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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섭은 집 어귀에 들어서다가 변함없이 아랫방 문 앞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신발을 보았다. 하나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남자 신발이고, 하나는 꽃무늬가 발등에 매달려 있는 노란 샌들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자, 동섭은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 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혼자 뒤 안에 웅크리고 앉았던 열 서너 살 무렵의 일이 의식에 떠오른다.
그 때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없으며, 이 세상에는 오직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하늘을 향해 이 세상에는 오직 나 혼자다, 라고 울먹이며 외쳤다.
방문을 열자, 전주댁은 자리에 이불도 펴지 않은 채 누워 있다. 전주댁은 낯선 산비탈에 버려진 어머니에 대한 생각 때문에 내내 우울해 있다. 그런 아내를 보며 동섭은 장모가 마음에 차건, 차지 않건 광수를 양자로 대우했다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장모가 묻혔던 땅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싶어서다.
동섭은 새마을(담배)을 꺼내 불을 붙인다. 그도 한 때는 금욕적이고 절도 있는 생활을 꿈 꾼 적이 있었다. 어떤 욕망에도 흔들림 없는 평정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삶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금욕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것과 세상의 유혹에 시달리며 고통과 자극을 받으며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깨달음을 줄까 하는 문제에서 그는 두 가지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니 후자가 인간을 더욱 단련시키고 보다 더 폭 넓은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생각했기 때문에 술과 담배를 입에 댔다. 결혼도 같은 연장선 위에 서 있었다.
이번 일은 창수가 죽었던 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다. 창수는 죽는 순간에 고통을 준 후 차차 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영수는 아니었다. 동섭은 영수의 살기에 그는 매번 당황하고 있었고 며느리가 보내는 야멸찬 눈초리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주댁 외에 이 사실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여태 그는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부끄러운 일을 말해본 적이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앞에서 밀어닥친 고통에 대한 해답을 내면에서 구했다. 물론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지금까지 겪은 어떤 것과도 달라 그는 조금도 낙관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황당한 일을 당한 적도, 비참한 적도 없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전주댁은 다른 곳에 눈길을 주고 있다. 요즘 그녀는 영수와의 갈등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는 듯 어머니의 유해를 선산에 모시기 위해 몇 차례 남원을 들락거린다. 과거에는 이씨 선산이었지만 노씨 형제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이상 그들의 허락이 있어야 필요했다.
"근께 인자 즈그 앞으로 된 산인께 누가 들고일어나도 암시랑토 안타 이거제. 즈그가 클 때 다 누구 공으로 컸는디 은혜도 모르는 짐승 겉은 놈들……."
노씨 형제가 갖은 핑계를 대며 이장을 지연시키는 것들 두고 욕을 퍼붓고 있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방안을 생각했는지 울산의 명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도 느그들이 나서서 어찌 좀 해봐야 되는 거 아이냐?"
명자의 대답이 시큰둥한지 전주댁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아랫방의 그 놈? 그 놈도 지가 뭐헌다고 나서겄어?"
명자가 영수를 앞에 내세워 일을 해결 지어 보라고 한 듯했다.
"나도 제발 좀 그 놈이 도시로 나가서 지가 돈 좀 벌고, 쓰고 싶은 대로 펑펑 쓰고 살았으먼 조컸어."
그제야 동섭은 전주댁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는다. 아들, 며느리 얼굴 보는데 지친 것은 나만이 아니었어. 그래, 얼굴을 맞대고 살지 않는다면 이 불화도 해결될지 몰라. 맞아, 눈에 안 띄는 이상 좋은 게 없어.
"울산의 야들 둘이 한 번 올라온다네."
전화를 끊고 난 전주댁이 동섭을 바라본다.
"뭐 땜시?"
"그 놈을 살살 달래가지고 울산으로 나오도록 해 본다네."
"그래?"
정말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내의 말에 흥분된 동섭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정말로 그들의 안동섭과 한명자는 슈퍼의 일을 동생에게 잠시 맡기고 집으로 찾아왔다.
"진짜 저 놈이 나갈라고 할까?"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면서도 과연 영수가 나갈지 동섭은 믿기 어렵다.
"지금도 물론 돈이 궁하겠지만, 앞으로 애들이 자라나고 교육을 시키려면 많은 돈이 든다는 말로 꾀면 넘어오지 않을까 싶어요."
동섭과 같은 이름의 사위 안동섭이 전략을 털어놓는다.
