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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3.17 11:47최종 업데이트 03.03.17 14:51

<연재소설> 민나 집시데스 1

괴짜 화가 가지오 (1)

"벨라!벨라!(bella ; '미녀'를 뜻하는 이태리어)"

녀석은 아까부터 주문이라도 외듯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코레오는 몇 가지 상념들을 끄적거리고 있던 메모장에서 눈을 떼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시원한 콧날하며 윤곽이 뚜렷한 옆얼굴이 얼핏 보아도 미남형의 젊은이였다. 녀석이 끼고 있는 짙은 색 쟌니 베르사체 선글라스 유리알 아래로 호기심에 가득 찬 강렬한 눈빛이 엿보였다.

눈앞으로 지나간 듯 막 앞쪽으로 늘씬한 아가씨 둘이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발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나칠 때 녀석의 넋두리를 들었던지 그 중 한 아가씨가 미소를 지은 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고는 멀어져 갔다.

쟌니 베르사체 선글라스 녀석은 아가씨들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음료수 잔에 손을 뻗었다. 얼음이 흔들거리며 레몬조각이 글라스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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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테이블을 끼고 같이 앉아 있던 다른 젊은이가 상체를 구부려 녀석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지 수군거리자,

"큭큭큭."

두 녀석 모두 한동안 몸을 비비꼬면서 정신없이 웃어댔다. 친구인 듯이 보이는 다른 젊은이는 빡빡 밀은 백고머리 위에 파란알의 선글라스를 올려놓은 맹꽁이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어서 그 자신이야말로 코레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실없는 놈들.'
여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입꼬리를 올리고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낄낄거리곤 하는 두 녀석을 바라보면서 코레오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하기사 두세 명이 합세한 그 또래 젊은이들의 이런 수작은 굳이 여기가 이태리가 아니더라도 보기 드문 광경은 아닐 것이다.

두 녀석 모두 스무 살이나 갓 되었을까, 활기에 넘치는 청년들의 짓궂은 모습이 밉지 않다고 생각하며 코레오는 간장종지처럼 작은 에스프레소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갈증이 더욱 심해지면서 입 안에 진한 커피향이 끈끈하게 남았다.

오후 1시가 좀 지난 로마의 한낮, 코레오는 길게 타원형으로 뻗은 나보나(piazza Navona ; 로마 시내 중심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광장) 광장의 한 노천카페에 앉아서 이따금씩 카페 마끼아또(caffe macchiato;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조금 섞음)를 홀짝거리며 은행문이 다시 열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들의 옷차림이 관광객풍인 것을 보면 지방에서 올라왔을까? 아니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라틴계의 나라에서 왔을까? 점심시간이라곤 하지만 이곳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외지에서 온 뜨내기일 것이다.

다른 곳보다 커피 값이 몇 배나 비싼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조각 분수들이 늘어선 것으로 유명한 나보나 광장의 명성에 홀린 관광객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이태리 땅을 밟은 터라 며칠째 짐을 호텔방에 부려놓은 채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곳 로마는 코레오에게 결코 낯선 땅이 아니었다.
물이 말라붙은 채로 저기 광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4대강(나보나 광장에 있는 그 당시에 큰 강으로 알려지던 나일 강, 갠지스 강, 다뉴브 강, 플레이트 강들을 의인화한 것으로써 유명한 조각가 베르니니에 의해서 디자인된 조각분수임)의 분수만 해도 어느 여름날 코레오가 손바닥을 모아서 시원하게 떨어지던 물줄기를 받으며 뛰놀던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 날이면 부모님은 아직 아기였던 어린 여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얼르면서 개구쟁이에게 포근한 미소를 보내시곤 했던 것이었다.

코레오는 지금까지도 강규태라는 자신의 본명보다는 어릴 때 급우들이 코레(Corea; 한국을 말하는 이태리어)에서 왔다고 해서 붙여주었던 코레오라는 별명이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익었던 이름이어서인가?

