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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계 카길 등 5대 회사가 유통 시장 75% 차지

“미국 농민들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농민이 생산한 옥수수 4달러어치로 팝콘을 만들어 팔면 소비자가 사먹는 값은 140달러입니다. 그럼 남은 돈 136달러는 누가 가져갑니까. 곡물 메이저, 가공업자, 초국적 기업들 몫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이 정치권과 짜고 농산물 수입국들에 압력을 가한다고 생각하는데, 총장님의 견해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9월 중순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제5차 각료회담에서 자결한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생전에 수파차이 파닛팍디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에게 보낸 항의 서한의 일부이다.

한국의 한 농부가 목숨을 걸고 맞선 이들, 즉 농업 협상의 숨은 실력자란 세계 5대 곡물 메이저인 미국계 카길과 아처 다니엘스(ADM), 프랑스의 드레퓌스, 남미의 붕게, 스위스의 앙드레를 말한다.

이들은 세계 곡물 교역량의 약 80%를 쥐고 흔들며, 전체 유통 시장의 75%를 점유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세계 농산물 생산지와 미국 시카고 선물거래소에서 곡물을 사들이고, 이를 각국 정부와 기업에 판매해 엄청난 이윤을 거두어들이는 농업 분야의 공룡들인 것이다.

이들 메이저가 손대는 것은 밀 같은 곡물만이 아니다. 씨앗에서부터 농약·살충제·가공 식품·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식량과 관련된 분야 전체는 물론 선박 회사나 저장 시설까지 두고 있다. 다른 운송 회사나 물류업체는 곡물 거래에 파고들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이들 회사 중 세계 최대인 미국계 카길은 1998년 말 당시 세계 랭킹 2위였던 곡물 메이저 콘티넨털까지 인수해 세계 곡물 시장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군림했다. 세계 72개국에 공장을 천 개가 넘게 두고 세계 각국 노동자 10만 명을 부리고 있는 카길은, 전세계 100여 나라와 거래를 트고 있는, 말 그대로 ‘글로벌 기업’. 지난해 매출액이 5백억 달러로 웬만한 개발도상국의 1년 수출액과 맞먹는다.

카길은 한국도 단골 손님으로 두고 있다. 한국 수입 곡물 시장에서 카길은 점유율 60%를 자랑한다. 식량 자급률이 30% 이하인 나라에서 전체 수입 곡물의 60%를 단 하나의 곡물 기업이 공급하고 있으니, 한국인의 먹는 문제는 사실상 카길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WTO 농업 협상은 ‘카길 협상’이다”

카길은 미국 정부와 대외 경제 정책을 공조하면서 성장해 왔다. 지난 2월, 미국 부시 대통령은 카길 최고경영자 워렌 스탤리를 대통령 직속 수출자문위원회(PEC) 위원으로 임명했다. 워렌 스탤리는 “위원회 구성원으로서 미국 식품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며, 미국 상품을 위해 해외 시장을 개방하는 데 기여하겠다”라고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카길의 영향력과 위상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인도의 환경사상가인 반다나 시바는 “WTO 농업 협상은 ‘카길 협상’으로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카길의 당시 부회장 댄 암스투츠가 미국을 대표해 협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반다나 시바는 “남반구 시장을 개방하고 ‘농민 농업’을 ‘기업 농업’으로 바꾸는 것이 카길과 농업 협정의 주요 목표다”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암스투츠는 지난 3월 이라크 전쟁 직후 부시 대통령에 의해 농업재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공정 무역’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 옥스팜의 캐빈 왓킨스 정책국장은 당시 “댄 암스투츠에게 이라크 농업 재건 책임을 맡긴 것은 마치 사담 후세인을 인권위원회 의장에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이같은 조처를 비난했다. 그가 보기에, 암스투츠는 이라크 농업재건국장의 지위를 이용해 미국산 곡물을 이라크 시장에 덤핑으로 공급함으로써 이라크를 미국 곡물 회사의 안방으로 만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WTO 각료회의 때 모인 세계 농민들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자국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1900억 달러에 달하는 농업보조금 문제를 집중 성토했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의 농업 보조금 인상 정책으로 아르헨티나는 곡물 가격이 폭락해 외환 위기에 ‘혹’을 붙였다. 베트남과 태국 또한 쌀농사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유럽에서는 1999년에만 농부 20만명이 농토를 갈아엎었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에만 농장 23만5천개가 문을 닫았고, 1996년과 1999년 사이 농가 소득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자살하는 농부가 늘었다.