"애들 아빠를 한 번 믿어 봐요. 지금도 큰형님 말이라면 동생들이 벌벌 떠니까요."
명자가 안동섭과 시댁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형제간의 다투는 것만 보다가 시아버지나 남편의 한 마디에 방향이 정해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자, 이제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게 되나 보나 생각했다. 거기에 비하면 친정은 어떻게 붙여 보려고 해도 붙지 않는 콩가루였다. 저녁 식사 후 동섭은 영수 내외를 큰방으로 부른다. 잠시 후 기침소리와 함께 아들 내외가 방으로 들어온다.
동섭은 오랫동안 큰방으로 온 적이 없는 두 사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결전을 앞에 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은 처남도 알겠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명자 내외를 의식해서인지 평소와 달리 다소곳한 태도로 방문 앞에 앉
아 있다.
"지금 처남, 일도 안 하고 아랫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런다면서?"
영수는 말이 없다. 그러자 안동섭의 기세가 오르기 시작한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시골에 있을 때 어쨌는지 알아? 아버지가 논에 가면 같이 논에 가고, 밭에 가면 같이 밭에 가고, 들에 풀 베러 가면 같이 갔어. 일을 못하지만 아들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는 다 했지. 그런데 처남은 지금 어때? 사실 처남 하는 것 봐서는 나라도 돈 한 푼 안 주겠어. 자꾸 내 이야기를 해서 안 됐지만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슈퍼를 시작할 때 아버지가 논을 팔아 대 준 것은 아버지가 나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만들어 주었겠어?"
잠깐 숨을 쉬기 위해 말을 멈춘 안동섭이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왜 이 놈은 죽은 것처럼 말을 않고 있는 걸까, 영수가 대답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섭은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일단 부모님에게 인정을 받아야 돼, 여기 장인어른도 계시지만 부모가 자식한테 꼭 학교를 보내주고 뒷돈을 대 줄 의무는 없는 거야. 부모가 내키면 해줄 수도 있고, 안 해 줄 수도 있는 거야. 처남은 여기서부터 잘못됐어. 내가 노력해서 무얼 해보려는 생각도 안 하고 바라기만 해서야 되겠어."
"지금 현 상태에서 서로를 위한 가장 좋은 방책은 영수, 네가 여기를 떠나는 거야."
안동섭의 연설에 보이지 않게 박수만 치고 있던 명자가 나선다. 이윽고 듣기만 하던 영수도 입을 연다.
"나가서 뭘 해 먹고산다는 말입니까?"
"자네는 그런 생각 때문에 안 되는 거야. 겁을 내고 도사리고 있기만 하면 아무 것도 못해. 일단 울산으로 나와, 정 일할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서 일해! 내가 자네 월급을 줄 테니까."
이 말을 들은 동섭은 마음이 바빠진다. 이번에는 무언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그는 일이 잘 된다면 지금 사위에게 진 신세를 갚아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긴 저도 도시로 나가서 살고 싶지만, 사실 방 하나 얻을 돈도 없습니다."
"네가 도시 나가서 살 생각만 있으먼 그 정도 방 하나 정도야 못 얻어 주겄냐?"
차분하게 양측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던 전주댁이 끼여든다.
"그럼 키우던 돼지는 어찌헐 거여?"
자신이 돼지를 맡게될까 두려워진 동섭이 물었다.
"장인어른과 상의를 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돼지를 맡아줄 겁니다."
"그럼, 간단하게 일이 해결이 됐네. 언제 출발할 거야?"
안동섭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서두른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야겠어요."
영수의 말에 동섭은 자신이 말을 잘못들은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영수가 아닌데. 안동섭과 명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것을 본 동섭은 두 사람이 가고 난 후 영수가 변심을 할까 두려워진다.
"아니, 벌써 갈라고?"
"실은 창성리에 쌀을 부탁해 놓았는데 싣고 가야됩니다."
명자 내외는 마당에 세워 두었던 트럭을 향해 걸어간다.
"밤인데 괜찮겠는가?"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안동섭이 트럭의 유리문을 내리며 인사를 한다. 옆에 앉은 명자도 손을 흔든다.
남은 네 사람은 집 입구까지 트럭을 따라간다. 그런 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큰방으로 들어오자, 동섭은 힐끗 전주댁을 본다.
"정말로 그 놈이 갈까 모르겄네."
"몰라, 갈 거 겉으먼 가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