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로기업 직원들은 골드만삭스가 입주해 있는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서 보름 넘게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박수원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에서는 보름 넘게 '나홀로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비가 내리는 지난 4월 25일 오후1시. (주)진로 직원 최 아무개(28)씨는 2시간 넘게 1인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발 밑에는 '골드만삭스를 국민여러분께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최씨는 왜 시위에 나선 것일까.
"회사가 화의조건을 100% 지키고 있고, 영업이익도 나는 상황에서 왜 골드만삭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20, 21층에는 외국계 투자회사 골드만삭스가 입주해 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최씨가 1인 시위를 벌이는 동안 경비업체 직원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법정공방
소주 '참이슬'을 만드는 (주)진로는 화의기업이다. 1997년 회사 부도 이후 5년 동안 화의상태로 있었다. 진로는 최근 1조600억원의 외자를 유치해 채무변제와 함께 화의를 종료할 계획을 세우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외자유치가 마무리된다는 보도자료까지 배포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난 4월 3일 (주)진로에 대해 채권자인 미국계 금융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가 법원에 전격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해 '외자유치'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확히 말하면 골드만삭스는 870억원 채권을 가지고 있는 아일랜드법인 회사 세나 인베스트먼츠를 앞세워 진로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서를 제출했다.
(아래 <박스기사> 참조)
골드만삭스가 갑자기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진로는 "제3자 매각을 통해 이익을 노리려는 처사"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노조 차원에서 연일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진로에 대해 채권을 가지고 있는 국내외 채권사는 모두 96개사로 국내 68개, 외국 28개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파악된 국내 채권자 지분은 대략 60%선이다.
화의기업이 법원에 외자유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전체채권자 가운데 75%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30% 이상의 우호지분을 확보했다는 골드만삭스 주장이 사실이라면 진로 외자유치는 사실상 어렵다. 여기다 법정관리가 법원에 받아들여질 경우 회사경영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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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악연'은 뿌리가 깊다. 진로는 지난 97년 부도 직후 구조조정 자문을 위해 97년 11월 14일 골드만삭스와 비밀유지계약을 체결했다. 진로는 IMF로 인해 자금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자산 매각과 외자유치를 통한 경영구조 개선이 절실했다.
마침 경영컨설팅과 금융투자회사 자문회사인 골드만삭스가 경영조언을 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고, 진로쪽은 비밀유지계약을 맺고 진로그룹 계열사들의 재무현황과 향후 자산처분과 외자유치 계획 등 경영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진로 관계자는 "골드만삭스가 비밀유지계약을 어긴 채, 내부정보만 빼내고 결국 컨설팅 본 계약은 맺지 않았다"고 말했다.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비밀유지계약을 지키지 않은 근거로 골드만삭스가 진로홍콩법인과 진로재팬에 접근한 사례를 꼽고 있다.
진로홍콩은 (주)진로의 자회사이며, 진로재팬은 진로홍콩이 100% 출자해 만든 회사다. 특히 진로재팬은 일본 시장에서 일본 소주회사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수익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로에 따르면, 이미 골드만삭스는 진로홍콩이 진로재팬을 매각해 외자를 유치할 계획임을 알고 1998년 10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진로홍콩의 변동금리채(Floating Rate Note)를 집중 매집한 후 진로재팬 외자유치가 성사단계에 이르자 2001년 1월 16일 진로홍콩과 (주)진로에 매집한 채권의 변제를 요청했다는 것.
진로가 골드만삭스에 변동금리채의 100% 변제는 어렵다고 거부 의사를 펴자 골드만삭스는 2001년 12월 14일자로 진로홍콩 파산을 신청하기에 이른다. 이외에도 골드만삭스가 진로건설과 진로종합식품에 대한 화의취소 신청 후 자회사를 동원해 진로그룹 계열사의 채권을 계속 매수하자 진로는 2002년 3월 5일 골드만삭스를 상대로 채권매수 가처분 신청을 서울지방법원에 제기하기까지 했다.
진로가 채권금지가처분 신청을 내자 골드만삭스는 2002년 5월 17일 (주)진로 소유의 일본 상표권에 대해 일본 동경법원에 가압류를 신청해, 5월 24일 가압류 결정이 내려진 상태다.