오랜 세월이 흘러간 지금 비록 노천카페에 홀로 앉아서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있지만 이곳 로마는 그의 유년시절의 기억 모두가 담겨 있는 늘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이 쌍년이!"
"죽일 테면 어디 죽여봐!"

갑작스런 왁자지껄한 소동에 어린 시절의 회상에서 돌아온 코레오는 고개를 돌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뜻밖의 소동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젊은 남녀가 마주서서 고함을 지르며 험악한 얼굴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회색 남방에 꼭 끼는 청바지를 입은, 부스스한 긴 머리를 헝클어뜨린 남자가 여자의 가슴을 손으로 냅다 떼밀치는 광경이었다.

"아이구! 저 놈이 날 죽인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여자가 눈을 홉뜨고 흰자위를 번득이며 비틀거리며 일어서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사내 앞으로 달라붙어서,

"철썩."

사내의 뺨을 큰 소리가 나도록 올려붙였다. 느닷없이 빰을 얻어맞은 사내는 분을 못 이기는 듯 마구 달려들어서 여자가 걸치고 있던 소매 없는 얇은 블라우스를 훽하고 끌어당겼다.

"쫘―악."

천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옷의 한쪽 어깨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미끄러져내린 블라우스 사이로 여자의 허연 젖가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쪽으로 쏠리며 그때까지 웅성웅성하던 놀라움의 소리가 쥐죽은 듯이 가라앉고 말았다.

그 안에 어떻게 저런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있었을까. 코레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햇빛에 타들은 그녀의 거무튀튀한 얼굴과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허름한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허연 젖가슴을 번갈아 보았다. 한쪽 젖가슴은 뽕나무 열매 같이 발그스름한 젖꼭지까지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듯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꼴까닥."
예기치 않은 구경거리에 여기저기서 목젖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레오가 불현듯이 아까의 그 선글라스 청년들을 떠올리고 돌아보았을 때 녀석들은 둘 다 벨라벨라도 잊어버린 듯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멍청이들! 지금이야말로 정작 벨라벨라를 외쳐야 할 때가 아닌가?' 어느 사이엔가 선글라스까지 벗어들고 넋이 나간 듯 턱을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들을 쳐다보며 코레오는 생각했다.

이제 사내는 여인의 팔을 잡아 흔들어 바닥에 넘어뜨리고는 잡아먹을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는 바닥에 두발을 뻗은 채 아예 안방처럼 편하게 앉아 있었다. 발끝까지 오는 여인의 긴 치마가 광장 위에 넓게 부채살을 만들었다.

"아유또 미(aiuto mi '도와주세요'라는 이태리어로 일반적인 도움의 요청 외에도 걸인들의 구걸시 흔히 쓰임)! 아유또 미!"

여자는 한손으로 흘러내린 블라우스 자락을 모아쥐고 어깨에 갖다붙인 채 이제까지의 사나운 목소리와는 다른, 사뭇 슬프고도 처량한 목소리를 짜내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라는 것인지 그 자신을 향해서인지 분간하기 힘든 애매한 태도로 연신 울부짖으며 다른 한손으로 치마 밑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밥공기만한 플라스틱 그릇을 꺼내어 달랑 손에 들었다.

코레오가 여자의 남루하고 치렁치렁한, 흔치 않은 옷차림에서, '집시!'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렸을 때, 아직도 분이 안 풀렸다는 듯이 씩씩거리면서 사내는 광장 한 켠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몇몇 사람들이 동전을 꺼내들고 여자에게 다가갔지만 여자는 무엇에 쫓기는 듯한 불안한 눈망울만 사방으로 부지런히 굴릴 뿐, 정작 구걸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이 보였다.

"땡그랑."

사람들이 건네주는 동전도 미처 다 받아 담지 않은 채, 여자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바닥에서 튀어오르는 서슬에 플라스틱 그릇에서 떨어진 동전 몇 닢이 사방으로 굴렀다. 1000리라(Lira; 이태리의 화폐단위로 1000리라는 600원 정도의 가치임)짜리 지폐 한 장이 두세 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종이비행기처럼 사뿐히 광장에 내려앉았다.

