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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분석과 대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매주 2차례에 걸쳐 [대안칼럼]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대안연대회의' 소속 국내외 학계와 연구소 전문가 17명이 칼럼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숙명여대 여건종(영어영문학) 교수는 시장만능주의에 빠진 현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한국사회 속의 시장주의가 가지는 폐해와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어느 시장주의자는 “시장은 자유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시장은 자유로워야한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삶을 결정하고 있는 선언적 표현으로 들린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언어이다. 시장의 자유에 지배되는 사회를 시장 사회라고 부른다. 시장 사회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단계에 찾아온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지구가 단일 시장으로 통합되고, 시장이 다른 번거로운 짐- 말하자면 노동, 국가, 공공성 등-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한 생산력의 발달이 가속화되고, 따라서 자본의 움직임은 더욱 정신없이 바빠지고, 우리 일상적 삶의 많은 영역들이 이러한 자본의 순환 과정- 즉 물건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시키는 과정 속으로 동원되고 편입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자본주의의 이 새로운 단계의 중심적인 특징들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적 가치의 많은 부분이 시장의 가치-효용과 효율과 경쟁-에 전면적으로 복속되는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장 사회의 가장 직접적인 징후는 우선 노동이 시장에 종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적 측면에서, 발전된 자본주의는 생산의 국제화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로 특징지어진다. 이제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세계화, IMF, WTO,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은 모두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말들이다.

'사오정' '오륙도'는 신자유주의의 결과

국경을 넘어 보다 높은 이윤을 찾아 자유롭게 움직이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으며, 각 국민국가들은 세계 시장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 초국적 자본의 무제한적 이윤 추구에 우호적인 환경을 경쟁적으로 조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IMF를 경험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 시장이 강요하는 생존의 논리이다. 이를 위해 각 국가는 노동 시장을 유연화하고 (쉽게 말해 보다 자유롭고 용이하게 노동자를 채용하거나 해고할 수 있게 되고), 지난 200년간 투쟁을 통해 이룬 복지국가의 제도적 장치들을 약화시키고 (즉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시장의 손에 방치하고) 시장과 자본의 운동을 제한하는 각종 국가규제를 철폐하고, 공적 제도들을 사영역화하게 된다.

이 때 노동의 정의는 철저하게 시장에 의해서만 규정되고, 그것이 시장에서 산출하는 교환가치에 의해서만 관리되며, 노동의 과정은 다른 모든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자본의 이윤 창출의 한 요소로 편입되게 된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 사회의 키워드로 회자되던 “사오정” “오륙도” “이태백” 등의 신조어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금융이 생산의 과실을 거의 독점하는 반면, 노동 시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급증하게 된다. 이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가 소위 20대 80의 사회이다. 중산층의 붕괴이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노동은 무엇인가? 노동은 교환가치이면서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 삶이 영위되는 과정이며 수단이다. 그것을 통해 한 사회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존을 지속하고, 욕구를 충족하고, 가족을 부양하여 공동체를 지속시켜 간다.

물론 이 두 가지 중 삶의 재생산으로서의 노동의 정의가 더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장인가 분배인가의 선택 이전의 문제이다. 시장사회에서는 이 자명한 이치가 외면된다. 시장이 규정하는 노동의 정의에는 “노동하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자본이 “일자리 창출”을 해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공공성을 거부하거나 약화시키는 시장주의

두 번째로 시장 사회는 자신의 생존 근거-사적 이윤 추구의 자유-를 제약하는 가장 강력한 가치 체계인 공공성을 거부하고 약화시킨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과 이윤 운동을 제한하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적 자본과 시장에 공동체의 이해관계의 조절 능력을 위임하는 추세를 강화시켜가고 있다.

시장 기제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복음은 끊임없이 “이윤추구의 동기에 의해 작동되지 않는” 공공영역의 비효율성을 강조하고, 실업과 빈곤의 묵시록을 전파한다. 전기, 철도 등 공공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공공부분을 민영화하고, 의료나 교육과 같은 복지의 마지막 보루를 사영역화하고, 시장의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의 철거를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시장 사회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민영화의 예를 들자면, 공기업은 공기업 나름의 고유한 효율의 원칙이 있다. 경영을 잘해서 수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공기업의 효율일 수 없다. 그 수익을 초국적 금융자본이 가져간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공기업의 효율은 국민이 필요한 재화를 불편없이, “가능하면 싼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만한 경영에 의한 공기업의 비효율성은 이윤추구의 사적 영역으로 전환시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낙하산 인사가 아닌, 전문성을 가진 경영인과 투명한 경영의 확보를 통해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되어야 한다. 이 자명한 이치가 시장사회에서는 외면되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초국가적 자본은 스스로를 모든 종류의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시장으로부터 공동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시장은 이윤추구 자체가 도덕이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행위는 그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되든 시민 사회의 자발적 개입으로 이루어지든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시장의 윤리를 거역하는 비도덕적인 행위가 된다.