진로는 이에 대해 "골드만삭스를 포함해 모든 채권자들에게 화의조건에 따라 채무변제를 성실하게 이행해 오고 있었다"면서, "골드만삭스가 채권에 대한 보전을 위해 (주)진로 재산에 가압류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상표 가압류를 한 것은 악의적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물론 골드만삭스측 이야기는 다르다. 골드만삭스의 한 관계자는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내부정보를 이용해 변동금리채를 매집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면서, "골드만삭스 구조상 경영컨설팅 회사와 투자회사와는 서로 정보를 나누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채권 매집은 내부 경영정보가 아니더라도 이미 공개된 정보를 보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4월 3일 세나 인베스트번츠를 내세워 진로에 대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 박수원
진로 법정관리 신청 배경에 대해 골드만삭스 관계자는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진로가 해외자본 유치 과정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진로가 해외자본 유치를 계획하면서 채무조종계획으로 제시한 15년 기간을 골드만삭스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법정관리로 뒤통수를 맞은 진로는 지난 4월 21일 골드만삭스를 상대로 1547억원의 손해배상청구권 보전을 위한 채권가압류 신청서를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진로는 신청서에서 "골드만삭스의 진로홍콩에 대한 파산신청과 일본내 상표권 가압류로 기업회생을 위한 외자유치계획에 결정적인 차질을 빚어, 그 결과 외차유치 불발로 늘어난 이자 손해액 1269억원, 상장폐지로 인한 주가 손실액 278억원 등 모두 1547억원 손해를 입었다"면서, "골드만삭스의 파산신청 등 외자유치 방해행위는 자신의 채권을 다른 화의채권자보다 먼저 변제받을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당한 채권자로서의 행위가 아닌 권리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골드만삭스는 진로의 외자유치를 채권단 이익보다는 경영권 보호를 위한 움직임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이익 남는 장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골드만삭스는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제3자 매각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자기 잇속을 철저히 챙기겠다는 계산이다.
최종 판단은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법원이 골드만삭스 주장을 받아들여 법정관리 신청에 손을 들어줄지, 아니면 진로의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자구계획을 승인할지 그 결정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진로 법정관리 결정 여부에 따라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투자자본과 국내기업과의 관계설정에 상당한 지각변동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 | 진로 법정관리 신청 회사는 '페이퍼 컴퍼니' | | | 세나 인베스트먼츠는 골드만삭스의 대리인 | | | | 골드만삭스가 법정관리 신청인으로 내세운 세나 인베스트먼츠는 아일랜드 더블린 소재 법률사무소로 확인됐다. 골드만삭스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2003년 1월 7일 세나 인베스트먼츠라는 회사에 진로 채권 870억 원을 양도했고, 이 채권을 양도받은 세나 인베스트먼츠는 골드만삭스를 대신해 진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진로는 "법정관리 신청 후 세나 인베스트먼츠라는 회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홍콩, 미국, 아일랜드의 전문기관에 용역을 준 결과 세나 인베스트먼츠는 지난 11월 27일 아일랜드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페어퍼 컴퍼티는 종업원과 사무실 등 인적·물적 실체가 없는 형식상의 서류회사로 국내법상 이러한 회사는 특별한 목적 외에 허용하고 있지 않는다는 게 진로측 설명이다.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이런 페이퍼 컴퍼니를 내세워 법정관리 신청을 한 것은 비밀유지계약유반, 손해배상 소송 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명백한 소송신탁인 만큼 법정관리 신청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소송신탁이란 법률상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약점이 있어 채무자에게 직접 소송을 거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 채권자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제3자에게 채권을 양도해 대신 소송케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골드만삭스는 "세나 인베스트먼츠는 회사가 갖춰야할 등기이사나 자본금 등의 조건을 이미 충족한 엄연한 회사"라며 "한국에 나와 있는 투자회사들은 대부분 페이퍼 컴퍼니이기 때문에 세나 인베스트먼츠라고 해서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라고 설명했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차장 하승수 변호사는 "페이퍼 컴퍼니라고 해서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채권을 양도한 시점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면서, "채권을 양도한 시점이 의도적이라고 한다면 소송신탁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 박수원 기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