주춤주춤 뒤로 몇 걸음 물러선 여자는 몸을 홱 돌려서 조금 전 사내가 간 방향과 반대편으로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코레오는 갑자기 이유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끼면서 얼른 손으로 옆의 의자를 더듬었다. 무언가 마땅히 손에 잡혀야 할 것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도, 도둑?"

코레오는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치려 했으나 입만 간신히 달싹거렸을 뿐 말이 되어 나가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바람소리 같은 파열음이 들렸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둔기로 뒷덜미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 속이 하얘지면서 멍한 상태가 돼 버렸다.

순간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급히 골목 안으로 뛰어들고 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정 가죽잠바에 아주 짧게 깎은 머리였다.

"도둑이야!"

소리치며 다시 앞쪽을 쳐다보니 아까 여자와 싸우던 사내는 이미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고, 여자만이 아직도 광장을 다 가로지르지 못한 채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저 멀리 뒤뚱뒤뚱 달려가고 있었다.

잡아야 한다! 광장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저 여자를 빨리 쫓아가야 한다! 달아나는 여자를 보며 코레오의 이성은 명령하고 있었지만, 머리속의 생각과는 반대로 다리는 어느덧 뒤로 돌아서서 방금 사내가 뛰어들었던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하여 골목으로 뛰어들어간 코레오는 갑자기 눈앞을 딱 막아서는 벽을 보고는 당황하며 멈춰 섰다. 의외로 짧은 골목은, 다시 보니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끝에서 T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느 쪽일까? 재빨리 양쪽을 둘러보자 왼쪽으로 꺾인 골목 안에 한 늙수그레한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서 코레오를 멀뚱멀뚱 올려다봤다.

애원하는 듯한 심정으로 그 영감을 바라보자 마치 코레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손가락을 힘없이 들어 반대쪽을 가리켰다.

급히 몸을 돌려 전력을 다해 오른쪽 골목을 달리면서도 코레오는 뭔가가 계속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긴 골목을 끝까지 달려, 밖을 내다 본 코레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골목과 연결된 조그만 광장에는 쇼핑봉지를 손에 늘어뜨린 할머니 한 명이 꾸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한가하게 걷고 있었을 뿐 달리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속았구나!'

납덩어리 같은 생각이 코레오의 가슴을 눌렀다. 갔던 길을 급히 되돌려서 숨이 목에 붙도록 헐레벌떡 노인이 있던 곳까지 돌아왔지만 이미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 속에 여권이랑 다 들어 있는데."

'큰일났구나!'하는 생각 이외엔,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코레오는 텅 빈 골목 안에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 다리는 마치 태엽이 감긴 자동인형처럼 저절로 비척비척 움직여서 코레오를, 정말 바보같이도 코레오를 아까 앉았던 그 노천카페로 다시 데려가고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의자에서 떨어져서 테이블 밑으로 굴러 들어갔는지도 몰라.'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가능성이나마 억지로 믿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계산을 안 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어쨌든 코레오는 다시 되돌아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아까 앉아 있었던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 침착해야 해. 가방을 잃고 바보처럼 허둥거리기까지 할 수는 없지.'

마치 남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자리에 앉은 코레오는 커피 값을 치르려고 바지 호주머니를 뒤져보고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호텔의 명함, 공항에서의 환전영수증 등 잡다한 종이조각들만 손에 잡힐 뿐이었다.

그제서야 늘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지갑을 오늘따라 호주머니가 불룩한 것이 귀찮게 느껴져 핸드백에 옮겨 넣었던 것이 생각났다. 얼마간의 현금과 크레디트 카드들이 들어 있는 지갑마저 놈들한테 뺏겨버린 것이다.