시장이 공동체를 대치하고 있는 것은, 그러나, 위에서 거론한 사회 경제 체제의 제도적 변화보다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근대 시민사회는 공동체 안에서의 일반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과 고통들이 표현되고, 그 경험과 표현의 요구들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조절하고 조정하면서 시작되고 생존해 왔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공공영역의 실종, 즉 근대적 의미에서의 사회의 실종은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를 무한 경쟁과 적자 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밀림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자연상태의 밀림이 인간의 종적 본능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 왔다. 시장은 역사를 다시 거슬러 간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세 번째로, 시장 가치의 절대화와 시장 모델의 전면적 확산이 진행된다. 고유한 가치와 원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영역들이 시장의 교환가치로 대치되는 것이다.

가치를 계량화하고, 그것에 따라 기획하고 관리하는 시장의 도구적 이성이 인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조직원리, 행위의 규범으로 등장하게 되고, 새로운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노동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생산한 물건에 스스로 종속되고 지배되는 인간 소외의 과정은 인간 의식과 욕망의 심연에서도 진행된다. 경제적 자원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원, 정신적, 지적, 감성적 자원이 시장 체계, 즉 물건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과정에 동원되고, 편입되고 관리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후기 자본주의의 명제는 이러한 변화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공간들을 채우고 있는 그 많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욕망의 대상들로부터 우리는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을 수 없다. 소비는 명령이며, 욕망의 의무이다.

근대 대중 사회의 영웅으로 등장한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행복한 소비자”는 시장의 신화이다. 각종 카드의 광고들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고 재촉한다. 세상을 보고 듣던 감각 기관은 광고 매체의 수용자가 되면서 뜻하지 않게 새로운 부가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나 부가가치를 획득하는 순간 그것은 시장의 한 요소로 편입된다. 시장에 의해 기획되는 TV 프로그램은 물건을 팔아주기 위해서 보는 행위로 역전된다. 무엇보다도, 무한 경쟁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시간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도구적 이성이 우리의 교육 현장을 황폐하게 만든다. 경쟁은 광기를 띤다. 다시 한번 도구와 목적의 역전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시장은 인간의 문화적 능력에 적대적이다. 문화적 능력이란 자기 형성의 능력이다. 그것은 풍요롭게 세상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자기 안으로 가져와 스스로를 형성하고 확장하면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통해 삶을 더 깊게 향유할 수 있고,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반성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

시장은 ‘인간의 이름’으로 통제돼야

이러한 자기 형성의 과정은 개인적인 과정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과정, 즉 사회적 과정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온전하게 형성시켜 나가는 능력은 곧 그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항상 문제를 제기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으며, 반응과 개입의 능력은 시민 사회의 생존 조건이다.

시장이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기능적 합리성은 인간의 이러한 능력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주체적 반응과 비판적 개입의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축소하고 폐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문과 TV, 대학, 출판, 대중문화의 영역과 같은 우리 사회의 중심적인 문화 제도들에서 이미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요구하는 기능적 인적 자원의 양성만을 강조하는 대학 교육의 추세는 비판적 능력, 자기 형성의 능력을 결여한 청년 세대를 양산해 내며, 이들은 다시 TV에서 초등학교 운동회 수준의 교양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청중, 즉 시청률의 주인들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다시 시장과 자본의 요구에 쉽게 동화되는 대중 문화의 소비자가 되며, 기존의 여가 시간을 공유하고 있던 출판시장의 문화적 역량을 고사시킨다. 이때 소비자 주권이라는 시장의 논리가 동원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시장과 오늘의 대중에 대한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편향된 평가일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평가되기에는 시장은 아직도 민주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대중은 아직도 충분히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그리고 시장 사회의 부정적 징후들은 시장이 가진 해방적, 창조적 역동성과 함께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대한 이 편향된 그림은 과장되게 그려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가고 있는 가장 지배적인 힘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힘은 우리가 거부해야 할 힘이다. 시장은 더 이상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시장은 “인간의 이름”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대안칼럼의 필진은 한신대 이해영 교수(국제정치), 한밭대 조복현 교수(금융), 켐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개발경제), 성공회대 유철규 교수(한국경제), 국민대 조원희 교수(경제체제), 고려대 김균 교수(정책이념), 대안정책연대 정책위원 정승일 박사(재벌 및 기술경제), 인천대 이찬근 교수(국제금융), 계명대 김영철 교수(경제), 일본 교토소세대 이정희 교수(동북아경제), 여성개발원 정진주 박사(보건,여성), 전북대 정태석 교수(사회), 성공회대 차명제 교수(정치, 환경), 전북대 송기도 교수(중남미), 중앙대 신광영 교수(사회), 서울대 송태수 박사(한국정치연구소), 숙명여대 여건종 교수(문화) 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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