이와 한 명의 남자아이가 다 나르고 있다. 짐을 모두 싣자, 영수 내외는 트럭에 오른다.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살 거라."
동섭은 마음에서 우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한 마디 한다.
"먹고살기 힘들면 그냥 들어와. 객지서 고생하지 말고."
"예. 그럴게요."
트럭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사돈 내외를 배웅하고 돌아서며 동섭은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진 것을 느낀다. 하늘을 보니 치솟은 해가 대지에 열기를 보내고 있다. 여름 아침에는 좀 서늘할 때 일을 해야 한다니까.
"잘 살아야 될 텐데…."
전주댁은 혼잣말을 한다. 그녀는 위 채로 가기 전에 아랫방의 방문을 열고 몇 분 가량 서 있다가 문을 닫는다. 동섭은 문을 닫고 돌아서는 아내의 얼굴에서 서글픔과 시원함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밭에 나갔다가 점심 때 들어온 이후 뜨거운 햇볕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집에 있었다. 이것은 농부들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 있는 동안은 낮잠을 자거나 집 안에서 빈둥거리다가 태양광선이 사그라지기 시작할 무렵 다시 들에 나가 해질 때까지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날 두 사람은 점심 때 집에 돌아온 후 다시 들로 나가지 않았다. 과연 영수가 울산에 도착해서 제대로 짐을 부려놓고 살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니 두 사람은 그렇게 애먹이던 자식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후 4시 반경이다. 전주댁은 기다리다 못해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명자냐, 하고 물은 후 통화를 시작했다. 잠결에 전주댁의 목소리를 들으며 동섭은 등이 좀 끈적거리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아늑한 상태에 빠져 있고 싶어 그대로 누워 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잠이 들었고 몇 갈래의 꿈길을 걸었다.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다. 무슨 일인지 아버지는 화가 나 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꾸지람을 들으며 앉아 있다. 어머니의 얼굴도 휙 지나간다. 그런 뒤 또 다른 꿈이 나타난다.
1시간 후 동섭은 눈을 뜬다. 그런데 전화기 앞에 앉은 전주댁의 표정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동섭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속내를 감추고 무뚝뚝하게 묻는다. 이런 경우 늘 터져 나오기 마련인, 대낮에 코를 골며 잔다는 타박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여?"
"즈그 아부지는 지금 잠이 와, 잠이!"
동섭은 무엇이 또 전주댁이 화나게 했는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알 수 없다.
"뭔 일인디 그래?"
"명자가 그러는디… 영수, 그 놈이 트럭에서 짐도 안 내리고 지금 도로 돌아오고 있다요."
순간 동섭은 자신이 성인임을 믿을 수 없다.
영수 내외가 울산 백록슈퍼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영수는 슈퍼 옆 주차장에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주차시키고 슈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들고 온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던 명자는 두 사람을 보았다.
"어서 와. 배고프지? 밥통에 밥이 들어 있으니까 들어가서 좀 먹어라."
명자가 바쁘게 계산하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게에 딸린 부엌을 거쳐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명자는 두 사람이 밥을 먹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벌써 밥을 다 먹었어? 지금 매형이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혼자 보려니까 바쁘네."
"예, 다 먹었어요."
영수가 말하는 동안 또 한 손님이 계산대 위에 물건을 올려놓아 대화는 중단되었다. 명자는 계산하고 있는 손님 뒤로 또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영수에게 말했다.
"좀 있다 매형 오면 집으로 보낼 테니까 짐이라도 내리고 있어."
명자는 두 사람이 슈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명자는 두 사람이 가고 난 후에도 대여섯 명의 손님의 물건값을 더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드디어 가게가 한산해지자 명자는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다.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먹는 식사가 사람을 허기지게 해서 때로 화나게 만들뿐 아니라 위장을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그 때 안동섭이 비닐에 싸인 채소를 가게 바닥에 턱 내려놓는다.
"영수하고 영수각시하고 둘이 왔던데 어서 좀 가봐야겠어요."