선진국의 농업보조금은 이처럼 자국의 농민에게나 개발도상국의 농민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전체 농장의 20%가 국가 보조금의 80%를, 미국에서도 전체의 10%에 불과한 대농장이 정부 보조금의 66%를 독점했다는 조사 보고도 있다. '푸드 퍼스트(Food First)’의 피터 로셋은 바로 이 때문에 “정부의 농업보조금이 고스란히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전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영세 농민이 점차 설 땅을 잃게 되자 중미·북미·유럽의 농민을 중심으로 농민들은 국경을 넘어 단결하기 시작했고, 1992년 세계 농민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를 결성했다. 현재 비아 캄페시나에는 70여 나라 120여 농민 조직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번 WTO 각료회의 저지 활동으로 더욱 더 굳게 단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8년 1월 카길은 다국적 화학 회사인 몬산토와 손잡고 바이오 농산물 회사 ‘레네젠’을 설립했다. 레네젠은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유전자 조작 곡물과 사료를 개발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으로 ‘악명 높은’ 몬산토는 세계 종자산업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회사 총수입의 대부분은 농약 판매를 통해 벌어들인다.

몬산토의 ‘라운드업 레디’ 콩은 자사 제초제인 라운드업에 내성을 지니도록 유전공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모든 잡초를 죽일 수 있는 라운드업 제초제를 개발하고, 이어서 그 제초제에 견딜 수 있는 콩 종자를 개발해 몬산토는 두 제품을 더 많이 팔 수 있게 되었다.

몬산토가 의도적으로 전세계 곡물에 유전자 조작 작물을 섞어 오염시키고 있다는 주장이 환경단체를 통해 제기되고 있다. 멕시코 옥수수에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의도적으로 섞어 수출했고, 인도에서도 면화를 오염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해서도 2001년 1월 카길이 유전자 변형 품종인 사료용 옥수수 ‘스타링크’를 ‘식용’으로 수출했음이 밝혀졌다. 카길은 통관 검사 과정에서 스타링크 옥수수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증명서까지 첨부했다.

흉작 들면 매점매석으로 ‘떼돈’

지난 WTO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은 관세 인하, 의무 수입 물량 확대, 수출 보조금 폐지, 추곡 수매제와 같은 농업보조금 제도 감축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선언문이 받아들여져 한국 농산물에 ‘시장’과 ‘경쟁’ 논리가 적용되면 한국 농업은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중국 동북 3성에서는 쌀 1kg이 2위안, 한국 돈으로 3백원에 거래된다(국내 쌀값은 1kg당 2천원이 넘는다). 그것도 농약을 듬뿍 친 쌀이 아니다. 중국 동북 3성에서는 요즘 ‘녹색 입쌀을 생산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쌀농사를 대규모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운동이 한창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규모 농장에서는 경비행기가 씨를 뿌리고 약을 뿌린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농촌 체험을 한 사람은 밭에서 한나절 내내 호박을 따도 한 고랑을 마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밭에서는 지평선이 보인다.

정부는 농업 개방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으면서 공산품을 수출해 그 돈으로 농산물을 수입해 먹는 것이 비교 우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농촌 공동체를 해체하고, 수많은 농민을 도시 빈민으로 만들고, 우리의 밥상을 외국 기업에게 맡기는 것이 과연 안전한가.

곡물 메이저들은 구호 기관이 아니다. 곡물 메이저들은 인공 위성을 통해 세계 농산물 작황을 수시로 파악해, 흉작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해당 곡물을 매점하고 가격을 올리는 작업에 들어간다.

한국은 1980년대 냉해로 인한 쌀 흉작으로 미국 코넬 사로부터 t당 200달러이던 쌀을 550달러에 사들인 경험이 있다. 일본이 1993년 흉작으로 쌀을 수입했을 때 국제 쌀 가격이 71% 급등했다.

미국과 유럽이 농산물 보조금 제도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식량 안보’에 대한 고려 때문이다. 실제 세계의 식량 수급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중국·인도·인도네시아·러시아·동유럽 등 식량을 자급했던 인구 과밀 국가들이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월드워치 연구소 레스터 브라운 소장이 지적했듯이, 1994년부터 식량을 수입하기 시작한 중국이 앞으로 세계 식량 수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게다가 이상 기후가 세계 곡물 시장을 흔들 것이다.

올해 한국 농촌을 절망으로 빠뜨린 것은 WTO 농업 협상만이 아니다. 하늘이 점지해준다는 한 해 농사가, 이틀에 한 번꼴로 쏟아 부은 장대비와 저온 현상, 그리고 태풍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기상 이변으로 식량 위기가 닥칠 경우 세계 굴지의 곡물 메이저들이 한 나라 국민의 생사까지 좌우할 가능성이 점점 현실성을 갖기 시작했다.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어야 공산품 수출 시장이 열린다는 것도 착각이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수출 시장 확보를 위해 선진국과 개도국에 공산품 관세를 인하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의 <가디언>은 최근 이경해씨의 고향인 전북 장수를 찾아 한국 농업의 현실을 보도하면서 ‘눈물의 들판’이라는 표현을 썼다. 다국적 곡물 기업 카길의 횡포를 고발한 책 <보이지 않는 거인>의 저자 브뤼스터 닌은 ‘초국적 곡물상이 세상을 지배할수록 소농을 보호해야 하고, 정부는 땅을 일구는 농민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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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 기후위기 대응과 지역에너지전환을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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