망연자실하게 앉아서 파도가 쓸려나가는 것같이 쏴아―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는 코레오를 웨이터가 힐끔힐끔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어떡한다지, 돈이 없으니. 설마 여기서 금방 당한 것을 보고도 그까짓 에스프레소 한 잔 값에 사람을 붙들어 놓진 않겠지. 내일 갖다 준다면? 아! 그러고 보니 여행자수표도 몽땅 그 안에 있었구나. 그렇지만 다행히도 흉내내기 어려운 한자 사인이니 사용할 순 없을 거야. 그나마 은행문이 닫힌 바람에 현금으로 바꾸지 못했던 것이 천만 다행이군.'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마음속에 오고 갔다. 오전에 코레오가 호텔에서 나온 것은 여행자수표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여행자수표가 안전하다는 말에 전액을 수표로 갖고 나왔는데 로마에 도착하고 보니 공항에서부터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긴 줄을 기다렸다가 환전해서 시내로 들어왔지만 호텔에 체크인한 지 이틀만에 식사비며 택시비 등으로 이내 현금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집을 얻으려 해도 어차피 현지화인 리라가 필요할테니 매번 번거롭게 환전하기보다, 절반정도는 현금으로 바꾸어 호텔의 세이프티 박스에 보관해두기로 했다.

하지만 아침에 늑장을 부리다가 그만 은행의 점심시간에 걸리고 말았다. 코레오는 우선 스파게티 알 포모도르(spagetti al pomodoro; 토마토 스파게티)와 인살라타 베르데(insalata verde; 야채샐러드)로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발길 닫는 대로 거리를 걷던 중에 이곳 나보나 광장에 당도했다.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다시 은행문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참이었다.

"민나 집시데스!('모두 집시입니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섞인 일본어)"

등 뒤로부터 누군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아까 처음 카페에 왔던 때부터 건너편 테이블에서 혼자 스케치북에 무엇인가를 끄적거리던 바로 그 일본인이었다. 이마의 양끝이 깊게 파고 올라가서 머리카락이 약간 뒤로 벗겨진 듯한 삼십대 중반쯤의 남자였다.

길고 가늘게 째진 눈에서는 작은 눈동자가 영민하게 반짝였다. 튀어나온 넓은 이마에 비해서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작은 코와 입, 귀 등이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얇고 색이 흐려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첫눈에도 차가운 인상의 사내였다.

다들 이삼오오 짝을 지어 즐겁게 떠들고 있었는데 혼자서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던 사람은 자신과 그 남자 둘밖에 없었던 터라 코레오는 그의 존재를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웨이터에게 주문을 하고 있을 때 흘낏 자기 쪽을 쳐다보았던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코레오는 왠지 모를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코레오는 오늘같이 한가한 상태에서 일본인과 서로 눈길을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앉게 되면 가벼운 목례라도 건네야 할 것 같은 일종의 강박감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마치 해외여행 중에 기차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동족과 마주쳤을 때 한마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멀뚱멀뚱 앉아 있으면 어색한 것처럼…….

여느 때 같으면 코레오가 먼저 인사라도 건넸으련만, 아까는 그냥 혼자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로마의 햇살을 즐기고 싶었기에, 한번 눈길을 주었을 뿐 스케치북에 내내 눈을 박고 있던 그가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어렸을 때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일본에서 산 적이 있었던 코레오이기에 말이 통하고 감정이 통하는 그들 일본인들을 무의식 중에 동족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느 곳에, 특히 어릴 때에 살았던 일은 마치 공기와도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서 같이 숨쉬고 느끼게 만드는 일종의 동질성 같은 것을 부여하게 된다.

그런 코레오의 상통하는 느낌이 전해졌는지 그가 아무 스스럼 없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집시들이라니요?"

코레오는 가방을 날치기 당한 일로 잔뜩 마음이 상해 있었던 터라 별로 얘기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할 수 없이 그의 말에 대답하였다.

"아까 흉계를 꾸민 놈들이 다 집시들이란 말이요. 그 비열한 놈들이 노리는 것은 항상 당신 같은 관광객들뿐이요."

사나이의 말에 코레오는 오히려 자신이 나쁜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바보같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또 혹시나 해서 멋쩍게 되돌아온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 남자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각에 은근히 부아까지 치밀었다.

"……."
"다 털려버린 것 같은데 커피 값은 내가 내겠소. 돌아갈 차비는 갖고 있소?"
"고맙습니다, 걱정해 줘서……. 그리 멀지 않으니 걸어가도 됩니다."
"아니, 당신 일본인이 아니었소?"