"언제 왔는데?"
"지금이 두 시 사십 분이니까 두 시 정도가 되었을 거예요."
"얼른 채소를 내려놓고 가야겠구만."
안동섭은 서둘러 짐을 들여놓은 후 트럭을 몰고 사라졌다. 명자는 남편이 가는 것을 보며 식사를 했는지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트럭은 사라진 뒤였다. 그런데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안동섭이 돌아왔다.
"오기는 누가 와? 사람도 없고, 차도 없는디……."
무심결에 안동섭의 입에서 사투리가 튀어 나온다.
"방에 짐이 있는지는 확인했어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명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방에는 아무 것도 없어."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아마 도로 간 거 같아."
"그럼, 내가 가서 한 번 더 보고 올 테니까 식사 좀 하고 있어요."
"응."
슈퍼를 나오자마자 뜨거운 태양광선이 내려온다. 명자는 목과 어깨가 따가운 것을 느끼며 양산을 들고 올 것을 잘못했다 싶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한시 바삐 자신의 눈으로 트럭과 영수 내외를 보고 싶었다. 제대로 인도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몇 번 위험한 순간이 닥쳐온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뚫어 놓은 빈 공간 속으로 빨려들 것 같다.
휘청거리며 그 길을 지나자 좁은 골목이 나타난다. 직선으로 난 골목을 따라 걸어가며 명자는 만약 영수가 짐도 내리지 않고 가버린 것이 사실이라면 남편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처음에 안동섭은 처갓집 일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사위가 처가 일에 나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그런 것을 명자가 몇 번이나 설득해서 시골로 갔고 겨우 영수 내외를 불러 올렸다.
십자 교차로를 만나자 그녀는 오른쪽으로 돌아 철길을 향해 걸어갔다. 철길 너머에 영수가 머물기로 했던 방이 있다. 그녀는 단층 양옥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나무 대문을 밀어본다. 문이 스르르 열린다.
명자는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아 좁은 통로를 통해 단칸방에 이르렀다. 방문은 열려 있다. 그런데 푸른빛이 도는 하얀 벽지가 붙은 방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할 가구나 전자제품이 없다. 옷걸이에 걸린 옷도, 사람이 사는 집이면 으레 벽에 걸리는 달력도 없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나오며 영수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망할 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그녀는 풀 죽은 모습으로 슈퍼에 돌아와 안동섭의 말이 사실임을 시인했다.
"처남이 어쩌자고, 애들 장난도 아니고…."
명자는 말 없이 함박에 담아 놓았던 배추를 거칠게 건져 올린다.
그 때문에 얼굴과 팔에 소금물이 튀었다. 이것들은 영수에게 김치를 담아주기 위해 소금에 절여 놓았던 배추들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전화벨이 울린 것은 20분 가량 지나서였다. 영수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명자는 부리나케 손을 뻗었다. 이 놈을 어떻게 한다지, 이렇게 중얼거리다 명자는 일단 영수의 말을 듣고 난 후 화를 내기로 작정했다.
"느그들 사람들이 왜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간 거야?"
"누나는 아마 모를 수도 있지만 사람이 매정하게 대하는데 살 맘이 안 생겨서 말이야."
명자는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가 대문 뒤에서 개가 뛰어나왔을 때처럼 놀랐다. 그런데 영수의 말투는 느긋하고 차분해서 듣는 사람을 약올리려는 것 같다.
"아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러는 게 어디가 있어? 느그 준다고 김치도 담아 놨는데…."
이 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안동섭이 돌아온대 하고 물었다. 명자가 고개를 젓자 수화기를 낚아챘다.
"처남 지금 올 거야, 말 거야?"
안동섭의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명자는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래 우리 집 인간들은 모두가 제멋대로야. 쥐뿔도 없는 인간들이 말이야.
"나는 이제 죽는 한이 있어도 큰 처남 일은 모른 체 할 테니까 섭섭하게 생각지마!"
안동섭은 탁 소리가 나게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런 뒤 담배를 입에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