남자는 코레오의 일본어 발음이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코레오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한국인이며 공부를 더해 볼 생각으로 어릴 때 살았던 로마로 다시 유학 오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아주 어렸던 4살 때 와서 쭉 로마에서 성장하며 유치원이며 초등학교를 다녔던 일이며, 그때 얻었던 코레오라는 이름을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버지가 이태리에서 일본으로 발령이 나서 불과 일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이 오사까에서도 살았던 적이 있어서 아마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당신이 오해했던 것 같다고…….

"아, 그랬군요. 미안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당신을 일본인 관광객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코레오! 제 이름은 가지우라 이찌로우입니다만, 저 역시도 가지오라는 이태리식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남자는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코레오를 쳐다보며 자신을 로마에 살고 있는 화가라고 밝혔다.

"괜찮습니다. 우린 서로 얼굴이 닮아 있으니까요. 외국에서 이렇게 마주치면 저 역시 한국인과 일본인을 쉽게 분간하지 못합니다."

코레오는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이태리어로 얘기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일본어가……."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그런데 이태리어는?"
"예, 대학에서 이태리어를 전공해서 지금까지도 늘 쓰고 있습니다만……."

가지오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이 이태리어로 말을 나누자 대화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참 큰일이야! 이제는 마음 놓고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실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당신같이 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오."
"그렇군요."

코레오는 가지오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사시는 동네가 어디입니까?"
"아닙니다.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예, 호텔이요? 여기 유학으로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아직 집을 구하지 못해서요."
"언제 오셨는데 아직……."
"며칠 됐습니다."
"벌써 며칠이나요! 이 로마가 호텔비가 얼마나 비싼 곳인데……. 유학으로 오실 생각을 했으면서 미리 있을 곳도 정해놓지 않고 어떻게……. 옛날에 로마에 살기도 했다면서 누구 도와줄 사람도 없었나요?"

"이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의 친구들은 오래전에 다 연락이 끊기고……. 그보다도 워낙 갑작스럽게 오게 돼서……. 우선 호텔에 있으면서 집을 구할 생각이었지요."
"여기선 그렇게 해서 집을 못 구해요. 이 로마가 얼마나 집 얻기가 힘든 곳인지 몰랐단 말이요! 구하는 사람은 늘 많지만 셋집이 거의 나오지 않지요. 특히 요즘 같아선 우리 같은 외국인은 집구하기가 더욱 힘들어서 집을 옮길 일이 생겨도 몇 달씩 이사도 못하고 있지요."

가지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가방까지 도난 당하셨으니……. 많이 잃지나 않으셨습니까?"
"여행자수표여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분실 신고를 하면 재발급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은행에 신고하러 가십시오!"

"수표번호를 적은 종이가 호텔방의 짐가방에 들어있습니다. 원래 따로 보관하잖아요. 그보다도 여권을 잃어버린 것이 더 신경이 쓰이는군요. 재발급 받을래도 시간도 걸릴 거고, 당장 쏘쪼로노(permesso di soggiorno; 이태리어로 체류 허가증) 신청도 해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군요. 당신 당분간 집을 못 얻겠군요. 외국인의 경우 여권이나 쏘쪼르노 같은 증빙서류가 있어도 이태리인이랄지 누군가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증을 서주지 않으면 집 얻기가 힘든 판에, 설령 집이 나온다 해도 아무런 증빙서류도 없는 당신에게 누가 집을 준단 말이오?"
"이를 어쩌면 좋지요!"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코레오는 신음하듯 말했다.

"일단은 경찰에 신고부터 하러 갑시다."

가지오는 자리에서 솟구치듯이 튀어 올랐다. 앉아있을 때는 중키 정도로 봤는데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약간 작은 키에 체격까지 왜소했다.
하지만 코레오를 향하여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하면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튀어오르려는 용수철처럼 마치 몸 전체가 스태미너로 똘똘 뭉친 듯 민첩하고 정열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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